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란트.”
희미한 목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여민 옷깃 사이로 찬 기운이 스며들었다.
“올란트, 눈 좀 뜨지 그래.”
올란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네 시간 전에 불침번을 서고 잤던 터라 머리가 몽롱했다.
“벌써 아침인가요.”
“해가 아주 쨍쨍해. 얼른 일어나.”
등을 툭 치고 천막을 나서는 덴스였다. 올란트는 뻐근한 목을 주무른 다음 밖으로 나왔다.
하얀 눈 표면에 반사된 햇빛이 눈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올란트는 얼굴을 찡그린 채 덴스 옆에 섰다.
“밤에 봤던 것보다 훨씬 가까워 보이네요.”
“그러게.”
국경지대에 위치한 볼로스.
목적지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불을 피우고 간단히 아침을 해결했다. 얼어붙은 신발을 녹이고 야영지를 정리했다.
“조그만 더 고생하자. 거의 다 왔으니까.”
덴스가 연구원들을 독려했다.
천막을 거둬 짐수레에 실었다. 올란트는 투레질하는 말을 끌어다 수레 앞에 놓았다.
“출발하시죠.”
얼어붙은 길을 밟으며 볼로스로 나아갔다.
“격납고 쪽에서 사람이 오는 건가요?”
덴스 옆에 서며 물었다.
“안내인은 볼로스에서 대기중일 거야. 예정일보다 늦었지만 먼저 떠나진 않았겠지.”
“도시에서 격납고까지 얼마나 떨어져 있죠?”
“이 속도면 반나절 정도?”
“꽤 가깝네요.”
“감춰진 격납고라고는 하나 아예 외딴 곳에 박아둘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여긴 국경이기도 하고.”
후우, 살포시 내민 숨이 하얀 김이 되어 길게 피어올랐다.
생때같은 아들을 뒤로한 채 오른 여행길. 아들이 겪을 외로움이 떠올라 몇 번이고 후회했지만, 기어이 도착하고 말았다.
“많은 걸 이뤄내자.”
“그래야죠. 빈손으로 돌아가면 아들 볼 낯이 안 서요.”
“그렇긴 해.”
볼로스로 진입했다.
성벽 안에 건물이 옹기종기 모인 둔과 달리 볼로스는 너른 평야에 듬성듬성 건물이 올라가 있었다.
구조물이 밀집된 곳도 있지만 대개는 십여 미터씩 거리를 두고 있었다.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휩쓸릴 곳이니까. 민가 사이에 깊은 골이 보이지? 전시에는 저곳에 기름과 물을 채운다고 하더군.”
“간이 해자군요.”
“상시 전투를 준비하는 곳이지.”
한때는 연합왕국의 병사들과 격전을 벌였을 장소지만, 지금은 연합왕국 쪽에서 넘어온 상단이 대거 머물고 있었다.
“봄이 되면 다들 성도 쪽으로 몰려가겠죠?”
“6월 축제에 맞춰 움직이겠지. 대목을 잡으려면 말이야.”
“‘성 안드레 축제’라. 저희도 그쯤에는 돌아갈 수 있을까요?”
“모르지. 예정대로 반년 동안 있다가 돌아갈지, 아니면 1년을 채우게 될지.”
“성과에 달렸군요.”
둔과 달리 검문하는 병사는 없었다. 하긴, 사방이 탁 트인 곳에서 인원을 통제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자유로운 곳이네요.”
“자유롭지. 그만큼 치안이 안 좋기도 하고. 한눈팔고 있으면 지갑이 바로 사라질걸?”
“조심해야겠네요.”
올란트는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접선 장소인 가르데 여관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쟁기를 끄는 소가 마주 오고 있었다. 옆에는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쓴 사람이 붙어 있는데, 체형으로 봐서는 여자 같았다.
옆으로 비켜서서 길을 터줄 때였다.
“덴스! 이제야 온 거야?”
여자가 걸음을 멈추더니 모자를 들어 올렸다.
보기 좋은 구릿빛으로 물든 얼굴. 활달함의 상징인 것 같은 큰 눈 가운데 붉은빛이 어른거렸다.
올란트는 고개를 돌려 선배를 바라봤다.
“아는 분입니까?”
“알지. 그리고 너도 알아야 할 분이고.”
“예?”
덴스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다가섰다.
“필렌 경. 새로운 취미를 찾으신 겁니까?”
“취미까지는 아니고, 그냥 일 돕는 중이야. 가만히 있으면 뭐 해. 움직여서 간식비라도 벌어야지. 그나저나 오는 길에 고생 많았겠네.”
“고생이야 예견된 일이었죠. 근데 저번에 봤을 때보다 더 건강해지신 것 같습니다.”
“얼굴 탔다고 놀리는 거야?”
“제가 감히 필렌 경을 놀리겠습니까.”
