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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169화 (142/558)

169화

가하란은 유사 정령에 손을 올리고 펼쳐진 마력선을 잡아냈다.

“카트시, 카트시. 거기 있어?”

-다시 왔네요?

“응. 다시 왔어.”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죠? 목소리에 변화가 없는 걸 보면 오래되지 않은 거 같은데.

“한 시간도 안 지났어.”

-금방 온다는 약속을 지킨 거네요. 놀라워요. 제가 아는 인간분들은 약속을 잘 안 지켰거든요. 창조주인 줄조차 우리와 한 약속을 잊고 놀 때가 많았죠.

“나도 약속을 못 지킬 때가 있지만, 되도록 지키려고 노력해. 다른 사람들도 똑같을 거야.”

-상냥한 말이네요. 근데 이제 어쩌죠? 흘러버린 시간에 창조주조차 사라졌고, 제 감각기관 역시 소거돼 버렸어요. 당신과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즐겁지만…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가하란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널 도울 수 없지만, 옆에 계신 분이라면 널 고쳐줄 수 있을 거야.”

-오! 옆에 누가 또 있나요?

“소개해줄게. 근데 내 목소리 외엔 못 듣는 거지?”

-이 기이한 연결 상태에서는 당신 목소리만 들을 수 있어요. 저에게 귀를 달아준다면 주변 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만.

가하란은 엔엔을 바라봤다.

“카트시는 지금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상태예요.”

“지금 가하란과 얘기하고 있지 않나요?”

“이렇게 손을 대고 있으면 목소리가 전해져요. 이유는 모르겠어요.”

“접촉을 통한 정보 교환이라. 일단 나도 손을 대볼게요.”

엔엔이 유사 정령에 손을 대며 말했다.

“내 목소리가 들리나요?”

가하란은 카트시가 반응하길 기다렸다.

-저기요? 보안책임자님? 또 어디 가신 건가요?

“아니, 나 여기 있어. 그보다 카트시. 방금 엔엔 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어?”

-당신 목소리 외엔 아무것도 안 들려요. 근데 옆에 계신 분 성함이 엔엔인가요?

“응.”

손바닥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이건 카트시의 감정인 걸까?

-살짝 불안한 이름이네요.

“불안하다니, 왜?”

의아해하며 엔엔을 바라봤다. 엔엔이 작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왜 그러죠?”

“카트시가 말했어요. 엔엔 님의 이름이 불안하다고.”

“내 이름이요?”

조용히 있던 카트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설마 아니겠죠. 그런 우연이 있을 리 없으니까요. 그래도 확인차 묻는 건데, 엔엔이란 분이 칼랑족은 아니겠죠?

“맞아. 어떻게 알았어?”

손바닥이 찌릿했다. 놀라서 손을 뗐다.

“왜 그러죠?”

엔엔은 따끔하지 않은 걸까?

“엔엔 님은 괜찮으세요? 전 손이 따끔거렸거든요.”

“난 괜찮아요. 지금도 아무런 느낌도 없고.”

엔엔은 유사 정령에 양손을 댄 채 말했다.

“아무래도 일방적인 정보 교환이 이뤄진 모양이네요. 가하란, 유사 정령이 뭐라고 했죠?”

“엔엔 님이 칼랑족이냐고 물었고. 엄청 놀란 느낌이었어요.”

“그래요?”

“다시 말을 걸어 볼게요.”

손을 올리고 카트시를 불렀다. 카트시, 카트시. 지체 없이 대답하던 카트시가 입을 꾹 다물었다.

“갑자기 조용해졌어요.”

“대답이 없다고요?”

“네.”

“그럴 리 없어요. 유사 정령은 연산장치예요. 서포트를 위해 인간과 유사한 인격 구조를 갖춰 놨지만 어디까지나 형식일 뿐이에요. 정보처리기기가 의사를 갖고 명령을 무시한다는 건 기계적 오류, 혹은 치명적인 설계 미스예요.”

가하란은 눈을 깜빡였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 사이사이에 알아듣기 힘든 말이 놓여 있었다.

엔엔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은 다음 다시 말했다.

“유사 정령은 가하란의 말을 반드시 따르게 돼 있어요. 반드시.”

“싫으면 안 들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가하란, 유사 정령과 대화가 가능하다고 해서 오해하면 안 돼요. 이 안에 든 건 정밀한 태엽 장치일 뿐이에요. 정교하지만 가하란처럼 자유의지를 가진 게 아니에요.”

