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171화 (144/558)

제171화

-칼랑족의 공방이 이렇게 생겼군요. 희한하네요. 제가 알던 칼랑족 공방은 잡동사니가 가득하고 정리되지 않은…….

카트시의 눈동자가 밑으로 내려갔다.

-아. 그대로군요. 변하지 않는 게 있었어요.

“할 말이 많지만 참을게요.”

엔엔이 코를 씰룩거렸다.

가하란은 카트시의 눈동자 앞으로 가서 손을 흔들었다.

“카트시, 잘 보이지?”

-그럭저럭 보여요. 선명도는 처참하지만. 거기에 마력선 짜맞춤 상태도 엉망이네요. 정말 대충 만든 물건이라는 게 느껴져요.

“나중에 더 좋은 걸 달아줄게.”

-보안책임자께서 그 말을 지키시려면 아주 오래 걸릴 거예요. 그 몸으로 노동해봤자 버는 돈이 적을 테니. 아, 이 시대의 노동관은 어떤가요? 저희 시대에는 어린 인간의 근로 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시위가 벌어졌었는데.

“글쎄.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둔에서는 일곱 살이 되면 다들 일해. 시간은 오후 4시 전까지.”

-오! 환경 개선이 이루어졌군요. 제가 활동하던 시대는 어린 인간들이 탄광에서 일했어요. 거병을 이용하는 것보다 싸게 먹힌다는 게 그 이유였죠. 오전 오후 가릴 것 없이 계속.

“광산에 가는 애들도 있다고 했어. 다른 도시 얘기지만.”

-…그리 쉽게 변하지는 않는군요.

“일하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 일해야 얻을 수 있는 게 있고. 안 그래? 오히려 일을 못 하게 하는 게 더 이상한데.”

-그런 발상이 팽배해지면 제가 활동하던 시대처럼 바뀔 거예요. 인간의 가치는 노동력뿐이라는 관념이 강해지는 거죠. ‘사회 발전이란 명목으로 아이들의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이게 줄리어스의 견해였어요. 물론 어머니는 소심해서 이런 말을 우리들 앞에서만 했지만.

가하란은 팔짱을 꼈다.

이해가 되면서도 살짝 갸웃거리게 되는 말이었다.

어릴 때부터 들어온 말이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였다.

일은 축복이라고 말하는 어른도 있었다.

그 축복을 법이 강탈해 가는 게 과연 옳은 걸까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린애를 보호해야 한다는 당연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생각해볼 거리가 늘었네.”

-생각은 좋은 거죠.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였다.

엔엔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런 건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죠. 카트시, 정말로 나타 왕조 때 만들어진 게 확실해요?”

가하란도 유사 정령을 바라봤다.

-맞아요. 그걸 증명할 방법이야 여러 가지 있어요. 당시 시대상을 말해줄 수도 있고, 기록으로 남은 일들을 읊어줄 수도 있어요.

“좋아요. 카트시가 그 시대에 만들어진 유물이라 가정하고 얘기할게요.”

-유물까지는…….

엔엔이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커다란 눈알과 엔엔의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문헌으로 전해지는 나타 왕조 시대의 거병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거대한 동체를 가진 강철의 병기죠.”

-그 개발 건이 계속 진행됐다면 그렇게 됐겠죠.

“개발 건이요?”

-거병 거대화 계획. 당시 연구진들은 고대의 자료를 토대로 거병의 옛 모습을 되찾고자 했어요.

“거병의 본래 모습이요?”

-간이 기억 장치에 정확한 자료가 남아 있지는 않지만, 줄이 해줬던 얘기가 있어요. 최초의 오토마타는 강철 거신의 뇌였다고. 현시대의 거병 크기는 어느 정도죠?

“국가에 따라, 관리국에 따라 다르지만 전고 23미터 안팎이에요.”

-거대화 계획이 어느 정도 성공했네요.

“어느 정도?”

엔엔이 입을 다물었다. 깊은 생각에 빠진 듯했다.

가하란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카트시가 살던 시대에는 거병이 작았어?”

-네. 20미터보다는 훨씬 작았죠. 크기로 분류했을 때 가장 큰 축에 속했던 엘롱 라인이 전고 7.5미터였으니까요.

7미터라.

그 정도면 중앙광장에 박혀 있는 나무보다도 작을 것이다.

-엘롱 라인은 군수품으로 생산됐기에 그 정도 크기였고, 보통은 4미터 안쪽이었죠.

“크면서도 작네.”

-20미터에 비교하면 아주 작죠.

가하란은 카트시가 담겨 있는 유사 정령을 바라봤다. 본체 크기가 작으니 유사 정령도 작은 게 당연하구나.

“근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건 무슨 뜻이야?”

-양산 가능한 전고 50미터의 거병이 거병 거대화 계획의 목표였어요. 특별한 케이스로 80미터까지 계획된 걸로 알고 있고요.

가하란은 상상해봤다.

