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여기! 여기 부상자가 있어!”
“이쪽도!”
새하얀 눈밭에 검붉은 방울이 잔뜩 떨어져 있었다. 고함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전위예술의 한 종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미친.”
율이 말했다. 밀레나도 같은 심정이었다.
이곳이 어디인가.
제국의 심장, 성도였다.
누가 이곳에서 이토록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가.
저 멀리 보이는 왕성을 뒤로한 채 비명을 쫓아 움직였다. 살인자의 동선은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비명과 혈흔.
자신을 숨기지 않는 미친놈이었다.
조직적인 테러인가?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서?
민 교수가 팔을 싸매고 앉아 있는 병사에게 다가갔다. 팔꿈치 아래가 사라진 상태였다.
밀레나는 상처 부위를 확인했다. 절단면이 너덜너덜했다. 예리한 도검으로 잘라낸 게 아니었다. 마치 맨손으로 쥐고 힘으로 쥐어뜯은 듯한…….
“미엔하고 로운은 주변 부상자들 챙겨라.”
“예!”
미엔과 로운이 흩어졌다. 상처 입은 사람들이 꽤 많이 보였다.
아니, 그보다 더 많은 건 시체였다. 어림잡아 열다섯은 넘는다.
여긴 귀족거주구역도 아니었다. 부상당한 사람들은 다들 평범한 시민이었다. 조직적인 범행이라면 목적이 있을 텐데, 왜 애꿎은 시민을 죽인 건가?
계획된 범죄가 아니라 우발적인 사고인가?
“총 몇 명이죠?”
민 교수가 물었다. 경비병은 신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 한 명입니다. 그리고 그건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이 아니다?”
민 교수가 도끼를 어깨에 이었다. 다시 전력으로 뛸 생각인 것 같다.
“브리테, 이리엘데. 둘은 서문으로 먼저 가라. 동선상 그쪽으로 갈 것 같으니까.”
“대비해 놓겠습니다.”
브리테와 이리엘데가 움직였다.
“나머지 둘은 따라오고.”
밀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깨진 유리창, 부서진 처마, 무너진 지붕.
경비병은 말했다. 그건 사람이 아니라고.
얼마나 뛰었을까. 민 교수가 멈췄다. 밀레나도 속도를 늦추고 앞을 바라봤다.
그곳에 사람, 아니 기이한 것이 있었다.
“말을 알아들을 수는 있겠지. 나는 검은 심장 부족의 타챠다. 그대의 안쓰러운 혼을 위해 내가 자비를 베풀겠다.”
쩌렁쩌렁한 소리가 대기를 흔들었다. 거대한 창을 든 도마뱀 전사가 괴물의 앞을 막았다.
피가 잔뜩 묻은 손을 내려다보던 괴물이 기괴한 목소리를 냈다.
“나를 막지 마라!”
그 음성을 듣는 순간, 밀레나는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깨달아 버렸다. 저건 그녀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생물이라는 걸.
“뭐야, 저거.”
옆에 서 있는 율이 말했다. 율의 목소리도 평소와 달리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경비병의 말은 옳았다.
저건 사람과 비슷한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결코 사람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전략과 전술이라는 게 저 괴물한테 통할까?
머리를 굴려라. 생각해라.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그때였다.
민 교수가 거대한 도끼를 어깨에 이며 앞으로 나섰다.
“살다 살다 성도 한복판에서 마수 비슷한 것을 보게 될 줄이야.”
쿵, 자루가 바닥을 찍었다.
쌓인 눈들이 흩날렸다. 느긋한 걸음으로 괴물 앞으로 다가간 민 교수가 말했다.
“곱게 죽어라. 망할 괴물 새끼야.”
키아아악, 괴물이 두 손으로 땅을 짚었다.
금수처럼 네 발로 조금씩 움직이더니 한순간 뛰어올랐다.
밀레나는 고개를 쳐들었다.
5미터는 훌쩍 넘는 높이었다. 신체술을 극한으로 끌어올려도 저렇게 뛰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괴물을 놓친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머리카락을 쭈뼛 서게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대기를 찢고 거대한 창이 날아간다. 허공에 뜬 괴물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순발력이었다.
