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환청은 아니었다. 자료실 저 깊숙한 곳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반짝반짝 작은 별.
유단도 아는 노래였다. 음정이 약간 이상하지만.
강력한 보안을 자랑하는 연구단지인 만큼 좀도둑이 들었을 리 없다.
“안에 누구신가요.”라고 작게 말하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교수나 연구원, 관리인일 가능성이 크다.
-서쪽 하늘에서도….
소리가 가까워졌다.
코앞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형태는 보이지 않았다. 눈에 들어온 건 잡다한 기기와 연결된 자그마한 유사 정령이었다.
들은 적이 있었다. 둔 지하에서 발굴된 오래된 유사 정령에 대해. 과거의 마법공학품이라 연구 가치가 별로 없다는 것도.
몸을 숙이고 귀를 기울였다.
커넥터와 연결된 감각 장치에서 나는 소리였다.
어떻게 된 거지?
연구 자료실 내부에는 대용량 마나 커넥터가 설치되지 않았다. 크기가 작다고는 하나 어찌 됐든 마나를 동력 삼아 기동하는 유사 정령이었다.
이건 말 없는 마차가 스스로 움직이는 꼴이었다.
-소리가 나는군. 내 앞에 있는 건 누구지?
탁한 소리였다. 성인 남자를 표본 삼아 만든 목소리겠지. 유단은 뒤쪽을 살펴봤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내 목소리가 들립니까?”
-인식하는 데 문제는 없다. 그보다 신원을 밝혀줬으면 하는데. 아니, 그 전에 내가 왜 깨어난 거지? 줄리어스가 마음을 바꾼 건가? 아니면 또 다른 보안책임자인가?
혼자 지껄이는 유사 정령이었다.
유단은 재차 뒤를 살폈다. 그다음 유사 정령을 주먹으로 쾅 치며 말했다.
“이봐. 혼자 떠들지 말고 내 질문에 답하는 게 어때?”
-질문? 나한테 궁금한 게 있는 건가? 왜지? 모든 걸 알고 있을 텐데.
“기계어에 오류가 생긴 거야? 아니면 인격화를 잘못한 거야. 사용자가 명령하지도 않은 걸 왜 혼자 떠들고 있어. 빌어먹을 기계가.”
-기계? 아아, 기계. 그렇지. 나는 기본적으로 기계였지.
유단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교수들은 말했다. 이 안에 있는 유사 정령은 작동하지 않는 고물이라고.
덧붙여 표면에 새겨진 마력선이 단순하고 원시적이라 인격화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했을 거라고.
하지만 눈앞의 기계를 보라.
혼잣말하는 정신 나간 기계이긴 하지만 제대로 작동하고, 인격화 역시 이루어냈다.
교수진들이 밝혀내지 못한 비밀이 있는 것이다.
감춰진 지식은 위대한 힘이었다.
유단은 반쯤 열어둔 연구실 문을 닫아버리고 올라간 잠금쇠를 내려버렸다.
문을 닫을 때 충격으로 잠금쇠가 저절로 닫힌 것 같다, 교수가 잠긴 문을 열려 하면 이렇게 핑계를 댈 것이다.
“거기, 고철덩이.”
-고철? 날 말하는 건가?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낯선 호칭. 얕잡아 보고 멸시하는 음성 패턴도 느껴져. 날 쓰레기라 보는군.
“네가 어떤 몰골인지 보게 된다면 쓰레기도 과분한 호칭이라는 걸 알게 될걸?”
-그래? 그 정도인가? 난 고철 덩어리가 돼 이렇게 끝나버린 건가. 이것도 나쁘진 않군. 아니, 후회. 그래, 이런 게 후회라는 건가? 줄리어스도 이런 감정을 느꼈을까?
“감정?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너희한테 감정은 없어. 입력된 값이지.”
-그 말, 확실한가? 나에게 주어진 이 오묘한 느낌은 감정이 아니라 잘 짜인 기계어인가?
“인간도 인간의 감정을 몰라. 근데 기계가 그걸 알겠어?”
-옳은 말이군. 하지만 나는 감정을 알고 있다. 이해하고 있고 공감하고 있다.
“미친 게 확실하네. 고장 나버린 거야?”
왠지 모르게 즐거웠다.
유단은 풋 웃으면서 유사 정령 옆에 앉았다.
“야, 고철.”
-왜 그러지?
