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5화
“왼손 반응이 조금 느린데.”
체임버 밖으로 고개를 내민 필렌이 크게 소리쳤다. 올란트는 가시화 패드를 살핀 다음 고개를 쳐들었다.
“모터 몇 정도인 것 같나요?”
“글쎄. 4.3에서 4.4 정도? 기계 쪽보다는 오토마타 신경 문제인 거 같은데. 거기서 보기엔 어때?”
“잠시만요!”
올란트는 헛웃음을 지었다.
무서울 정도로 정확한 피드백이었다. 가시화 패드에 나타난 파장과 운동 능력 점검 수치를 기반으로 보완한 곳을 찾아냈다.
“우완 연결부는 어떠신가요?”
“오른쪽은 여전히 뻑뻑해. 왼팔보다 더 심해.”
“감각 확장 레벨을 조금 낮춰 볼게요.”
“올리는 게 아니라?”
“연산과 실제 운동 처리에 간극이 생긴 걸 수도 있어요. 오토마타의 기능이 좀 떨어지니까 감각을 뭉개버리는 게 나을 거예요.”
“굼뜨는 건 싫은데.”
“그런 느낌 없도록 미세 조정을 제대로 할게요.”
올란트는 수치를 적은 다음 오토마타 앞에 있는 덴스에게 다가갔다.
오토마타에 연결된 커넥터를 흘깃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선배, 어때요?”
덴스가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예상했던 대로야. 퍼포먼스가 떨어졌어. 탑승자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생각보다 심한가요?”
“유사 정령 부피를 줄이면서 마력선을 넣을 면적도 줄었으니까. 생각보다 꼬임 발생률이 높아. 중요한 인지 통합 쪽은 최대한 안정성을 확보해서 괜찮은데, 관절부의 세세한 움직임이 말썽이네.”
“예정대로 감각을 뭉개보죠.”
덴스가 감각기를 낀 양손을 들어 올렸다.
올란트는 한 발자국 물러서 선배의 시그니처를 바라봤다. 가시화된 마력선이 선배의 손길에 따라 움직인다.
섬세한 작업이었다. 몇 번을 봐도 감탄이 나온다.
격납고 안쪽에 넘실대던 푸른 선들이 한순간 사라졌다. 시뮬레이션 정리가 끝난 모양이다.
“다시 해보죠.”
올란트는 거병에 올라탄 필렌에게 소리쳤다.
“필렌 경! 재기동 부탁드리겠습니다.”
필렌이 체임버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구동음과 함께 거병의 팔이 움직였다.
왼팔과 오른팔을 점검 순서에 맞춰 천천히 움직이던 필렌이 다시 체임버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안 좋아.”
“어느 정도인가요?”
“모터 그레이드로 표현하기 싫을 정도. 이 상태로 나가면 틀림없이 난 죽어.”
웃음기 섞인 말이 송곳이 돼 가슴을 찔렀다.
“죄송합니다. 다시 수정해 볼게요.”
“서두를 필요는 없어. 당장 투입할 건 아니니까. 하지만 엉성한 건 곤란해. 알잖아? 이 애를 타고 나가는 건 나야. 난 이 애와 성과를 내고 싶은 거지, 이 애를 관짝 삼고 싶지 않아.”
탕탕, 필렌이 손바닥으로 외장갑을 친 후 체임버 안으로 들어갔다.
올란트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생각한 것보다 조정이 난해했다. 이론으로 정립했을 때는 가능성이 보였는데, 실제로 마력선의 밀집도를 높여보니 발생하는 문제가 너무 많았다.
계산식에는 하자가 없을 텐데.
어디서 오류가 생기는 걸까?
오토마타를 바라봤다. 시뮬레이션이 성공해야 안에 든 유사 정령을 꺼내 마력선을 새로 새길 텐데.
기술자의 실수는 곧 탑승자의 부상과 죽음으로 이어진다.
시뮬레이션이 완벽하게 끝나지 않으면 실적용은 이루어질 수 없다.
필렌이 다시 거병을 움직였다. 손가락 마디부터 어깨까지,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다.
필렌 역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중인 것이다.
“올란트.”
덴스가 감각기를 벗었다.
“조금 쉬었다가 할까요?”
“아니.”
가까이 다가온 덴스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네가 한번 해보자.”
“예?”
“떠나기 전에 엔엔 님한테 감각기를 받았잖아.”
“받기야 했죠.”
“시그니처 연습도 계속해온 거 알아. 그러니까 시뮬레이션 한번 만져봐.”