괴물의 움직임을 예측했다는 듯이 타린족 전사가 대응했다.
괴물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우리도…….”
검을 손에 대며 말할 때였다. 민 교수가 손가락으로 밀레나를 가리켰다.
“주변 정리해. 괜히 휩쓸리지 말고.”
그 한마디에 검을 쥔 손아귀의 힘이 풀렸다. 짐짝 취급이었다. 억울하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기세에 눌렸고, 대응도 늦었다.
스콜라 생도라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였다.
“밀레나, 부상자들 챙기자.”
밀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쓰러진 경비병을 일으켜 세우면서 눈은 난전 중인 민 교수를 좇았다.
괴물을 사이에 두고 민 교수와 타린족 전사가 합을 맞췄다.
육중한 도끼가 바닥을 쓸며 괴물의 동작을 제한하고, 발이 묶인 괴물의 몸체를 창으로 뚫었다.
전략? 전술?
필요 없었다.
압도적인 무력이야 말로 유능한 해결책이라는 건 두 사람이 보여줬다.
“됐다!”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배에 생긴 큰 구멍을 내려다보던 괴물이 재차 괴성을 질렀다.
기분 나쁜 마나 파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괴물의 피부에 보랏빛 핏줄이 돋아나더니, 배에 난 구멍이 순식간에 복원됐다.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저런 건 마법으로도 불가능하다.
콰아앙!
밀레나는 고개를 틀었다.
2층 건물 벽으로 타린족 전사가 날아갔다.
뒤따라 도약한 괴물이 타린족 전사의 목을 움켜쥐었다.
민 교수님은?
시간이 갑자기 느려진 기분이었다. 저 멀리서 도끼를 챙긴 채 뛰어오는 민 교수가 보였다.
느리다. 아니, 무섭도록 빠르지만 저 속도면 늦는다.
밀레나는 반사적으로 검을 쥐었다. 그리고 도마뱀 전사의 목을 틀어쥐고 있는 괴물에게 검을 던졌다.
빙글빙글 회전하며 날아간 검이 괴물의 등을 긁었다.
그 순간, 괴물이 고개를 내려 이쪽을 바라봤다.
눈이 맞았다.
밀레나는 새빨간 눈동자 안에 휘몰아치는 광기를 엿봤다.
그리고 하나 더.
저건, 믿기 싫지만, 믿을 수 없지만 사람이었다.
“캬아아아악!”
괴물이 튕겨 나갔다.
등에 난 상처 따위는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원인은 다른 쪽에 있었다.
타린족 전사의 몸에서 붉은 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산의 영령이시여!”
들은 적이 있었다. 산의 전사들은 자신들이 받드는 신에게서 힘을 빌려 쓸 수 있다고.
타린족 전사가 괴물을 제압해 땅에 내리꽂았다. 쿠웅, 발밑에서 진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이라면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괴물은 꿈틀대며 손발을 움직였다.
척추가 드러나고, 갈비뼈가 튀어나오고, 내장이 쏟아지고 있는데도 움직인다.
그 처절한 몸짓을 끝내버린 건 민 교수였다.
아무런 소음도 없이 날렵하게 그어진 도끼날이 괴물의 목을 날려버렸다.
도끼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세로로 한 번 더.
괴물의 몸이 양분돼 바닥으로 털썩 누웠다.
“…끝난 거지?”
율이 다가와 물었다.
“저걸로도 안 죽으면 답 없어.”
마른침을 삼키며 괴물을 응시할 때였다. 시야 바깥에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낭자한 피와 으깨진 살점, 새하얀 눈과 무구해 보이는 여자아이.
눈을 찌르는 괴리감에 말려야 한다는 생각도 못 하고 잠시 지켜볼 때였다.
뒤에서 뛰어온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를 붙잡았다. 붙잡힌 여자아이가 한 마디를 외치고 옆으로 쓰러졌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 “아빠!”였다.
“쟤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아빠라고 한 거야?”