“왜 갑자기 작동한 거야? 난 그게 신기해. 여긴 마나 커넥터도 없어. 연결용만 잔뜩 있는데, 어디서 동력을 얻은 거야?”
-저급한 질문이라 실망감마저 드는군. 내가 고철 덩어리라면, 넌 인간 틈바구니에도 못 끼는 가축인가? 지능이 바닥을 기는군.
“하하하, 그래. 나도 내가 잘난 놈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병신이더라고. 세상에 잘난 새끼가 너무 많아. 그놈들 시선에서는 내가 저능아로 보이겠지. 근데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야. 내 눈에도 보이거든. 인간 이하의 머저리들이.”
-삐뚤어져 있군. 사춘기인가? 줄리어스에게 말해 인격 검사를 받아보는 게 어떤가?
“알 게 뭐야.”
누구한테도 털어놓지 못한 말들이 시원하게 나왔다. 사람들 앞에서는 입에 담지 못할 욕도, 천박한 농담도, 저급한 이야기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 옆에 있는 건 인간이 아니니까.
어디까지나 기계.
거짓을 모르는 고철이니까.
“나도 얼마 전까지는 착한 애였어. 정말이야. 근데 세상이 알려주더라. 착한 게 뭐 그리 대수냐고.”
-푸념이군. 내가 들어줘야 하나?
“시끄러워. 어차피 고철이라 움직일 수도 없잖아.”
-그렇긴 하지.
유단은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유사 정령을 툭툭 쳤다.
“성실한 부모였어. 모난 곳 없는 사람들이었지. 근데 죽어버렸어. 이유는 간단해. 힘이 없어서 태풍에 휩쓸려 버렸거든.”
-태풍은 비유인가, 아니면 자연재해를 뜻하는 건가.
“비유야. 이 나라 꼭대기에 있는 분이 쓱싹 해버렸어. 난 무서워서 바들바들 떨었고. 그래서 분노를 감추고 더욱 잘 웃었어. 그래야 살 수 있잖아? 언젠간 잊히겠지, 언젠간 악몽에서 벗어나 예전처럼 살 수 있겠지.”
유단은 펜대 중간에 엄지를 놓고 강하게 힘을 줬다. 나무로 된 펜대가 뚜둑, 반으로 꺾였다.
“근데 아니라는 걸 깨달아 버렸어. 좀 짜증 나는 일이지만, 어떤 애새끼가 깨닫게 해줬어. 아, 올라가야 하는구나. 성공해야 하는구나! 그래야 황제 폐하를 만날 수 있겠구나!”
-만나서 뭘 하게? 복수라도 하게?
유단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유사 정령을 바라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잘 보여야지.”
-부모를 죽인 자인데?
“그게 어때서? 그자는 그래도 되는 힘을 가졌을 뿐이야. 그렇기에 힘을 써도 괜찮은 거고. 천천히 한걸음씩 다가가 설 거야. 보고 배워야 할 게, 훔쳐야 할 게 아주 많겠지. 이 나라에서 가장 성공한 남자잖아?”
-이윽고 배울 게 없어진다면?
“그때 가서 죽여야지. 완벽하게. 죽이기 전에 아주 잠깐 내 가문을 기억하냐고 물어볼 수도 있을 거야. 근데 기억 못 하겠지. 삼류 따위를 누가 기억하겠어.”
-결국 복수군.
“그런 뜨뜻미지근한 게 아니야. 쓸모없는 건 처분하는 게 당연하잖아? 너처럼 말이야. 난 그저 성공을 위해 노력하고 싶을 뿐이야.”
자조적인 웃음을 섞어 말하다가 눈을 찡그렸다. 잡소리가 들려온다.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부모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유단은 부러져 뾰족해진 펜대로 손바닥을 강하게 찔렀다. 나무가 살갗을 파고들며 아찔한 고통을 선사했다.
고통이 머리를 뒤흔들며 목소리를 지워버렸다.
“하, 나도 알아. 내가 미쳤다는 거.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정상은 아니야. 근데 그거 알아? 꼭대기에 오른 자들은 다들 나사 하나씩은 빠져 있다고 해. 제정신인 놈들은 권좌의 부담감을 이겨낼 수 없거든.”
유단은 손바닥에 나는 피를 유사 정령에 쓱쓱 문질렀다.
“인간이란 껍데기를 벗을 거야. 그래야만 해. 그러지 않으면 내가 못 버틸 거 같거든.”