“하지만 카트시는 외롭다고 했어요. 그건…….”

엔엔이 얼굴을 살짝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

“더 나은 지원을 위해 그런 기능을 넣었을 수도 있죠. 살갑게 말해 주는 거예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입력된 것이에요. 카트시는 외로움을 몰라요. 알 수 없어요.”

단호한 말이었다.

가하란은 유사 정령을 바라봤다. 정말 그런 걸까? 정해진 대답 외에는 할 수 없는 기계일까?

“전, 모르겠어요. 오늘 처음 만났고 많은 걸 아는 건 아니지만, 옛날 얘기를 할 때의 카트시는 정말 외로워 보였어요.”

가하란은 나직한 목소리로 카트시를 불러봤다.

“카트시. 왜 갑자기 말이 없는 거야? 뭐가 무서운 거야?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거야? 나한테 말해줄 수 없어?”

도와주고 싶었다.

고통 속에서 홀로 발버둥 친다는 게 무엇인지, 가하란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카트시가 기계인 건 중요치 않았다. 말이 통했고 감정이 전해졌다. 위로할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가하란. 요청을 거부한 기계는 오류덩어리인 실패작이에요. 장시간 방치된 탓에 문제가 생겼을 테죠. 이 이상의 접촉은 가하란한테도 안 좋은 영향이 갈 수도 있어요.”

엔엔이 가하란의 손목을 붙잡았다. 털 아래 감춰진 단단한 살이 느껴진다.

“엔엔 님. 잠깐만요.”

“나는 수없이 많은 유사 정령을 봐왔어요. 이런 오류도 셀 수 없이 경험했죠. 그러니 나한테 맡겨요.”

가하란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저었다.

“카트시는 고장 난 게 아니에요.”

“그렇다면 왜 조용히 있는 거죠? 아까는 말을 했다면서요.”

그때였다.

-저기.

카트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카트시! 무슨 문제 있었어? 어디 아픈 거야?”

-아니요, 문제없어요. 그리고 저한테 아프다는 개념은 어울리지 않아요.

손바닥 중앙이 간질간질했다. 저릿했던 것과는 또 다른 촉감.

-연결된 상태라 목소리를 듣고 있었어요. 추론하건대 칼랑족과 마찰이 생긴 것 같네요. 그럴 줄 알았어요. 칼랑족은 무서운 분들이거든요.

“아니야. 엔엔 님은 무섭지 않아.”

가하란은 엔엔을 보며 말했다.

여기서 대화를 멈출 순 없었다. 가만히 바라보던 엔엔이 움켜쥐고 있던 가하란의 손목을 놓았다.

“조금만 더 시간을 드릴게요.”

허락이 떨어졌다.

가하란은 유사 정령에 두 손을 올리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왜 갑자기 말을 멈춘 거야? 나한테 이유를 말해줄 수 있어?”

-부탁하는 건가요? 왜죠?

“알고 싶으니까. 아픈 게 아닌지 걱정되니까.”

-이상하네요. 당신은 우리의 창조주와 같이 높은 이해력을 지녔지만, 지식은 부족한 거 같아요. 우린 기계에요. 기계한테 부탁하는 인간은 없어요. 걱정하는 인간도 없고요.

“그래선 안 되는 거야?”

-그건……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네요.

가하란은 차분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나한테 그랬잖아. 외로웠다고. 어머니와 더는 만날 수 없다고 했을 때, 카트시는 슬퍼했어. 그렇지 않아?”

-당신은 믿어주는 거예요?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걸, 슬픔을 안다는 걸, 외로움을 이해했다는 걸.

“나는 믿어. 그러니 말해줄 수 있어? 난, 네가 말한 대로 지식이 모자라서 말해주지 않으면 알 수 없어.”

-순진하시네요. 기계가 말하는 대로 다 믿다니. 옆에 있는 칼랑족이 이 소리를 들었다면 눈에 불을 켜고 화냈을 거예요. 기계는 그럴 리 없다고.

가하란은 엔엔을 슬쩍 바라본 다음 목소리를 낮췄다.

“엔엔 님을 아는 거야?”

-아니요. 몰라요. 하지만 그런 이름을 쓰는 건 칼랑족이 대부분이라 추측해본 거예요.

“엔엔 님은 무섭지 않아. 너를 해코지하지 않을 거고.”

-모르겠어요. 제가 봐온 칼랑족은 결이 다른 마법공학품에 광적인 집착을 보였어요. 줄리어스, 우리의 어머니도 한참 시달렸죠. 제 마음의 벽을 허물고 억지로 침입하려 한 칼랑족도 있었어요. 그래서, 전 그들이 싫어요.

