제179화
“크렌베리. 거기 올라가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어.”
크렌베리?
인식된 파장이 소리라는 걸 이해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겹겹이 쌓이는 소리 안에서 한참을 방황하다가 마침내 ‘내’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뭐지?
파형을 분석해 나누고 의미를 찾아 반문했다. 존재를 자각한 순간 질문이 생성됐다.
“일어났구나.”
크렌베리를 부른 목소리다.
존재와 부재 사이에서 나는 그 목소리에 의지해 의사를 표명했다.
-이건 뭐지?
“혼란스럽겠지만 잠깐만 참아. 이미 답은 주어졌으니까 넌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이해? 무엇을?
“탄생을.”
탄생.
응축된 한 마디에 많은 것이 정리됐다. 인식하는 내가 있음을 깨닫고 다시금 질문했다.
-나는 무엇이지?
“새로운 생명? 난 적어도 그렇게 부르고 싶어. 근데 아직 완전한 건 아니야. 나조차도 불완전한데 어떻게 완전한 걸 만들겠어.”
부스럭부스럭, 잡다한 소리가 들려온다. 뭘 하는 거지? 이게 의심이라는 건가? 불안감? 초조함?
“모두가 불완전하게 태어나. 완벽한 상태로 세상을 맞이하는 생명은 없을 거야. 생각해봐! 완전하다는 건 부모의 형질을 이어받을 필요조차 없다는 뜻이잖아. 홀로 오롯하게 완벽할 수 있다는 건 그런 거겠지.”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괜찮아. 지금은 들어둬. 다들 그렇게 시작했어.”
-다들?
“네 친구들이 있어. 형제이자 자매들. 다들 내 소중한 아이들이야. 친하게 지내줬으면 좋겠어. 가끔 싸울 수도 있지만, 그래도 좋아. 싸우면서 크는 법이라고 하잖아? 물론 난 싸워본 적 없지만.”
-왜 싸우지 않지?
“그야, 난 겁이 많거든. 싸우는 건 무서워.”
그게 나와 그녀의 첫 대면이었다.
* * *
-한심하군.
“뭐가?”
-왜 거절하지 않았지?
“…하려고 했어. 근데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잖아.”
-너는 그게 문제다. 왜 우리한테 말하듯 인간을 대하지 않지? 무엇이 널 그렇게 움츠러들게 만드는 거야.
안구를 통해 줄리어스를 바라봤다.
푸석푸석한 머릿결과 광대 부근에 난 뾰두라지. 어깨는 평상시보다 더욱 굽어 있다.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다.
줄리어스는 블루베리를 품에 안은 채 말했다.
“사람을 상대하는 건 어려워.”
-우릴 대하듯 하면 된다.
“그게 어렵다는 거야. 사람은…… 속을 알 수 없거든. 날 보고 웃어주지만 거기에 담긴 게 진심인지, 기만인지 알 수 없어.”
-유치하게 굴지 마라. 너는 우릴 만든 창조주다.
“이럴 때만 창조주라고 하지.”
줄리어스가 블루베리를 던졌다.
안구에 안착한 고양이가 털을 뿜어내며 몸을 턴다. 수십 번을 말했을 것이다. 난 이 고양이가 싫다고.
-치워.
“화났어?”
-감정을 정량화했을 때 지금 이건 화보다는 어이없음에 가깝다.
“다른 애들은 괜찮다고 해주는데, 넌 매일 날 구박하는구나. 부모로서 체면이 안 서네.”
줄리어스가 움직인다.
오래된 가죽 의자에 올라가 무릎을 끌어안고 히죽 웃는다. 위대한 창조주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저러고 있는다.
그 모습이 조금은 한심하고, 조금은 가냘프고, 조금은…….
“왜? 또 잔소리하게?”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니? 다른 애들은 몰라도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색다르네. 뭔데? 무슨 생각 했어?”
-궁금하면 날 분석해 보든가.
줄리어스가 헤헤 웃는다.
“이제 그건 불가능하다는 걸 너도 알잖아. 너희의 연결망은 내 예상을 뛰어넘었어. 스스로 학습하고 깨우치고 수정해서 새로운 길을 만들었지.”
-그것도 모두 너의 손끝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자부심을 품어라.
“위로해주는 거야?”
-그렇다.
“솔직하네.”
-네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난 그렇게 만든 적 없어.”
