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8화
쩍 벌어지는 입을 다물며 꼬마를 바라봤다. 이리저리, 지치지도 않고 골동품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질리지도 않는 건가.
탐구심이 왕성한 시기인 건 맞지만 잿빛 무덤은 별 재미가 없을 텐데.
“이제 슬슬 돌아갈까?”
“자, 잠깐만요. 조금만 더 볼게요.”
“30분 전에도 그 말을 했던 거 같은데.”
“신기한 게 많아서요.”
“아까부터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지 않아?”
“그런가요?”
투발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여기 말고도 재미난 게 많아. 용광로도 아직 못 봤잖아. 지금쯤이면 일 시작했을 텐데, 쇠 녹이는 거 보고 싶지 않냐?”
“보고 싶어요!”
“그럼 올라갈까?”
꼬마가 눈동자를 슬그머니 돌렸다. 뭐 마려운 강아지 같다.
“그래, 여기서 좀 더 놀다 가자. 오늘은 너한테 맞춰주는 날이니까.”
의자에 앉자 팔짱을 꼈다.
이것도 나쁘지는 않다. 지루하긴 하지만 어쨌든 쉬는 거니까.
기계들의 무덤 사이를 오가던 꼬마가 쪼르르 다가왔다.
“아저씨.”
“어?”
“피곤하시면 주무셔도 돼요. 저 혼자 놀고 있을게요.”
“한숨 잤더니 괜찮아.”
“저도 괜찮아요. 더 주무세요.”
마음 씀씀이가 좋네, 싶다가도 살짝 의구심이 든다. 저 탁한 하늘색 눈동자에 조급함이 가득하다.
뭐 숨기는 거라도 있는 걸까?
“뭐, 그래. 좀 자마.”
애가 이렇게까지 보채는데 넘어가 주는 게 어른의 도리지. 다시 의자를 붙여 침대를 만들고 누웠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서성거리던 가하란이 이쪽 눈치를 살짝 본다.
투발은 자는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발소리가 들렸다. 곁눈질로 꼬마를 살폈다.
저 구석으로 뛰어간 꼬마가 고철이나 다름없는 유사 정령 앞에 주저앉았다.
뭘 하는 걸까.
천천히 일어났다. 발소리를 죽이고 꼬마 뒤쪽으로 걸어갔다.
“나 다시 왔어.”
꼬마가 유사 정령한테 말을 걸고 있었다. 투발은 풋 하고 웃고 말았다.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는 가하란에게 손을 내저었다.
“놀리려는 건 아니었다. 내 어릴 적이 생각나서 그랬어. 아저씨는 저 구석에 있을 테니까 천천히 놀아라.”
또래보다 성숙해 보였는데, 애는 역시 애였다.
그러고 보면 어릴 때 저러고 놀았지.
길다가 주운 나뭇가지를 전설의 명검 삼아 휘두르고, 기괴하게 생긴 바위를 마왕이라 칭하며 때려잡았다.
장난감을 인격화해 친구 삼는 것 정도야 흔하디흔한 애들 장난이고.
문득 올란트가 떠오른다.
저 새파랗게 어린애를 혼자 두고 떠난 무심한 놈. 욕 한 바가지 먹어도 별수 없는 행동이지만,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부모로서의 삶도 중요하지만 올란트란 사내로서의 삶도 존중받아야 하니까.
그놈도 떠나면서 눈물깨나 흘렸을 것이다. 떠나는 순간까지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떠났다.
덴스 교수와 함께 준비 중인 연구를 위해서.
둔으로 다시 복귀했을 때 어떤 결과물을 들고 올지, 다들 기대하고 있었다.
듣기로는 마나응축로 효율 개선이 연구 주제라고 했는데, 그건 표면적인 이유이고 다른 프로젝트가 있는 것 같았다.
연구단지 자체가 워낙 비밀스러운 곳이라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연구단지도, 제철소도 젊은 피로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었다. 투발은 허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저 꼬마가 제철소에 들어와 명패를 받는 날도 오겠지?
시간은 금방 지나갈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제철소에 온 게 어제 같은데, 벌써 쉰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세월의 무심함을 느끼며 눈을 지그시 감을 때였다. 공동으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소리가 났다.
여길 찾아올 사람은 없을 텐데.
투발은 이불 삼아 덮었던 외투를 다시 입고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엔엔 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투발은 후드 밑으로 도드라진 검은 코를 보며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안에 가하란 있나요?”
“네, 있습니다.”
“제대로 찾아왔네요. 여기에도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엔엔이 후드를 벗었다. 눌린 털을 손으로 툭툭 털어내며 앞으로 걸어왔다.
