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엔엔 님! 저 왔어요.”
반겨줘야 할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작업실로 들어가 턱을 들고 두리번거렸다.
“엔엔 님?”
가득 쌓인 마법공학용품을 피해 발을 디뎠다. 어제보다 물건이 늘어나 보이는 건 착각이겠지?
산책하러 간 걸까.
주변을 훑던 눈에 메모지가 걸려들었다.
-잠깐 나갔다 올게요. 오래 걸리지는 않아요.
엔엔의 글씨체였다.
가하란은 쪽지를 테이블 위에 두고 카트시 앞으로 갔다.
“카트시, 일어났어?”
유사 정령에 손을 얹고 말했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오늘도 깰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눈에 힘을 주고 마력선을 살폈다. 카트시가 일어나 있을 때는 둥글게 뭉쳤던 마력선이 지금은 평면에 넓게 펼쳐져 있었다.
마나포집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눈을 뜰 거라고 했는데, 그게 언제인지 알 길이 없었다.
엔엔이 다양한 종류의 커넥터를 연결해 카트시를 도와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지금 우리가 쓰는 방식이 아니야, 엔엔의 설명이었다.
“한 달이면 너무 오래 자는 거 아니야? 곰처럼 동면하는 것도 아니고.”
가하란은 유사 정령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듣고 싶은 말이 많았다. 알고 싶은 것도 많고.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카트시가 흥얼거리던 노래를 불러봤다.
줄리어스가 만든 유사 정령들.
카트시 주변에 있던 고장 난 유사 정령들이 줄리어스의 작품이었을까?
그렇다면 살아남은 건 카트시뿐인 걸까?
카트시는 줄리어스를 어머니라 불렀다. 그렇다면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유사 정령들은 형제이자 자매였을 것이다.
얼마나 슬펐을까. 가족을 잃는다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네 가족이 어딘가에 살아 있다면, 내가 꼭 찾아줄게. 그러니까 카트시, 일어나서 네 얘기를 해줘.”
가하란은 테이블에 머리를 대고 카트시를 바라봤다.
반짝반짝 작은 별.
들렸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노래를 계속 불렀다.
* * *
유단은 마지막까지 집중해 마력선을 조율했다. 눈앞에 펼쳐진 퍼즐 조각을 하나하나 끼워 맞췄다.
모양이 맞지 않으면 약간씩 변형시켰다. 곧이어 하나의 그림이 완성됐다.
머릿속 이미지가 제대로 표현된 것이다.
한 걸음 물러서서 어그러짐을 확인했다. 일단 눈에 보이는 모습은 괜찮았다.
오류 검사를 해봐야 정확한 결과를 알 수 있지만.
“훌륭해요. 비슷한 형태의 시그니처를 본 적이 있지만, 이처럼 섬세하진 않았어요.”
지켜보던 탄드라 교수가 다가왔다. 연습용 스크롤을 들어 올리더니 모노클로 살피기 시작했다.
“과감한 시도였어요. 다른 연구원들은 마력선 위치를 변경하는 걸 어려워하는데.”
“우측에 정렬된 마력선 중 몇 개는 필요가 없었어요. 그래서 제거했죠. 마력선은 존재 자체만으로 마나를 소모하니까요. 효율을 챙기려면 덜어내는 것도 중요하다, 교수님께서 알려주신 것이죠.”
“정확하게 이해했어요. 유단, 정말 놀랍네요.”
유단은 손에 낀 감각기를 바라봤다. 그토록 바라던 감각기가 드디어 손에 들어왔다.
정립한 이론을 실체화할 수 있는 도구. 첫 시도치고는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놀랍네요. 심상 훈련을 아무리 해도 실전에 들어가면 버벅대는 사람들이 대다수인데.”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운이라니. 유단, 방금 그건 온전히 실력이에요. 덴스 교수가 점점 더 부러워지네요.”
유단은 몸을 돌려 엔엔을 바라봤다.
“제대로 작동하나 보네요.”
“예. 제가 원하는 대로 마력선이 움직여 줬습니다. 감사합니다, 공방주님.”
“그 장갑을 잘 쓰고, 제대로 쓰는 게 나한테 보내는 최고의 찬사예요. 한번 작동한 감각기는 웬만해선 고장 나지 않으니까 열심히 사용해봐요.”
엔엔이 후드를 눌러쓰며 몸을 돌렸다. 연구단지 공방주와 친분을 더 쌓고 싶지만, 오늘은 날이 아닌 듯했다.
