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7화
“폐하께서 염려해주신 덕에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내가 걱정한다 한들 다친 사람의 몸이 낫겠나?”
황제가 외투를 손에 들며 침상 옆 의자에 앉았다. 의전 때 걸치는 화려한 복장이 아닌 단출한 일상복이었다.
민은 황제의 얼굴을 바라봤다.
시민 사이에 섞어 놓으면 ‘꽤 잘생긴 남자’ 정도로 인식될 얼굴. 인상이 강렬하지도, 그렇다고 분위기가 특별하지도 않다.
그렇다.
제국 황제는 이런 사람이었지.
그렇기에 더욱 위험했다.
차라리 취향이나 특성, 개성이 겉으로 드러나는 사람이라면 편했을 것이다.
황제는, 아르드헨은 정말 읽어내기 어려운 인간이었다.
“몸 상태가 안 좋아 누워서 폐하를 영접하는 점,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사이에 따질 예의가 있던가?”
민은 의사와 상관없이 씰룩거리는 입가를 다잡았다. 하마터면 조소를 흘릴 뻔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언제나 하늘같이 생각하며 열성을 다해 섬겨왔던 터라, 예를 차리지 않는 게 너무 아쉽습니다.”
“내가 민 교수한테 그동안 몹쓸 짓을 많이 했나 보군. 이렇게 구박을 받고 말이야.”
“그럴 리가요. 전 언제나 폐하의 편입니다. 곁에서 모실 수 없다는 게 그저 안타까울 뿐이죠.”
“그 갸륵한 충정을 내 받아들이기로 하겠네. 이참에 둔에서 나와 성도로 오는 건 어떻겠나?”
민은 진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하해와 같은 은혜로운 말씀은 감사하나, 제가 맡은 일이 아직 남았기에 둔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거두어 주시지요.”
황제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가지고 온 종이봉투에서 사과를 한 알 꺼냈다.
소매에 쓱쓱 닦은 후 입으로 가져간다. 으적으적, 사과 씹는 소리가 침묵을 대신했다.
“좀 들겠나?”
“됐습니다.”
“맛있는데.”
“폐하께서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니 절로 배가 부릅니다.”
“거 마음에도 없는 말을.”
“제 충성심을 몰라주시니, 슬플 따름입니다.”
황제가 미간을 찡그리며 웃었다.
“어릴 때 생각나나? 내가 한참 검술을 배우겠다고 난리를 칠 때 말이야. 민 교수가 시범 상대로 나서더니 날 박살 내버렸지.”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이 안 납니다.”
“민 교수는 당시 열두 살이었을 텐데. 있었던 일을 다 잊을 정도로 어리진 않았어.”
“폐하께선 잘 모르시겠지만, 나이가 마흔을 넘어가면 기억력이 감퇴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옛일을 잊어버리죠. 하마터면 폐하의 용안까지 잊어버릴 뻔했습니다.”
“차라리 잊어버리지. 그랬으면 좀 더 재미있었을 텐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쟁반을 든 사내가 의무실로 들어왔다.
“드시죠.”
찻잔을 받은 후 방을 빠져나가는 사내를 바라봤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수호기사입니까?”
황제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 하고 웃음이 나왔다.
소문은 지겹도록 들었다.
스콜라가 배출한 최고의 검사, 테인 오첸. 죽은 총수의 뒤를 이어 수호검사가 됐다더니…….
“이런 건 다른 사람 시키시죠. 그러다 뛰어난 기사 한 명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민 교수. 나도 불편해. 근데 저놈이 하겠다는 걸 어쩌겠어. 내 말도 잘 안 들어. 은근히 허스를 닮았단 말이지.”
민은 황제의 말을 들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향이 은은한 차였다.
“보셨습니까?”
찻잔을 내리며 물었다.
“봤네. 참상이 따로 없더군.”
“인간의 형태가 아니었으나, 내용물은 인간이었습니다. 마수의 형상을 한 사람, 이라고 하면 되겠군요.”
진득하게 안부를 물을 사이도 아니니 바로 본론을 꺼냈다.
황제 역시 말 돌릴 생각이 없다는 듯 필요한 말만 꺼냈다.
“사체는 중앙연구회로 옮겨졌네. 그래도 일선에서 사건을 해결해 줬는데 경과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나?”