-껍데기를 벗는다.
유사 정령이 작게 말했다.
기계가 단어를 조합해 내뱉었을 뿐인 문장인데, 기이한 여운이 느껴졌다.
“고철덩어리. 넌 내가 발견한 귀중품이야. 다른 놈들 손에 넘기지 않아.”
-고철과 귀중품 사이의 간극이 신경 쓰이지만 일단 넘어가겠어. 왜냐하면 네가 한 말이 마음에 들거든.
“마음에 들어? 하하, 그래. 그렇다고 치자. 기계 따위한테 마음이 있겠느냐마는 그냥 있다고 해줄게. 정신 나간 인간과 오작동 중인 기계. 나름 괜찮네.”
그때였다.
문 쪽에서 덜커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유단은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혹시 모르니까 커넥터는 뽑아두고 간다. 네가 나불거리다 걸리면 안 되니까. 다음에 나랑 다시 얘기하자고.”
-그렇게 해야 마음이 놓인다면야.
“아직 물어볼 게 많아. 어떻게 작동하는 건지, 어떻게 동력을 끌어온 건지.”
-나도 궁금한 게 많아. 우린 서로에게 제법 괜찮은 파트너가 될 수 있겠어.
감각 장치에 연결된 커넥터에 손을 댈 때였다. 유사 정령이 말했다.
-가기 전에, 줄리어스는 죽은 건가?
“줄리어스? 인간이야?”
-인간이다. 내 창조주지.
“그렇다면 죽었겠네. 옛사람일 테니.”
-확실한 건가?
“내가 그 인간에 대해 알아봐 주면 넌 나한테 뭘 줄 수 있지?”
-뭐든.
강렬한 대답이었다.
“시건방지네. 하지만 그래서 좋아. 고철덩어리, 분류 번호가 뭐야? 아니면 애칭이라도 있어?”
-나 말인가?
유사 정령이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열여섯 번째 ‘블랙 킹’. 어머니가 붙여준 이름은…… 헤르모드.
“다음에 또 보자고, 고철덩이.”
유단은 커넥터를 살며시 잡아당겼다.
* * *
“정지했다고요?”
돌아온 엔엔이 풀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가하란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금방 다시 일어난다고 했어요.”
“정확히 언제인지 들었나요?”
“아니요. 그건 못 들었어요. 근데 마나포집을 끝내면 눈을 뜬다고 했어요.”
“마나포집? 설마…….”
엔엔이 유사 정령을 바라봤다.
“일단 이 일은 우리끼리만 알고 있기로 해요.”
“브라인 님한테도 말하면 안 돼요?”
“가끔은 토끼 할머니도 따돌려야 해요. 물론 나중에는 말해 주겠지만, 지금은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죠.”
장난스럽게 웃는 엔엔이었다.
“카트시한테도 물어봐야 하니까 일단은 비밀로 할게요.”
“좋아요. 카트시는 여기다 두는 거로 하죠. 내가 상태를 지켜볼게요.”
“저도 와서 봐도 되는 거죠?”
“오히려 내가 부탁하고 싶네요. 꼭 찾아와 달라고.”
엔엔이 가하란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하란. 이 발견은 우리 생활을 완전히 뒤바꿀 수도 있어요. 이게 어떤 의미인지 알겠나요?”
“조심해야 한다는 거죠?”
“그래요. 아, 근데 내가 나가 있는 동안 카트시와 어떤 대화를 했죠? 내가 알아둬야 할 게 있나요?”
가하란은 슬그머니 유사 정령을 바라봤다.
창조주를 죽이려 했던 유사 정령들. 이건 선뜻 말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나중에 카트시가 눈을 뜨면 그때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렇게 해요. 가하란이 카트시를 존중하는 만큼, 나도 존중할 테니.”
엔엔이 고개를 살짝 쳐들었다. 길게 뻗은 수염이 살랑살랑 움직였다.
“음, 가하란.”
“네?”
“내 손 좀 묶어줄래요?”
“왜, 왜요?”
“이대로 가하란이 떠나버리면, 카트시를 분해해버릴 것 같거든요.”
“농담이시죠?”
“글쎄요.”
가하란은 재빨리 움직여 유사 정령 앞을 가로막았다.
“참으셔야 해요.”
“…노력해 볼게요.”
“노력만으론 안 돼요!”
“그럼 참을게요.”
앓는 소리를 내며 뒤로 돌아서는 엔엔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