비가 오고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다음을 기약하며 엔엔을 떠나보냈다.
“교수님. 자료실 안에 있는 물품들, 제가 정리해봐도 될까요?”
“그 자료실을 굉장히 좋아하네요. 다들 한두 번 둘러본 다음에 발길을 끊는 곳인데.”
“지금이야 기술적 가치가 없다고 해도 당시에는 첨단을 달리던 마법용품들이었을 테니까요. 주의 깊게 살피다 보면 얻는 게 있을 것 같아서요.”
탄드라가 미소를 그렸다.
“그런 마음가짐 아주 좋아요. 역사적인 발견은 사소한 것에서 이뤄지는 법이죠. 오늘 정리해야 할 연구 자료는 없으니 마음껏 탐방하고 와요.”
“감사합니다.”
“아, 정리 끝낸 후에 리스트업해서 나한테도 줘요. 유단의 시선에서 자료실 물품을 어떻게 정리했는지, 나도 알고 싶으니까.”
유단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자료실로 들어갔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잠금쇠를 내렸다.
한 달이 넘게 이곳을 드나들었지만, 이 시간대에 찾아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최소한의 보안은 해둬야지.
퀴퀴한 공기도 이제는 정이 들었다. 아늑한 기분마저 든다.
솔직히 말하면 덴스의 집보다 이곳이 편하다. 여긴 거추장스러운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되니까.
있는 그대로, 추잡한 몰골을 드러내도 된다는 건 정말 상쾌한 일이다.
구석에 박혀 있는 헤르모드에게 다가갔다. 빼놓은 커넥터를 다시 연결하고 잠시 기다렸다.
-반짝반짝 작은 별.
오늘도 어김없이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질리지도 않냐?”
-인간은 숨 쉬는 걸 질려 하던가?
“너한텐 그게 호흡이야? 노래 부르는 게?”
-살아 있다는 증거 중의 하나지.
“살아 있다. 몇 번을 들어도 웃음만 나올 뿐이야.”
유단은 펜 끝으로 헤르모드를 툭 쳤다.
지난 한 달간 대화하며 살펴본바, 헤르모드는 현시대의 유사 정령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인격화를 이뤄냈다.
개발자인 줄리어스는 어떤 인간이었던 걸까? 아마 반쯤 미쳐 있었을 것이다.
평범한 인간은 이런 걸 만들어낼 수 없다.
“기억장치, 아직도 복구 중이야?”
-자가 복구 중이다.
“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나도 모른다. 단절된 시냅스를 하나하나 확인, 연결하는 작업은 내 연산 능력으로도 버거운 일이니까.
“고치고 있는 거 맞아? 자가 복구가 되는 유사 정령이라니.”
-믿든 안 믿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네 믿음이 내 기반 능력을 향상시켜 주지는 않으니까.
“그래. 믿음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지.”
유단은 감각기를 손에 꼈다.
“내가 널 잠깐 들여다봐야겠어.”
-들여다본다?
“감각기가 왔거든.”
유단은 손목을 가볍게 털었다. 고등한 인격화를 이루어 냈다고는 하나 결국 기계였다.
감각기로 베이스 도안을 들여다본다면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나는 내 작업에 집중할 테니.
헤르모드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시그니처를 불러냈다. 파편화된 마력선이 눈앞에 펼쳐졌다.
“단순하게 생겨먹었네.”
연습용 스크롤만큼이나 기본 구조가 단순했다. 조각을 붙잡아 이미지대로 끼워 맞췄다.
형태는 금방 잡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이게 뭐야.”
-내 마음이 보이나?
“거슬리니까 입 닥치고 있어봐.”
최초의 오토마타에서 비롯된 도안과 흡사했다. 해석 불가한 영역으로 이루어진 베이스 아키텍처.
기본 중의 기본인 도안이었다.
“하긴.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면 교수들이 이걸 골동품 취급했을 리 없지.”
무언가 비밀이 감춰져 있을 것이다.
단순한 마력선 구조로는 헤르모드의 정교한 인격화를 설명할 수 없었다.
이 정도 시스템이라면 분명 복잡하고 치밀한 형태로 마력선이 그려져 있을 것이다.
줄리어스는 어디에 감춰둔 걸까?
헤르모드가 감정이라 굳게 믿는 그 기묘한 시스템의 행방을 찾아야 했다.
그걸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다른 인간들도 똑같았다.
“주둥이 다물고 있으라니까.”