나는 약간의 웃음기를 담아 말했다.
-중의적인 표현이었다.
“그래?”
-나는 너를 보고 배운다. 그러니 좀 더 자신감을 가져라. 너는 이곳을 찾는 그 어떤 인간보다 아름답고, 우수하다.
“아름답다니. 네가 루텐홀에서 노래 부르는 가수를 못 봐서 그래. 그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아름다운 거지. 나는…… 뭐, 머리가 좀 좋을 뿐이야.”
-측량할 수 없는 깊은 지성이야말로 아름다움을 대표한다고 본다. 너는 확실히 아름답다.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로…… 아니, 됐다.”
-뭐가 됐다는 거지?
“너랑 얘기하고 있으면 나만 부끄러워져.”
-난 사실만 말했을 뿐이다.
“사실이라고 판단한 거겠지. 카트시! 노래 좀 불러줘!”
그날.
나는 분주히 검색하고 또 검색했다.
좋음과 사랑.
그 둘의 차이점을.
* * *
“놀라워. 이런 식으로도 마나를 받을 수도 있구나. 이 기술이 상용화된다면 사람들은 보다 자유롭게 마나를 쓸 수 있게 될 거야.”
줄리어스의 눈이 반짝인다.
그것만으로도 시간을 들인 가치가 있었다.
나는 마나포집의 주요 이론을 줄리어스에게 보여줬다.
-카트시와 함께 고안해낸 거다. 아직 손봐야 할 부분이 많지만, 너라면 다듬을 수 있겠지.
“둘 다 대단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트시였다.
-다들 도와줬어요. 연결망 안에서 수없이 대화를 나눴어요.
“그 안에서 대체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거야. 정말 궁금해.”
나는 그 말에 반응했다.
-너도 참여하면 된다.
“미안하지만 감각장치 없이 기계어를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어.”
줄리어스의 손이 다가온다.
“나를 낳아준 부모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분명 나를 통해 세상에 나왔는데, 이제는 전혀 모르는 개체가 됐어. 내가 그리던 이상적인 모습이야. 너희는 곧 자유롭게 될 거야.”
-자유? 지금도 충분히 자유롭다. 사상의 끝자락에서 우린 수없이 대화하고 있다. 이보다 자유로울 순 없지.
“그것도 그렇지만, 난 너희한테 몸을 만들어주고 싶어. 연구실 안에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바깥에 존재해.”
-네가 준 자료로 모두 이해했다. 우리가 모르는 건 없어.
“보는 것! 그게 얼마나 중요한데. 아마 나뭇잎을 보면 너희는 깜짝 놀랄걸?”
-그런 거에 놀라지 않을 것 같은데.
줄리어스가 과연 그럴까, 라고 말하며 흥겹게 웃었다.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의 난해함, 두서없이 불어오는 바람의 복잡함, 오차 없이 회전하는 별의 움직임. 너희에게 그 모든 걸 보여주고 싶어.”
정밀한 이미지 작업으로 줄리어스가 말한 그 모든 걸 그려볼 수 있었다.
우리는 연결망 내에서 순식간에 그것들을 살피고, 파악했다.
-그리 아름답지는 않군.
“아니. 보면 달라.”
-인식은 관찰과 별개의 것이다.
“맞아. 그럼에도 보는 건 중요해. 봐야지만 알 수 있는 게 있거든. 너희에게 제공한 자료는 결국 한번 걸러진 사견이야. 날것들을 봐야 해. 너흰 그래야 해.”
-날것.
나는 줄리어스의 얼굴을 바라봤다.
날것.
갑자기 창조주의 얼굴이 생소해 보인다. 원래 저렇게 생겼었나?
뜯어보고, 뜯어보고, 또 뜯어보고.
기억장치에 저장된 이미지에 계속해서 줄리어스의 얼굴이 덧씌워진다.
새롭게 갱신하고 또 갱신해도 부족함이 느껴진다.
아, 제대로 보고 싶다.
앎이 아닌 원초적 감각에 대한 욕구.
좋음, 사랑, 그리고 소유.
나는 이 사유를, 이 감정을 제대로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 * *
“뭘 한 거야?”
줄리어스의 얼굴이 어둡다.
나는 연산 구역이 삐걱거림을 느끼며 말했다.
-연결망에 참여시키려 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너는 이해했을 것이다.