“뺀질뺀질. 안 본 사이에 더 짓궂어진 것 같아.”
올란트는 멍한 눈으로 여자를 바라봤다. 필렌 경. 아른고개의 기사가 이분이란 건가?
어릴 적 기억을 끄집어냈다.
만찬회에서 본 필렌 경은 눈송이 같은 여자였다. 하얗고 금방 사라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기운을 풍기던 사람.
그렇기에 소탈하게 웃는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이쪽은…….”
“이번에 새로 영입한 치프입니다. 아주 어렵게 모셔 왔어요.”
“멧시언 소장이 허락했다면 실력이야 보장된 거겠네.”
필렌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혹시 내 이름 모르나요?”
“아니요. 압니다.”
“그러면 됐네요. 그쪽 이름은?”
“올란트입니다.”
“올란트라.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그런 이름이 있었지.”
필렌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세나티아 공께서 속깨나 썩었겠네요. 이런 인재를 놓친 거니까.”
알아보셨구나.
올란트는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신분을 숨긴 것 같은데, 비밀로 하는 게 나을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아요. 아, 근데 말 편하게 해도 될까요? 내가 원체 성격이 안 좋아서. 만만하면 일단 말을 놓고 보거든요.”
“그러시죠. 필렌 경의 소문은 익히 들어 왔으니까요.”
“소문? 내 소문이 왜?”
“많이 변하셨고, 변하신 필렌 경은 그…….”
“재수 없다?”
“개성이 뚜렷하시다고.”
“혀가 매끄러운 거 보니까 세나티아가에 있던 그 소년 맞네. 반가워, 이렇게 다시 봐서.”
“저도 반갑습니다.”
올란트는 윽, 하며 손을 내려다봤다. 손이 으스러질 정도로 필렌이 꽉 잡고 있었다.
“잘 왔어, 볼로스에.”
* * *
“짐은 안쪽에 풀고. 일단은 쉬고 있어. 내일부터 바빠질 테니까.”
덴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연구원들이 흩어졌다. 다들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쓰러질 것이다.
“올란트, 피곤하겠지만 일부터 해야겠다. 여독은 나중에 풀어.”
“그럴 시간이 있긴 해요?”
“있길 빌어야지.”
덴스와 함께 숙소를 나왔다.
우거진 숲 사이에 용케 건물을 세웠다. 자재 운반을 어떻게 한 건지, 궁금할 따름이다.
올란트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격납고가 보였다.
“관리국장님이 이곳을 발견한다면 뭐라고 할까요?”
“뭐라고 하긴. 소장님하고 전쟁하는 거지.”
“당파 분쟁은 지긋지긋합니다.”
“이미 한 발 걸친 상황이야. 받아들여.”
어깨를 으쓱거리는 덴스를 따라 격납고로 들어갔다. 곳곳에 박힌 마력등이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해가 능선 뒤로 완전히 넘어가면 더 밝게 빛나리라.
“이게 그거군요.”
올란트는 팔짱을 끼며 턱을 들어 올렸다.
전고가 11미터인 거병.
프로젝트 ‘장난기 많은 난쟁이’.
“난쟁이라 하기엔 좀 크네요.”
“이제 시작이야. 더 줄여야 해. 소비 효율을 따지면서 마수 토벌 전용으로 개발하려면, 이보다 더 작아야지.”
“쉬운 일은 아니겠죠. 유사 정령의 부피를 줄이면서 서포팅 능력은 유지해야 하니까요.”
“마력석 간격을 좁히고 밀도를 높여야지. 그로 인해 발생하는 꼬임을 해결해야 하고.”
“듣기만 해도 머리가 아프네요.”
“3중첩 마력선 문제도 해결책을 내놓았잖아. 거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 보자고.”
“선을 하나 더 덧대 보시게요?”
“가능하다면.”
“불가능의 영역으로 들어가야겠네요.”
불투명한 미래가 앞에 있지만 불안하지는 않았다. 차근차근, 미답의 토지에 깃발을 하나씩 꽂으며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정복하리라.
“시험기에 바로 적용해보자.”
“바로 가동해 보시게요?”
“쉬었다가 내일 할 수도 있지만, 저 뒤에서 우릴 노려보는 분이 그걸 허락할까?”
올란트는 고개를 돌렸다. 격납고 입구에 필렌이 서 있었다. 그녀는 성큼성큼 다가와 덴스 옆에 섰다.
“얘기는 대충 들었어. 이 애한테 줄 새로운 선물을 가져왔다며?”
“기존보다 향상된 운동 능력을 기대할 수 있을 겁니다. 마력 소모는 더 낮아질 거고요.”
“마력 소모가 낮아진다는 건 탑승자에게 가해지는 부담이 높아진다는 뜻이지.”
“그걸 바라시지 않았나요?”