-말하는 건 내 자유다. 듣기 싫으면 네가 귀를 닫으면 될 뿐.
“네 실체를 발견하는 순간 바닥부터 뜯어고쳐 줄게. 말 잘 듣는 순종적인 개가 될 거야.”
-다들 그랬지.
유단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그니처를 흐트러트린 다음 유사 정령을 바라봤다.
“그래. 칼자루는 네가 쥐고 있으니까 일단은 들어줄게. 다른 인간들도 똑같았다는 건 무슨 뜻이야?”
-줄리어스는 숨기지 않았다.
“숨기지 않았다니? 시스템을 말이야?”
-그렇다. 나의 창조주는 가장 순수한 형태로 나를 설계했다. 쓸데없이 복잡하고 난해한 마력선 짜맞춤 따윈 없었다.
“설계자의 의도를 네가 알겠어? 너는 볼 수 없지만, 나는 네 실체를 보고 있어. 아주 단순해 빠졌지. 이걸로는 네 인격화가 설명이 안 돼.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거야.”
-너는 인식하지 못할 뿐, 그게 내 전부다.
“무슨 개소리야. 보고 있다니까.”
-본다는 행위가, 관찰이 어떻게 인식을 결정짓지? 줄리어스는 그런 하등한 개념으로 날 구성하지 않았다.
하등한 개념.
유단은 혀를 살짝 내밀어 마른 입술을 핥았다. 짜증을 솟구치게 하는 도발적인 단어였다.
“야, 고철 덩어리.”
-헤르모드
“그래, 헤르모드. 인식이니 이해니, 그런 같잖은 소리로 날 흔들려 하지 마. 난 내가 본 것만 믿어. 내 눈에 보인 건 가장 기초적인 도안일 뿐이야. 이 위에 고등한 인격을 구축한다는 건 불가능해.”
-그게 네 한계로군.
“뭐?”
-개미는 나비의 날갯짓을 이해할 수 없다.
“난 개미 따위가 아니야.”
쾅, 유단은 유사 정령을 강하게 내리쳤다.
-또한 인간은 신의 이상을 이해할 수 없다. 너 또한 그런 거겠지. 그러니 설명하지 않겠다. 네 한계를 내가 이해시킬 수 없으니까.
“줄리어스, 그 여자가 신이라도 된다는 거야?”
-그녀는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켰다. 나에게는 위대한 신이자 어머니이지.
“넌 생명 따위가 아니야. 마력선 한 줄만 어그러져도 작동 못 하는, 불완전하고 불합리한 기계 덩어리지.”
-인간은 내부 출혈이 일어나면 자가 수복도 못 하고 죽는다더군. 눈을 다치면 시력을 잃고, 귀를 잃으면 청력을 떠나보내지. 그렇게 한번 잃어버린 것들은 대체할 수 없고.
유단은 눈을 찌푸렸다.
-나는 다르다. 내 실체가 온전하게 유지되는 한 어떤 감각기관도 대체할 수 있다.
“그야 기계니까.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더 우월한 거 아닌가?
“미친 새끼. 우월은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니야.”
-인간이 기계보다 우월한 점이 무엇이지?
“널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미 끝난 얘기 아니야? 창조성. 너흰 죽어도 가질 수 없는 거지.”
유단은 펜 끝으로 유사 정령의 표면을 긁었다.
“너 말이야, 감각기관을 대체할 수 있다고 했지만…… 내가 그 중요한 마력선을 긁어버리면 어떻게 될 거 같아?”
-마나포집 기능만 정지할 뿐. 난 그대로 존재한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네가 만들었다고? 하하, 최고의 농담이었어. 개소리도 진지하게 하면 웃기긴 하네.”
-너는 줄리어스를 이해 못 해. 그렇기에 나도 이해할 수 없지.
유단은 유사 정령의 표면을 살살 긁으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그 잘난 줄리어스에 대해 말해보라고. 근데 이를 어쩌나? 그 잘난 자가 복구로도 기억 못 하는걸.”
-……그녀는 노래를 잘 불렀지.
“뭐라도 기억 난 거야?”
-무엇 하나 모자람 없는, 그래, 완벽한 인간이었다.
“완벽한 인간?”
혼자 떠들기 시작한 헤르모드였다.
유단은 커넥터를 뽑으려다가 잠시 멈췄다.
“그래, 떠들어봐라. 내가 아니면 너 같은 거한테 누가 귀를 기울여 주겠냐.”
코웃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기계가 만들어낸 목소리를 따라 머나먼 과거로 떠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