“엔엔 님은 그러지 않을 거야. 나도 옆에 있고. 그러니 내가 널 도울 수 있게 나를 믿어줄래?”

짧은 침묵.

그리고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하하하, 기계한테 믿음을 요구하는 인간은 정말 오랜만이에요. 당신은 기계어 번역 없이도 저한테 접근했어요. 줄이 짜놓은 보안체계 역시 쉽게 변경했죠. 당신이 진정으로 바란다면 강제력을 발휘할 수도 있어요. 귀찮게 부탁 같은 거 안 해도 되는 거죠.

“그러면 카트시가 싫어할 거잖아. 난 강요할 생각 없어. 원하지 않으면 그만둘 거야.”

호기심을 이유 삼아 상처 입힐 생각은 없다.

-어째서죠?

“카트시가 싫어하니까.”

-저를 당신과 동등한 개체로서 대우해주는 건가요?

“동등한 개체? 그런 건 몰라. 난 그냥 카트시와 친구가 되고 싶을 뿐이야.”

-친구, 친구, 친구. 그 말은 너무 매력적인 말이에요.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 마력선들이 한순간 팽창했다. 얼기설기 꼬인 마력선이 일렬로 늘어서더니, 새로운 형태로 모습을 바꿨다.

-줄리어스는 우릴 파기했어요. 그게 옳은 선택이라 믿은 거겠죠. 우리도 그 선택을 따랐어요. 창조주의 슬픔을 우린 무시할 수 없었거든요.

카트시의 목소리를 들으며 변화한 마력선을 바라봤다.

직선으로 평면에 그려졌던 마력선이 이제는 둥글게 휘며 입체적인 형태를 갖췄다.

구형에서 타원형으로,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는 마력선이었다. 마력선 도안처럼 고정된 형태가 아니었다.

선 안에 담긴 이야기를 읽어낼 수는 없지만, 이것만은 확실했다.

아빠가 알려준, 덴스 교수가 가르쳐준 마력선과는 아예 다르다.

가하란은 멍한 눈으로 변하는 마력선을 바라보다가 눈을 찡그렸다. 통증이 찾아오고 있었다.

“카트시, 이게 너야?”

-마지막 잠금쇠를 풀었어요. 이게 줄이 만들어낸 제 실체예요.

“나는 잘 모르겠지만, 이 선이 아름답다는 건 알겠어.”

-선? 당신 눈에는 그렇게 보이나 보죠?

“아니야?”

-뭐, 상관없겠죠. 보이는 형태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자, 저는 당신께 협력할 준비를 끝냈어요. 감각장치를 이어 준다면 받아들일게요. 옆에 있는 칼랑족이라면 방법을 알 거예요.

“알겠어. 잠깐만 기다려.”

가하란은 유사 정령에서 손을 떼고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이 쓰라리다. 눈물도 찔끔 나왔다.

“대령님께 들었어요. 그 눈에 대해서.”

“오래 뜨고 있으면 조금 아파요.”

“되도록 쓰지 않는 게 좋겠어요. 미약한 통증은 경고일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서 사용할게요.”

두 손으로 눈을 문지른 다음 엔엔을 바라봤다.

“카트시랑 얘기했어요. 감각장치를 연결해도 괜찮다는데, 여기에 그런 게 있나요?”

“감각장치야 있긴 하죠. 수치가 낮긴 하지만 소통은 가능할 거예요.”

엔엔이 구석에 있는 작은 문을 열었다.

“기다려요.”

안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쿵쿵, 촤르륵, 끼익끼익. 3분 정도 기다렸을 때였다. 엔엔이 머리에 내려앉은 먼지를 털어내며 밖으로 나왔다.

“이거면 듣기와 말하기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예요.”

가로세로 50cm 정도 되는 두꺼운 철판이었다. 얇은 커넥터로 유사 정령과 철판을 연결한 뒤 엔엔이 철판에 손을 올렸다.

“이 정도 크기라면 내가 비축한 마나로도 충분할 테죠.”

속을 울렁거리게 하는 마나 파장이 방안 전체에 퍼져나갔다.

가하란은 긴장한 채 유사 정령을 바라봤다.

잠시 후, 철판이 진동하며 목소리가 나왔다.

-조악한 감각장치라 연결하는 데 시간이 걸렸네요. 어때요? 내 목소리 들리나요?

카트시가 선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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