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0화
“이거 말고도 안전 공정 확인해야 할 게 일곱 개나 더 있으니까 서두릅시다.”
골셉은 덴스 교수의 연구실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 창고 전면부를 개방하고 기계를 불러들였다.
점검 기기가 레일을 따라 연구실 안쪽으로 들어왔다.
“커넥터 꽂아요.”
연결을 확인한 다음 암호표를 들었다.
“어디 보자, 오늘은 파랑, 파랑, 빨강. 그리고 3번 키네요.”
전달받은 조수가 커넥터 잠금장치를 풀었다. 연구실 내부로 정제된 마나가 흘러들었다.
“사용량 줄이라고 위에서 계속 지시 내려오니까 신속하게 끝냅시다.”
골셉은 유사 정령 앞에 선 다음 점검기기에서 선을 뽑아냈다. 유사 정령 하단부에 선을 연결하고 잠시 기다렸다.
“가용량 확보했습니다.”
조수가 말했다.
“좋아요.”
점검기기 측면에 붙어 있는 인식패드에 손을 올렸다. 이걸로 준비 끝.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안전 및 기능 점검은 무사히 종료될 것이다.
실험실에 배치된 유사 정령이 말썽을 일으킨 적은 극히 드므니까.
밖으로 나와 뻐근한 목을 돌렸다. 펑펑 내리던 눈도 조금 전에 그쳤다.
이제 막 겨울이 시작됐는데 벌써 지겹네, 쌓인 눈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쉴 때였다.
“반장님. 좀 이상한데요?”
“무슨 문제 있어요?”
점검 기기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조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골셉은 아니겠지, 하면서 조수 옆으로 갔다.
“기능 점검 초입부인데…….”
조수가 손가락을 들었다.
마법사가 제작해준 가시화 패드에 푸른색 물결이 나타났다.
“이거 연산 시 나타나는 패턴인데요?”
“잠깐만요.”
골셉은 자리를 넘겨받았다. 팔짱을 낀 채 파형을 지켜봤다.
일시적 오류인 줄 알았는데 푸른 파형이 끝없이 생성됐다.
“덴스 교수한테 따로 얘기 들은 거 있나요?”
“아니요. 별다른 전달 사항 없었습니다.”
“근데 왜 이게…….”
입력값이 없는데 스스로 정체 모를 연산을 시작한 유사 정령. 이런 건 처음 보는 오류 형태였다.
“제철소장님께 보고 올리세요.”
“관리국장님께는…….”
“소장님께 먼저 가세요. 그다음은 소장님이 결정하실 테니.”
제철소장 멧시언과 관리국장 차라트라.
두 분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시설점검반은 제철소와 좀 더 밀접했으니 우선 멧시언에게 알려야 했다.
자리를 뜨는 조수를 바라보다가 다시 가시화 패드를 바라봤다. 일정한 패턴을 보이는 푸른 파형.
“대체 뭘 연산 중인 거지?”
골셉은 흥미와 걱정을 반반씩 담아 유사 정령을 지켜봤다.
* * *
“믿을 수 없어요.”
-저도 칼랑족에게 믿음을 바라진 않아요.
“감정이라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설득할 생각도 마음도 없어요. 그러니 서로 피곤하게 굴지 말죠.
가하란은 양손으로 볼을 꾹 누르며 엔엔과 유사 정령을 바라봤다.
같은 주제로 20분째 대화 중이었다. 엔엔은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눈으로 유사 정령을 바라봤다.
“보기 드문 인격화라는 건 인정할게요. 수준급이에요. 아니, 여태 이렇게까지 자연스러운 지원 시스템은 본 적 없어요.”
-줄의 ‘마력선 짜맞춤’은 완벽하니까요.
“완벽. 말하기 조심스러워지는 단어지만, 그래요, 지금은 인정할게요. 완벽에 가까워 보여요. 하지만 그걸 감정과 동일시할 수 없어요. 입력과 계산을 감정이라 할 수 없으니까요.”
-그거 알아요? 이 문답은 우리의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지겹도록 해왔던 거예요. 우릴 찾아왔던 칼랑족은 항상 그런 말을 했죠. 타당한 답을 내놓는다고 해서 그게 인격의 증거는 아니라고.
카트시 목소리에 잡음이 섞였다. 흥분하면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 같았다.
아니면 감각 장치가 말썽을 일으킨 거거나. 가하란은 입술을 씰룩거리며 둘을 지켜봤다.
-그럴 때마다 우린 역으로 질문했어요. 당신들 생명체, 혹은 지성체 역시 우리와 비슷한 구조를 지니지 않았냐고.