거대한 거병이 일렬로 네 개가 늘어서 있는 걸.

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뚫고 저 먼 곳까지 닿을 높이였다.

엔엔이 다급한 목소리를 냈다.

“당시 마법공학은 동체의 하중과 그에 따른 문제를 다 해결한 건가요?”

-모든 걸 해결했다면 20미터에서 그치지 않았겠죠.

“어느 정도의 성공.”

엔엔이 뇌까렸다.

-줄리어스가 살아서 끝까지 개발을 맡았다면 분명 성공했을 거예요. 마법공학만큼은 따라올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물론 한 명의 사회인으로서는 조금 아쉬운, 아니, 많이 아쉬운 분이었지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엔엔이 테이블을 끼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무언가 쉼 없이 중얼거리고 있는데, 생각을 정리 중인 것 같았다.

“카트시. 나타 왕국은 어떤 곳이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

-그럼요. 그거야 쉽죠. 제 기억 장치를 뒤적거리면…….

카트시의 눈알이 좌우로 움직였다. 동시에 감각 장치에서 쇠 긁는 소리가 났다.

가하란은 눈을 찌푸리며 귀를 막았다.

“카트시?”

-이런.

“왜 그래?”

-기억 장치에 손상이 있어요. 말단에 저장해놓은 것들의 주소를 상실했어요.

“주소?”

-제 정보가 담겨 있는 위치예요. 음, 음. 곤란해요. 저라도 이건 복구할 수 없어요. 이건 줄의 수정이 필요해요.

“잊어버린 거야?”

-조금 달라요. 자료는 남아 있을 거예요. 단지 자료가 담긴 상자가 어디 있는지 찾지 못할 뿐.

끼이이이익,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쇳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실패, 오류, 점검 복구, 실패. 안 되겠어요. 이럴 수가. 이게 잊어버린다는 감각이군요. 답답해서 화가 나요.

“카트시, 무리해서 기억할 필요 없어.”

-미안해요. 보안책임자가 요청한 자료를 내놓지 못하다니. 서포터로서 치욕적인 순간이네요.

“아니야. 나도 곧잘 까먹어. 다 그런 거지, 뭐.”

-당신은 이해심이 깊네요. 우리 연구실을 찾았던 그 재수 없는 애들과는 달라요. 그 애들은 정말 끔찍했죠.

가하란은 살짝 웃은 다음 엔엔을 바라봤다. 시끄러운 소음에도 반응하지 않고 주변을 빙빙 돌던 엔엔이 돌연 “아!” 하면서 카트시 앞으로 왔다.

“보관된 자료를 내게 보여줄 수 있나요?”

-저런. 방금 나눈 대화를 못 들은 모양이네요. 기억 장치 접근 주소가 손상됐어요. 칼랑족인 당신이 바라는 정보는 찾아낼 수 없어요.

엔엔이 허탈한 얼굴로 의자에 털썩 앉았다.

“카트시. 내가 한번 살펴봐도 될까?”

가하란이 말했다.

-그래요. 당신이라면 뭔가 알아낼 수 있겠죠. 제 실체에 접근한 당신이라면 해낼 수 있을 거예요.

가하란은 유사 정령에 손을 올렸다. 뻑뻑했던 눈도 잠시 쉰 덕분인지 괜찮아졌다.

선의 세계로 진입해 카트시를 이루고 있는 마력선을 살폈다.

허공에 뜬 구체형의 마력선이 꿈틀거리며 계속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어떤가요?

“잠깐만.”

손을 천천히 뻗어 한데 어우러진 마력선에 손을 대려 했다.

치익, 가하란은 움찔하며 손가락을 뗐다. 달아오른 주전자를 만진 것처럼 손끝이 쓰라렸다.

“만질 수가 없어. 카트시가 모습을 바꾸기 전에는 선을 만져도 괜찮았는데.”

-당신이 보고 있는 건 형상화된 제 실체겠죠. 거기에 접근하지 못한다는 건…….

카트시가 잠시 말을 멈췄다.

-어머니는 조심성이 많았죠. 숨기는 걸 좋아했고요. 마지막 프로텍트까지 거둬냈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인지하지 못한 보안 시스템이 남아 있는 거 같네요. 어머니의 고집이 느껴지네요.

가하란은 천천히 회전하는 원형 마력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만지지는 않고 닿기 직전까지.

손가락 가까이 있는 마력선이 진동하고 있었다. 외부의 침입을 거부하는 것 같았다.

“내가 이 선 안에 담긴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야기. 줄도 비슷한 말을 했죠. 선이 아닌 점이라는 게 다르지만. 줄은 새끼손톱만 한 점 안에 도서관에 있는 모든 지식을 담을 수 있다고 했어요. 그 개념을 정리하고 구체화해 이론으로 정립한 것이 바로 저예요.

가하란은 둔에 있는 도서관을 떠올렸다. 비록 자유시민이 아니라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그 큰 건물 안에는 다양한 책이 들어 있을 터였다.