“이쪽 분야는 선배가 훨씬 나아요. 전 아직 마력선 배치하는 게 미숙하고요.”
“모르는 일이야. 너라면…….”
덴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조금 쓸쓸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자, 내 말 믿고 한번 해봐. 어차피 언젠가는 해봐야 할 일이야.”
덴스가 크게 웃으며 등을 밀었다. 올란트는 머뭇거리며 선배를 바라봤다.
“혹시 내 체면 같은 거 걱정하는 거라면 너 진짜 한 대 맞아야 해. 지금 중요한 건 팀의 성과야.”
평소처럼 기운차게 웃는 선배였다. 올란트는 뒷주머니에 꽂아준 감각기를 꺼냈다.
손가락 부위가 없는 마나 밀도 감각 장갑. 감각기를 손에 끼고 손목을 툭툭 털었다.
“일단 해볼게요. 결과값은 엉망이겠지만.”
오토마타 앞에 섰다. 연습이야 시도 때도 없이 했다. 스크롤에 그려진 마력선을 몇 번이고 구부리고 꼬고 펼쳤다가 교차시켰다.
두 손을 펼쳤다. 가시화된 망치와 정을 잡았다.
“너다운 시그니처야.”
뒤에 선 선배가 말했다.
“처음에는 난감했어요. 이걸로 마력선을 어떻게 주무르라는 건지 감이 안 잡혔거든요. 근데 몇 번 하다 보니까 장갑이 알려 주더라고요. 이렇게 하라고!”
선배가 선을 붙잡아 마력선의 형태를 바꿨다면, 올란트는 조각하듯 마력선을 깎아냈다.
정을 대고 망치를 휘두르면 방향이 바뀌고, 망치 머리로 휘감아 당기면 선을 꼴 수 있었다.
멋대가리는 없지만 익숙해서 쉽다.
때리고 부수고 흩어진 걸 그러모아 다시 바탕을 만들었다. 촘촘해진 마력선 사이로 정을 집어넣고 아주 천천히 각도를 틀었다.
“시뮬레이션 한번 돌려볼게요.”
“생각한 만큼 나왔어?”
“형태는요. 근데 값이 어떨지는…….”
적용한 다음 거병을 올려다봤다.
한참 움직이던 거병이 갑자기 멈췄다.
필렌이 몸을 내밀었다.
“거기 두 남정네.”
심드렁한 눈빛이다. 여전히 문제가 남은 듯했다. 올란트가 눈을 살며시 감으며 답답한 한숨을 내쉴 때였다.
역시 실패인가.
“나 가지고 노는 거였어? 이렇게 잘할 수 있으면서 왜 시간 끈 거야. 덴스, 기가 막힌 실력이야. 아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아졌어. 모터 5.6 정도? 이 정도면 실전에서도 쓸 수 있어. 역시, 교수직은 아무나 다는 게 아니야.”
보행 점검도 해보자, 필렌이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들어 필렌을 보던 덴스가 입을 열기 직전이었다. 올란트가 덴스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선배. 우린 팀이잖아요. 아까 그러셨죠? 팀의 성과가 중요하다고.”
“그래도 방금 그건 네가…….”
“선배가 다 조정해 놓은 거예요. 아마 선배가 만졌어도 똑같이 좋아졌을 거고요. 다 끝내놓은 작업에 제가 나사만 살짝 조인 거니까 제 실력이라 할 수 없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시뮬레이션 기반을 닦아놓은 게 덴스였다. 방금 미세 조정은 그저 재수가 좋았을 뿐.
그걸 실력이라 할 수는 없었다.
덴스가 실없이 웃었다.
“넌 정치가가 돼야 해. 기분 좋게 칭찬하는 법을 왜 이렇게 잘 알아?”
“정치는 무슨 정치예요. 그보다 수치 기입해 놓고 다시 돌려보죠. 조금씩만 바꿔가면서.”
“그래. 그레이드 6까지 올려보자.”
덴스가 호기롭게 말했다.
* * *
“먼저 가 있어. 나 잠깐 볼 게 있어서.”
“도와드릴 거 있어요?”
덴스는 올란트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야. 별거 아니니까 가서 필렌 경 말동무나 해줘.”
“먼저 가서 자리 데워놓고 있을 테니까 얼른 오세요. 오늘 저녁은 칼리가 특별히 준비했다고 하니까.”
“칼리의 특식이라면 놓칠 수 없지.”