율이 물었다. 밀레나는 대답해줄 수가 없었다.
사지가 찢겨도 움직이는 괴물, 피로 물든 성도 거리, 그리고 기절한 아이.
뭐가 뭔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밀레나는 땅에 떨어진 자신의 검을 멍하니 바라보며 작게 말했다.
* * *
민은 눈을 찡그렸다. 왼쪽 어깨가 시큰했다. 신체술을 사용한 전투는 오래간만이었다.
격하게 움직여서 그런지 반동이 심했다. 후유증이 내일까지 가겠군.
“교수님!”
비일이 의무실 문을 쾅 소리 나게 열었다. 민은 눈을 찌푸렸다.
“그래가지고 문 부서지겠어?”
“그런 말씀 하실 때예요?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오면서 다 봤잖아. 어떤 미친놈이 날뛰고 있었어.”
미친놈.
그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건 사람이되 사람이 아닌, 기이한 생명체였다. 굳이 따지자면 마수에 가까웠다.
“많이 다치신 거예요?”
“타린족 전사 덕분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어.”
“다행이네요.”
한숨을 크게 내쉰 비일이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생도 애들은 각자 집으로 돌려보냈어요. 브리테는 성도 내에 머물 곳이 없어서 저랑 같이 있기로 했고요.”
“고생했어. 이틀 동안 애들 좀 부탁할게.”
“교수님은요? 이 상태로 알현은 힘들지 않아요?”
“오후에 뵙기로 했으니까 괜찮아.”
밀려드는 통증에 눈을 살짝 찌푸렸다. 확실히 늙긴 늙었네.
“이번 성도행 진짜 마음에 안 드네요. 눈발을 뚫고 겨우겨우 도착했더니 이상한 살인귀랑 만나고.”
“넌 늦게 합류해서 못 봤잖아.”
“아직 정리가 덜 돼서 저도 다 봤어요. 그게 사람이 저지른 짓이라니. 믿기지 않아요.”
“그놈, 신원 확인됐어?”
비일이 예, 라고 대답했다.
“실더라고 영주예요. 3등 귀족. 작은 영토 하나 갖고 있는 귀족일 뿐, 특별한 건 없다고 하네요.”
“그런 인간이 어떻게 괴물이 된 거지?”
“저야 모르죠. 사체도 회수해 가버렸고. 오히려 이쪽 방면은 저보다 민 교수님 발이 넓잖아요. 나중에 알게 되면 저도 알려주세요.”
역시 사람이었어.
민은 소름이 끼치던 울음을 떠올리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그 아이가 그자의 딸이었던 건가?”
“그 아이? 딸이요?”
“현장에 여자아이 하나 있었어. 그 애 행방은?”
“그건 모르겠어요. 제가 현장 조사관들한테 슬쩍 물어봤는데, 애가 있었다는 얘기는 못 들었어요.”
“분명 있었어. 그 괴물을 아빠라고 불렀고.”
“그러면 둘 중 하나네요. 교수님께서 잘못 봤거나…….”
비일이 뒷말을 이으려 할 때였다.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은 누군가가 은폐했거나. 그렇겠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비일은 아직 감을 잡지 못했는지, 어리둥절한 눈으로 열린 문을 바라봤다.
“남의 얘기를 그렇게 함부로 들으시면…….”
비일이 투덜대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민은 말리려다가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인사는 해야 하니까.
밖으로 나간 비일이 얼어붙는 게 보였다. 표정이 경직되고 눈은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그, 그, 그게, 아니! 죄송합니다!”
고개가 땅에 닿을 것 같았다. 민은 피식 웃었다. 비일은 ‘저 남자’한테 책잡힌 게 많아서 더 무서울 것이다.
“몇 번을 봐도 재미난 친구야. 비일, 난 자네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 아마 잊히지 않을 거야.”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 있나. 거병 한두 개 정도 완파해버릴 수 있지. 그래, 그럴 수 있지.”
비일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의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였다.
“그래, 민 교수. 몸은 괜찮은가?”
제국의 황제.
성도에 피바람을 몰고 왔던 남자.
민은 아르드헨을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