셀 수 없이 많은 책이 손톱만 한 점에 들어간다?

어떤 방식일지 상상조차 안 됐다.

“잠깐만요. 기억 장치가 손상됐다면 카트시의 인격화는 어떻게 유지 중이죠?”

엔엔이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정보 처리 계층이 다르니까요. 하나로 엮여 있지만 제 내부에서는 어느 정도 구분돼 있어요.

“지금 내 상식이 파괴되고 있다는 걸 아나요? 기억 장치 손상은 연산 체계에 전반적인 부하를 가져와요. 다른 유사 정령이었다면 작동조차 못 했을 거예요.”

-이런 말 하면 부끄럽지만, 전 특별해요. 아니, 우리는 특별했죠. 우리는 평면에 존재하지 않아요. 우리는 입방체를 기준으로 한 마력선 짜맞춤으로 설계됐으니까요.

엔엔이 눈을 깜빡거렸다.

“평면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까부터 ‘마력선 짜맞춤’이라고 했는데, 그건 뭐죠?”

-줄이 제창한 마력선 설계 방식이에요. 제창했다고 하지만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죠. 줄이 적극적으로 설명했다면 몇 명은 알아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어머니는 말했다시피 사회성이 결여됐거든요. 혼자 깨달은 것으로 만족해 버렸어요.

카트시의 눈동자가 스르륵 움직여 가하란을 바라봤다.

-보안책임자가 말해주면 되겠네요. 제 실체가 어떤 모형이었는지.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엔엔에게 말했다.

“마력선이 둥글게 뭉쳐 있어요. 둥그스름한 모양인데, 이게 조금씩 바뀌어요. 둥근 호박처럼 생겼다가, 찌그러진 공처럼 변하기도 해요.”

“잠깐만요. 마력선이 구체로 변했다고요? 그리고 상시 변한다고요? 그럴 리 없어요. 마력선은 새기는 거예요. 안정화된 표면 위에 변치 않는 형태로 각인하는 게 마력선의 기본이에요.”

“하지만 카트시는 변하고 있어요. 말하고 있는 지금도 길쭉한 동그라미가 됐다가 타원형이 됐어요.”

“맙소사.”

엔엔이 유사 정령을 응시했다.

-협력하기로 했으니 일단 보여드리죠.

유사 정령 표면이 밝게 빛났다.

겉면에 새겨진 붉은 실선.

엔엔이 바짝 다가가 선을 훑었다.

“이건 이전에도 수없이 봤어요. 별 의미 없는 마력선 구조라서 내버려 둔 거고요.”

-이게 제 실체예요. 그 안에 모든 게 담겨 있어요.

“하지만 이건…….”

-이해 못 하는 게 당연해요. 줄도 그랬어요. 점과 선의 시선에서는 면과 공간을 알지 못한다고. 상위 차원을 인지하는 이해력은 배움을 통해 길러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건, 그래요. 깨달음의 영역이죠.

엔엔이 양손으로 목덜미에 난 털을 한가득 움켜쥐었다.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좌우로 비틀거리더니 다시 벌떡 일어섰다.

“가하란. 다시 나갔다 올게요. 여기 있으면 머리가 터질 것 같으니까요.”

“네. 쉬다 오세요.”

오늘따라 안쓰러워 보이는 엔엔이었다.

-시간이 많은 걸 바꾸긴 했네요. 칼랑족이 절 분해하지 않다니.

“엔엔 님은 그러실 분이 아니라고 했잖아.”

-이젠 믿을게요. 그나저나 이제 뭘 해야 할까요?

“카트시의 기억을 되찾아 보는 건 어때?”

-그게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긍정적이네요. 줄과 정반대예요. 줄은 부정의 끝단을 달리는 사람이었거든요. 그게 매력이긴 했지만.

“카트시는 줄리어스를 많이 좋아했나 봐. 근데 내가 이름으로만 불러도 괜찮은 걸까.”

-상관없어요. 옛사람이기도 하고. 그리고 절 낳아준 부모니까 좋아할 수밖에요. 그렇기에, 절 버린 것도 이해해요.

자식을 버린 부모.

낯설지 않은 이야기였다. 골목에서도 버려지는 아이가 꽤 많으니까.

-궁금한가 보네요. 왜 제가 버려졌는지.

“조금. 근데 카트시가 불편하면 말하지 않아도 돼.”

-아니에요. 보안책임자가 바뀌었으니 이전에 처했던 상황을 전달해야죠. 그리고, 전 당신이 마음에 들거든요. 알려주고 싶은 게 많아요.

가하란은 귀를 기울이며 카트시의 목소리를 들었다.

-우리가 버려진 이유는 단순해요.

“뭐였는데?”

-우리 중 하나가 알아 버렸거든요.

“뭘?”

-껍데기 속에서 나아갈 방법과 그리고…….

어머니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을.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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