황가 소속 연구회로 넘어갔군.
의회 쪽에서 애가 탈 일이었다.
“그 말씀을 하시려고 친히 왕림하신 건 아닐 테죠.”
“겸사겸사 왔네. 어차피 민 교수를 봐야 하기도 하고.”
황제가 차를 후, 분 다음 입가에 가져다 댔다.
“성도로 호출하신 이유를 감히 여쭤도 되겠습니까?”
“엉성하게 예법 차리는 것도 민 교수답네. 이상한 말 덧붙이지 말고 하고 싶은 말만 하지.”
“윤허해 주신다면야 저야 편하죠. 그럼 묻겠습니다. 왜 부르신 겁니까? 안 그래도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바쁜데.”
황제가 씁쓸하게 웃는다.
“그렇다고 바로 그렇게 공격적으로 말하면 내가 섭섭한데.”
“폐하께서 이런 태도를 좋아하신다 들었습니다.”
“헛소문이군. 난 내 앞에서 굴복하고 굴종하고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구는 인간을 좋아하지.”
“그거 아쉽게 됐습니다.”
황제가 작게 하품했다. 은은하게 남아 있던 긴장감마저 흐트러트리는 절묘한 하품이었다.
“자네 도움이 필요해.”
“제 도움이요?”
“그래. 들어서 알겠지만 이번에 시작품이 하나 나왔어. 성도 관리국이 둔 관리국을 꽤 신경 쓰는 모양이야. 이것저것 해보더군.”
“성도에도 유능한 교수들이 있을 텐데요.”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능력 있는 자들이 많지. 내가 그런 자들을 곁에 붙들어 뒀으니까. 하지만 최고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없어. 그런 사람들은 한정적인 자원이거든.”
“절 높게 평가해 주시는 건 감사합니다만, 최고란 말에 의아함이 생기네요. 거병과 관련된 일이라면 필렌을 호출하셨어야죠.”
“나야 그러고 싶었지. 근데 연락이 안 되는 여자를 성도로 어찌 부르겠나? 나 참, 얼굴 보기 힘든 사람이야. 그에 비해 자네는 나랏돈을 착실하게 받아 가는 교수진이지. 내가 부르기에도 아주 편하고.”
“그게 제 약점이기도 하죠.”
“자네 속 긁으려고 하는 소리는 아니야. 난 민 크알데를 존중해. 게다가 아끼고 있지. 자신을 입증한 사람을 내가 왜 싫어하겠나. 단지…… 날 너무 미워하는 게 부담스러울 뿐이야.”
민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가 폐하를요? 그럴 리가요.”
“어릴 때부터 싫어하던 거 잘 아네. 뭐, 미움받은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 상관없어. 그러려고 황제가 된 거니까.”
미움받으려고 황제가 됐다.
민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와 비일이 뭘 하면 되겠습니까?”
“성도 관리국에 가면 자세한 내용을 들을 수 있을 테니 몸 추스르고 그쪽으로 가보게.”
“개발 인력으로 부르신 거라면 그에 상응하는 보수도 있겠죠?”
“내가 민 교수를 공짜로 쓰겠나? 성과에 따라 섭섭지 않게 챙겨주지. 물론 내 사비로.”
황제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왕성으로 찾아올 필요 없네. 이렇게 얼굴 봤으니까.”
“편의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뒷짐을 지고 문 쪽으로 걸어가던 황제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황제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실더의 딸에 관한 건 함구해 줬으면 좋겠군.”
다 곁가지였고 이게 핵심이었던 걸까?
대체 그 아이가 무엇이기에 황제가 친히 걸음 해서 언질하는가.
“보수의 일환으로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케아’에서 담당하기로 했다면 어느 정도 대답이 됐겠지?”
성도에는 수많은 싱크탱크가 존재했다.
케아는 그런 싱크탱크 중에서도 보안이 가장 두터운 곳이었다.
온갖 위험한 실험이 자행되는 곳.
전시 상황임을 방패 삼아 말도 안 되는 연구를 진행한 곳이기도 하다.
위험 요인으로 분류된 생물, 무생물이 케아 깊은 곳에 있을 터였다.
그런 곳에서 그 작은 여자아이를 담당한다?
“괴물의 딸이라서 인체 해부라도 하는 겁니까?”