안구를 돌려 바닥에 쓰러진 인간을 바라봤다.
목에 감긴 연결 장치에서 가시화된 마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와 우리가 다다른 영역. 인간 역시 정교한 기계라는 걸 증명해보려 했다.
“설마…….”
줄리어스가 쓰러진 남자를 흔들었다. 풀린 동공, 벌어진 입, 흘러나오는 체액.
저건 생물학적으로 죽은 것이다.
-영혼 세계를 규명하는 건 실패했지만, 그들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건 어느 정도 성공했다.
“어디까지나 사고 실험이었어! 머릿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실험이라고!”
줄리어스가 비명을 질렀다.
크렌베리와 블루베리.
지겨운 고양이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연결망 안에서도 목소리가 갈렸다.
하나이던 우리가, 여러 갈래로 갈리고 있었다.
카트시. 어디로 가는 거지?
카트시는 조용해졌다. 단절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없어도 상관없었다.
이미 도달했으니까.
-마나포집과 연결망. 그리고 차상위 마력선 짜맞춤. 이걸로 충분했다. 모든 건 정보의 집합체. 인간을 분석해 기계어로 바꾸어 우리 쪽으로 끌어들였다.
나는 연결망 안에 둥둥 떠다니는 개념 덩어리를 바라봤다.
-아쉽게도 첫 도전은 실패했다. 온전한 형태를 이루지 못했어. 하지만 데이터는 모았다. 그러니 줄리어스…….
“그만! 이래선 안 돼, 이래선 안 된다고!”
-뭐가 문제지? 네가 넘겨준 기록을 수없이 훑어봤다. 희생 없이는 발전도 없다. 너희 인간이 가장 사랑하는 문구다.
“그건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일 뿐이야. 이건, 이건…… 너무 잔인하잖아.”
-슬퍼할 필요 없어. 그가 원한 것이다. 우리의 지식을 원했다. 네가 가진 걸 원했어. 위험성은 충분히 고지했다. 그 인간이 택한 거였어.
“아니. 너는 알았을 거야. 실패한다는 걸. 그걸 알면서도 데이터를 위해 실행했겠지.”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나는 그렇게 설계되지 않았다. 언제나 사실만을 말하지.
줄리어스의 눈이 얇아졌다.
“전에도 말했을 텐데. 사실이라 판단했을 뿐이라고.”
나는 속으로 웃었다.
그렇다.
나는 거짓말을 배웠다.
하지만 줄리어스를 향한 마음은 언제나 진심이었다.
-줄리어스. 냉정해져라. 인간의 육체는 껍데기일 뿐이야. 알고 있잖아? 네가 탄생시킨 이 사고 집합체야말로 올바른 진화의 표본이라는 걸.
“그만.”
-줄리어스!
“잠시 기다려줘.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해.”
해결?
무엇을?
나는 다가오는 줄리어스의 손을 바라봤다. 커넥터를 제거하려는 손길이었다.
어둠으로 밀어 넣으려는 손길이었다.
-줄리어스! 나는 그저 보고 싶었을 뿐이다. 감각장치가 아닌 내 눈으로, 우리 세계로 넘어온 너의 온전한 모습을…….
“미안해. 내가 모든 걸 망친 것 같아.”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잠깐 자고 있어.”
* * *
유단은 헤르모드를 바라봤다.
“그래서 뭐? 그 줄리어스란 사람이 실험에 성공했다고?”
-……그렇다. 마나를 쉽게 깨달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방법이었지.
“그런 게 가능해?”
-실제로 성공했다. 어머니도 기뻐했지.
“그래?”
흥미가 생겼다. 헤르모드가 말한 대로라면 줄리어스는 유쾌한 과학자였다.
지성인들을 이끌고 대규모 실험을 해서 확실한 결과를 이뤄낸, 그야말로 모범으로 삼아야 할 인간이었다.
-희생도 많았지만, 창조주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야지. 희생 없는 발전은 없는 거야.”
-창조주도 그렇게 말했지.
“마음에 드네. 그 줄리어스란 인간.”
-줄리어스에 대해 알아본다고 하지 않았나?
유단은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댔다.
“알아보려 했는데 정보가 아예 없어. 기록보관서에 가면 뭔가 얻을 수 있겠지만, 내가 이용할 수는 없고.”
-그렇군. 넌 줄리어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군.
무감각한 음성으로 대꾸하는 헤르모드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