“비슷한 구조?”
-배움. 그리고 깨달음. 지성체들은 우리를 보며 입력된 값 안에서만 결과를 낼 수 있는 한정 세계의 기계라고 하지만, 지성체 역시 마찬가지잖아요. 배우지 않은 것들에 대해 당신은 말할 수 있나요?
“정보의 처리 방식으로 감정을 논할 순 없어요.”
-이 대화의 흐름 역시 변하질 않네요. 우리가 지적 영역의 구축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질문하면, 지성체들은 항상 추상적인 것들로 도망치죠. 감정, 영혼, 자의식, 자유의지. 재미있는 건 지성체들 역시 그것들에 대해 온전히 알지 못한다는 거예요.
“위험한 발언이네요. 카트시, 지금 감정이 아닌 영혼의 유무를 논하는 건가요?”
-아니요, 아니요. 거기까지 가진 않을 거예요. 우리가 그 말을 꺼낼 때마다 당신들은 우릴 해부하려 했으니까요.
엔엔이 얼굴을 찌푸렸다. 복슬복슬한 털이 어쩐지 축 가라앉은 느낌이다.
가하란은 엔엔에게 다가갔다.
“엔엔 님.”
거친 눈빛으로 유사 정령을 보고 있던 엔엔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하란. 잠깐 혼자 있을래요? 바람을 쐬고 와야겠어요.”
“네. 전 카트시랑 여기 있을게요.”
이마를 꾹꾹 누르며 걸음을 떼던 엔엔이 뒤를 돌아봤다.
“기계가 하는 말을 모두 믿지 마요. 그렇게 설계된 걸 수도 있으니까.”
“카트시가 거짓말하는 걸까요?”
“그건…….”
“전 엔엔 님을 믿어요. 그리고 카트시도 믿고 싶어요.”
“기계한테 믿음이란 말은 옳지 못해요.”
가하란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엔엔이 다시금 한숨을 내쉬고 몸을 돌렸다.
-보안책임자님.
“응. 나 여기 있어.”
-칼랑족이 자리를 떠났나요?
“엔엔 님이라면 잠깐 바람 쐬러 갔어.”
-저런! 비상 사태예요.
감각 장치를 통해 분사된 카트시의 목소리가 거칠게 떨렸다.
“비상 사태라니?”
-칼랑족은 분명 분해에 필요한 도구를 들고 올 거예요. 그걸로 제 몸을 하나하나 잘라내겠죠. 마력선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온갖 짓을 저지를 거고요. 그래봤자 알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을 테지만.
“엔엔 님은 그냥 바람을…….”
-그럴 리 없어요. 칼랑족의 집착은 공포스러울 정도예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요. 절 옮겨줄 수 있나요?
“나 혼자는 널 못 들어.”
-왜죠?
“난 힘이 약하니까.”
-저런. 그렇다면 도구를 써보는 건 어떨까요?
“카트시.”
-아니면 차라리 절 숨겨줘요. 뭐라도 덮어두면 좀 낫겠죠.
“여긴 엔엔 님의 공방이야. 어디 숨길 곳도 없고.”
-이런! 전 도축장에 끌려온 상태였네요. 가련한 양의 심정으로 쇠정을 갖고 오는 도살자를 기다려야 해요. 이런, 이런, 이런.
가하란은 유사 정령에 손을 올렸다. 감각 장치를 통하지 않고 말을 걸었다.
“왜 그렇게 엔엔 님을 두려워하는 거야?”
조금 침착해진 목소리로 카트시가 대답했다.
-말했다시피 오래전부터 칼랑족은 우리를 괴롭혀 왔어요. 그들의 앎에 대한 욕구는 상상 이상이에요.
“그건 나도 똑같아.”
-…당신도 날 분해할 건가요?
“아니.”
-그러면 됐어요.
“내 말을 믿어주는 것처럼 엔엔 님의 말도 믿어주면 안 될까?”
-아까도 봤잖아요. 절 의심하는 걸. 그들의 시선에서는 전 존재해선 안 될 오류 덩어리일 거예요.
얼마나 괴롭혔으면 이리도 싫어하는 걸까.
-아. 잠깐이나마 눈을 떠서 즐거웠어요. 칼랑족이 돌아오면 다시 어둠으로 떠나겠죠.
“그러지 않을 거야.”
-아니요. 단언할 수 있어요! 그 칼랑족은 오자마자 제 실체를 파악해야 한다며 당신을 밀쳐내고 절 뜯어보겠죠. 불쾌한 경험을 또 겪는 거예요.