도덕심을 논하기에는 나이를 너무 먹었으나, 현장에서 본 그 작은 아이를 생각하니 뒷맛이 씁쓸한 것도 사실이었다.
“음. 조금 다르네. 괴물의 딸이라서 가둬둔 게 아니야.”
황제가 무심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곳 연구원이 그러더군. 그 애야말로 진짜 괴물이라고. 자세한 건 아직 모르네. 이제 막 알아보기 시작한 거니까.”
그럼 몸 관리 잘하게, 민 교수.
황제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말을 남겼다.
황제가 떠났다. 민은 온기가 남아있는 찻잔을 쥐었다.
괴물의 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아이가 괴물이다?
농담인지 아니면 뼈가 담긴 말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제 목 아직 붙어 있죠?”
비틀거리며 방으로 들어온 비일이 털썩, 의자에 앉았다.
“잘 붙어 있어. 그나저나 너 재능 있다. 황제한테 눈도장을 두 번이나 찍고. 시원하게 욕까지 했다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끔찍한 소리 마세요. 문밖으로 나갔다가 폐하와 눈이 마주쳤는데… 진짜 기절할 뻔했으니까요.”
비일이 자신의 뺨을 툭툭 친 다음에 물었다.
“무슨 얘기 나누신 거예요?”
“뭐겠어. 일 얘기지. 왕성으로 갈 필요 없이 바로 성도 관리국으로 가면 돼.”
“오자마자 일이네요.”
“다들 그렇게 사는 거지. 시작품이 나와 있대. 그걸 개발, 보수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힌 거 같아.”
“생도들도 데려가는 겁니까?”
“일단은. 표본이 많으면 좋으니까.”
민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마수를 닮은 인간.
그러고 보니 벨솔이 이런 말을 했었지. 최근 마수의 출현 빈도가 이상하게 높다고.
혹시 이번 일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또 뭔 일이 벌어지려고.”
튤립 전쟁처럼 알기 쉬운 정치 문제라면 차라리 나을 텐데.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터진다면 골치 아파질 것이다.
“비일.”
“네, 교수님.”
“실더의 딸, 이름이 뭔지 알아?”
“이름은 들었어요. ‘샬롯’이라고. 근데 현장에 있던 애가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황제가 감췄어.”
“예?”
“방금 들은 거 기밀 사항이니까 돈 받고 팔아도 돼. 장례식은 걱정 마. 네가 받은 돈으로 거하게 치러줄 테니까.”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하는 비일이었다.
* * *
“요즘 공방에 자주 가더라?”
가하란은 손에 든 책을 살며시 내려놓으며 브라인을 바라봤다.
“거긴 신기한 게 많아서요.”
“그뿐이야?”
“어, 네.”
유심히 바라보던 브라인이 코웃음쳤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놀아.”
가보라며 손을 휘휘 젓는 브라인이었다. 가하란은 가볍게 뛰어 기록보관서를 벗어났다.
“오늘도 엔엔 님 공방에 가는 거야?”
셀베이아가 서류를 정리하며 물었다.
“네. 갔다가 저녁 먹기 전에 올게요.”
“엔엔 님 너무 귀찮게 하지 마.”
“알겠어요.”
“잠깐만.”
다가온 셀베이아가 목도리를 둘러줬다.
“장갑도 꼭 끼고 다니고. 답답하다고 목도리 벗지 말고.”
가하란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올게요!”
“그래. 잘 놀다가 와.”
빠르게 계단을 밟고 내려와 중앙부 밖으로 나왔다.
하, 하고 숨을 내뱉으니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온다. 오늘도 춥네.
가하란은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얼어붙은 길을 걸었다.
같은 시간에 같은 곳을 계속 지나다 보니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이 생겼다.
벨솔 교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안녕하세요.”
“안녕.”
하아암, 크게 하품하며 인사하는 벨솔이었다. 눈 밑이 거뭇했다. 오늘도 교수님은 연구실에서 밤을 지새운 것 같다.
걸음을 떼며 덴스의 연구실을 바라봤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더는 연구실에 들어갈 수 없게 됐다.
벨솔은 얘기해 줄 수 없는 어른들의 사정이라고 했다.
뭘까?
카트시의 유사 정령과 연구실에 있는 유사 정령을 비교해보고 싶었는데, 그게 불가능해졌다.
아쉬움을 달래며 공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