덴스가 웃으면서 말했다. 필렌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시험과 도전은 언제나 환영이야. 하지만, 오늘은 일단 쉬는 게 좋겠어.”
“예? 어쩐 일로요.”
“어쩐 일이긴. 같이 온 사람들 상태 보니까 반쯤 죽어 있더라. 두 사람도 좀 쉬어. 괜히 멍한 머리로 작업하다가 내 소중한 아이 망가트리지 말고. 그리고…….”
필렌이 올란트를 지그시 바라봤다.
“일보다는 이 친구하고 얘기할 시간이 필요하거든.”
“그러면 전 빠지겠습니다. 아늑한 침대가 절 부르네요.”
덴스가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옆에 있어도 되는데.”
“됐습니다. 새로 온 친구와 많은 대화 나누세요.”
덴스가 물러났다.
조용해진 격납고 안. 무슨 말을 꺼낼까 고민 중일 때였다.
“이 아이 말이야.”
필렌이 거병을 바라보며 말했다.
“블루아이에 적응해서 그런지 이 아이는 다루는 게 어려워. 인지 통합 수준도 낮고, 감각 단계도 일반 거병과는 다르고.”
“하나하나 조정해 봐야죠.”
“자신 있어? 오버홀해서 재조립 수준으로 가야 하는데.”
“그거 하려고 온 겁니다.”
“자신감 좋아. 사람은 패기가 있어야지.”
필렌이 옆으로 슬쩍 다가오더니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내 딸이야. 귀엽지?”
볼이 빵빵한 어린 밀레나가 그네에 앉아 있었다. 뭐가 그리 불만인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다.
“얼굴이 그대로네요. 몸만 컸어요.”
“뭐야. 내 딸을 알아?”
“어쩌다 보니 제 아들놈하고 친구가 됐거든요.”
“그래? 아들은 몇 살인데?”
“일곱, 아니, 해가 바뀌었으니 이제 여덟이네요.”
“그 어린애를 둔에 두고 여기까지 온 거야?”
“예. 몹쓸 아빠죠.”
필렌이 빙긋 웃었다.
“나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야. 우리 애 얼굴 안 본 지 2년이 넘었네. 밀레나는 어때? 여전히 씩씩해?”
“씩씩합니다. 아주 똑 부러지고요.”
“날 닮지 않았어. 그래서 다행이야.”
“닮은 거 아닌가요?”
“그런가? 모르겠네. 내 예전 모습은 이러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닮았다고 해야 하는지, 아닌지 나도 헷갈려.”
필렌이 품에서 수첩을 꺼내 사진을 돌려 넣을 때였다. 다른 사진 한 장이 수첩에서 떨어져 나왔다.
올란트는 바닥에 떨어진 사진을 주웠다.
군복을 입은 네 사람이 제국의 깃발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아는 얼굴이 둘이나 있었다.
한 명은 ‘게스할트’ 장군. 그 오른쪽에서 웃고 있는 건 필렌이었다.
올란트는 사진을 돌려주었다.
“옛 전우분들과 함께 찍으셨나 봅니다.”
“마음이 맞았던 친구들이지. 근데 벌써 둘이나 떠나보냈어. 게스할트, 그 아저씬 나보다 훨씬 오래 살 줄 알았는데. 사람 일이란 게 알다가도 몰라.”
“안타까운 일이었죠.”
게스할트 장군이 심장병으로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성도를 떠난 몸이라 제대로 된 사실은 알지 못하지만.
필렌이 손가락으로 게스할트 왼편에 서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근데 이 사진을 보면 다들 게스할트만 알아보더라고. 이 인간이 누군지 몰라?”
“모르겠습니다. 처음 보는 얼굴이기도 하고.”
“재미있지? 이름은 하늘에 닿을 정도로 유명한데, 정작 얼굴은 모르니까. 하긴, 공식 석상에도 잘 안 나오고 나올 때면 수염을 덕지덕지 기르고 머리도 산발했으니까. 어떨 때는 면갑까지 썼고.”
필렌이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난 아직도 안 믿겨. 게스할트 아저씨가 그렇게 갔다는 것도, 이 인간이 죽었다는 것도.”
“어떤 분이시길래…….”
“됐어. 알아서 뭐 해. 어차피 다 잊힐 텐데. 그보다 우리 애 얘기나 더 해줘. 그쪽 자식 얘기도 해주고.”
필렌이 어깨에 팔을 올리며 말했다.
“저희 아들 얘기하려면 시간이 한참 걸려요.”
“왜?”
“너무 뛰어난 애라 어디서부터 자랑해야 할지 모르겠거든요.”
필렌이 한쪽 눈을 찌푸렸다.
“이렇게 된 거 덴스까지 불러서 누구 애가 더 대단한지, 토론이나 해보자고.”
“그거 좋죠. 선배만 쉬게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
마음이 맞았으니 숙소로 쳐들어가면 될 일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