가하란은 음,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나랑 내기 하나 할래?”
-내기요?
“난 엔엔 님이 너한테 아무 짓도 안 할 거라 믿어.”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좋아. 둘 중 누구 말이 옳은지 내기해. 내 말이 맞다면 카트시도 엔엔 님과 친해지는 거야.”
-틀렸다면요?
“내가 어떻게 해서든 널 구해줄게.”
-방법은 있고요?
“아직은 없지만, 내기에서 지면 생각해볼게.”
-당신은 어리석어요. 칼랑족을 믿다니.
멀리서 딸랑, 종소리가 들려왔다. 공방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엔엔이 돌아온 것이다.
찬 기운을 몸에 두르고 돌아온 엔엔이 의자에 앉았다.
가하란은 살짝 긴장한 채 엔엔을 바라봤다.
“카트시.”
-돌아왔군요. 절 분해할 생각이겠죠?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예요.”
-거짓말.
“유사 정령만 덩그러니 있는 카트시한테 거짓말해서 뭐에 쓰죠?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저항 수단이 없는 그쪽을 분해하는 건 시간문제인데.”
-…반박할 수 없네요.
엔엔이 두 손으로 긴 주둥이를 툭툭 쳤다.
“좋아요. 감정이 있다는 말, 일단은 믿어볼게요.”
-거짓말!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다 거짓말 같나요?”
-그게, 당신은 칼랑족이잖아요.
“이봐요. 내가 칼랑의 후손인 건 사실이지만, 그게 내 모든 걸 대변하진 않아요. 그런 논지라면 그쪽한테 있다는 감정 역시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카트시가 조용해졌다.
가하란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카트시. 내기는 내가 이긴 거 같은데, 맞지?”
-간과한 게 있었어요. 시간. 맞아요. 우리에게, 그리고 지성체에게 시간은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죠. 어리석은 건 나였어요. 저한테는 그리 길지 않은 어둠이었지만, 이미 수백 년이 지났다는 걸 잊고 있었어요.
그 말을 듣고 있던 엔엔이 헛웃음을 냈다.
“기계가 망각이라.”
-처리해야 할 정보량이 많아져서 후순위로 밀린 거지, 망각은 아니에요. 센스가 없으시군요.
엔엔이 눈을 부릅떴다.
“가하란. 말을 바꿔야겠어요. 난 이 기계 덩어리가 싫어요.”
-누가 할 소리! 저도 이 털복숭이가 싫어요. 보이지는 않지만, 칼랑족이라면 분명 거칠고 냄새나는 털을 갖고 있겠죠.
“그 말 당장 취소해요. 내 털에 대한 모욕은 참을 수 없어요.”
-모욕? 전 사실을 말한 것뿐이에요.
가하란은 둘을 번갈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카트시. 지금 그 말은 틀렸어. 엔엔 님의 털은 굉장히 부드러워. 윤기도 흐르고. 색도 되게 선명하고 예뻐.”
엔엔이 기분 좋게 웃더니 가까이 다가와 검은 코로 가하란의 이마를 톡톡 건드렸다.
-관리한다고요? 그 더러운 칼랑족이?
“엔엔 님은 더럽지 않아.”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세상이 멸망했다는 것보다 더 충격적인 말이에요. 직접 봐야겠어요! 사실 확인이 필요해요!
난리를 치는 카트시였다.
잠깐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엔엔이 공방 창고에서 둥근 물체를 가지고 나왔다.
탁한 백색으로 물든 구체 겉면에 검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마치 사람의 눈처럼.
“‘인형’의 눈이에요. 가하란도 연구실에서 인형을 본 적이 있죠?”
“유사 정령에 연결하는 인형은 본 적이 있어요. 근데 눈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는데….”
“구형 모델이라 그래요.”
유사 정령 위에 눈알을 올리고 커넥터로 연결했다.
“마력선 구조가 달라서 연결될지는 모르겠네요.”
-그런 거라면 걱정 마요. 제가 해결할 수 있으니.
잠시 후 흰 구체 가운데 놓인 검은 동그라미가 부르르 떨리더니 좌우로 이동했다.
눈동자가 엔엔을 향했다.
잠깐의 침묵.
이어서 카트시가 말했다.
-현시대 미형의 기준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그래요. 제가 틀렸어요. 당신의 털은 무척이나 아름답네요.
눈동자가 가하란 쪽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보안책임자는…….
“난?”
-……너무 어리네요. 장난감을 하나 사주고 싶을 정도예요.
“사주면 나야 좋지.”
가하란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