덴스는 있는 힘껏 입술을 끌어 올렸다. 정말 최선을 다해 힘을 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소를 짓기 힘들 정도로 속이 엉망이었으니까.
격납고 안으로 들어갔다. 희미하게 빛을 뿌리는 마나등에 의지해 오토마타 앞으로 갔다.
길게 늘어진 커넥터가 거병과 연결돼 있었다. 덴스는 안경을 꺼내 쓰고 감각기를 손에 꼈다.
시그니처를 사용해 마력선을 불러왔다.
“…그래. 이거였어.”
축소된 마력선이 서로 맞닿을 것처럼 붙어 있었다. 얼핏 보면 하나의 선처럼 보일 정도다.
예술품.
덴스는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건 범인의 노력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세계라고.
아름다웠다.
탐나도록 아름다워서 시기심 따위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거병 소형화의 핵심은 유사 정령의 크기 축소였다.
작아진 유사 정령에 얼마나 촘촘하게 마력선을 박아 넣느냐가 프로젝트의 성패를 결정짓는 것이다.
덴스는 이번 프로젝트가 성공할 것임을, 눈앞에 마력선을 보며 확신했다.
경이로운 손재주와 기발한 발상이었다.
인간의 감각으로 이렇게까지 첨예한 작업이 가능하다니, 틀에 박히지 않은 시선으로 여기까지 내다보다니.
사고 실험에서 탄생한 정밀한 이론이 올란트의 손끝에서 완성되었다.
하하, 하하하.
매가리 없는 웃음이 흘러나온다.
팀의 성과가 중요하다.
도망치듯 내뱉었던 그 말이 격납고 안을 꽉 채워 나갔다.
덴스는 오토마타에 양손을 올리고 올란트가 구축한 세계를 들여다봤다.
“이제는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먼저 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따라 하는 건 가능했다. 올란트처럼 단시간에 해낼 수는 없어도, 시간을 들여 조정하면 유사한 값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개척자가 될 수 없다는 허탈함이 몸을 짓누른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명백해졌다.
앞서 나간 젊은 천재의 족적을 기록하는 것.
알고 있었다.
알고 있던 일이다.
알고 있었음에도, 덴스란 인간을 받쳐주었던 자신감이 속절없이 바스러졌다.
“축하한다, 올란트.”
모든 공학도는 패러다임 시프트를 꿈꾼다.
올란트는 한없이 꿈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덴스는 주먹 쥔 손을 들어 올려 강하게 오토마타를 내려치려다가 멈췄다.
“유치한 것도 정도껏 해야겠지.”
덴스는 그토록 바라던 이상적인 마력선의 구조를 눈에 담은 후 몸을 돌렸다.
빛을 봤건만, 눈앞은 어두워진 기분이 든다.
* * *
“이제 좀 쉴 수 있겠네.”
밀레나는 검문대를 넘으며 말했다.
“무려 1년 동안 여행했어.”
율이 말했다.
“무슨 소리야? 1년이라니.”
“작년 11월에 출발해서 해가 바뀌었으니까 1년이잖아. 안 그래?”
“참 재미난 농담, 잘 들었어.”
밀레나는 숨을 한껏 들이켰다. 코가 아릴 정도의 차가운 공기였으나 그래도 좋았다.
반가운 성도의 거리.
눈으로 뒤덮여 있는 모습은 둔과 똑같았지만, 왠지 모르게 운치가 있다.
둔의 거리는 알게 모르게 답답한 구석이 있었지.
“다들 고생했고, 나흘 뒤 다시 모일 거니까 준비하고 있어.”
민 교수가 앞에 서며 말했다. 예, 라고 대답하려는데 익숙한 휘장이 눈에 들어왔다.
스콜라 우등교관임을 알리는 휘장이 민 교수 어깨에 달려 있었다.
“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 먼저 간다.”
휘장을 차고 만나야 할 사람.
아무래도 높으신 분과 면담이 잡힌 모양이다.
예, 라고 대답하고 동기들을 바라볼 때였다.
“지원 요청? 무슨 성문까지 지원 요청이야!”
검문대 책임자가 튀어나오며 말했다. 민 교수가 책임자를 붙들었다.
“무슨 일이죠?”
“지원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남문 근처인데, 무슨 일인지는 아직까지…….”
책임자가 말끝을 흐리며 먼 곳을 바라봤다. 찬바람을 타고 소리가 전해졌다.
희미하지만, 그건 분명 비명이었다.
민 교수가 움직였다. 검문대 안쪽에서 거대한 도끼를 들고 나오더니 생도를 보며 말했다.
“따라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