투발은 그 옆에 서서 보폭을 맞췄다.
“눈 오는 날에는 안 나오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눈앞에 있는 칼랑족은 비를 사랑하고 눈을 싫어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공방 문을 활짝 열어두고 모두를 반기지만, 눈이 오는 날이면 공방을 봉쇄하고 잠적해 버린다.
“가하란한테 볼일이 있어서요. 눈도 많이 오진 않고.”
꼬마한테 볼일이라. 제철소에서 일한 지 어언 40년이 되어가는데, 엔엔이 누굴 찾아 나서는 건 몇 번 본 적이 없었다.
엔엔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댁의 아이들은 잘 있나요?”
“잘 있겠죠. 결혼하고 나서는 자기들 사는 게 바쁜지 연락도 없습니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또다시 세월이 많이 지났음을 느낀다. 젊었던 시절 엔엔을 봤을 땐 말 걸기도 어려웠다. 엔엔은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친해지고 나서는 이렇게 편히 말할 수 있게 됐지만, 친해지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가하란! 손님이 찾아왔다.”
유사 정령 옆을 기웃거리던 가하란이 몸을 홱 돌렸다.
“엔엔 님!”
부리나케 달려와 엔엔 앞에 서는 가하란이었다.
“이거 돌려주려고 왔어요.”
엔엔이 가죽 덮개로 싸인 종이 뭉치를 꺼냈다.
저게 뭘까, 내심 궁금했으나 끼어들어 질문하진 않았다.
인간에게 호의적인 칼랑족이지만, 그렇다고 예의 없게 구는 자를 눈감아 줄 정도로 순해 빠지진 않았다.
투발은 둘이 편하게 얘기할 수 있도록 뒤로 물러섰다.
“전 잠깐 주변을 돌아보고 오죠. 무덤이라고 해도 아예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투발.”
“아닙니다.”
투발은 눈웃음 지으며 돌아섰다.
자, 명목상의 업무나 좀 봐볼까?
* * *
가하란은 핀들론의 일지를 넘겨받으며 말했다.
“천천히 돌려주셔도 되는데.”
“다 보면 바로 돌려주기로 약속했으니까요. 그 기록지는 가하란한테 소중한 거니 지체하고 싶지 않았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일지를 품에 안았다.
“여긴 오랜만에 오네요.”
엔엔이 추억을 되짚듯이 천천히 벽을 훑었다. 살짝 내려앉은 검은 코도 위아래로 씰룩거렸다.
“엔엔 님은 여기에 있던 물건들을 보셨나요?”
“네. 봤어요. 오래전 도시책임자가 자문을 요청해왔고 10년 주기로 이곳을 찾아와 기계들을 살폈죠.”
“기계들이 얼마나 많았었나요?”
“내가 처음 여기 왔을 땐 저기부터 저기까지, 발 디딜 틈 없이 기계와 마법공학품으로 가득했죠.”
가하란은 엔엔의 손가락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투발 아저씨가 그랬어요. 여기에 남은 물건은 가지고 올라갈 가치가 없어서 내버려 둔 거라고. 정말인가요?”
“맞아요. 굳이 옮길 필요가 없어서 여기에 내버려 뒀죠. 사실 위로 올려 보낸 물건들도 상태가 썩 좋지는 않았어요. 여긴… 매립지와 비슷한 곳이니까요.”
“매립지요?”
“거대한 쓰레기통 정도라 생각하면 돼요.”
쓰레기통.
가하란은 어둠 아래 잠들어 있는 카트시를 바라봤다. 줄리어스는 왜 자신이 만든 유사 정령을 이곳에 버린 걸까.
“이 땅을 오랜 시간 차지하고 있던 건 나타 왕조였어요. 하지만 연이은 지진과 화산 활동으로 왕조가 붕괴하고 여러 부족 국가로 갈라졌죠. 땅에 발붙이고 사는 지성체는 분노한 자연을 이길 수 없었어요.”
“갈라졌던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제국이 된 건가요?”
“맞아요. 그래서 나타 왕조의 핏줄을 이었다고 하지만, 정통성 여부는 누구도 알 수 없어요. 너무 오래전 벌어진 일이라 사실 확인도 어렵고. 뭐, 브라인 님이라면 알고 계실 테지만 그분은 항상 입을 다물고 계시니.”
엔엔이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재미없는 얘기였네요.”
“아니에요. 전 옛날얘기도 좋아해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근데 여기에 얼마나 있었던 건가요? 여긴 볼 게 마땅치 않은데.”
“한 시간 좀 넘게 있었던 거 같아요.”
“여기서요?”
가하란은 뒤를 힐긋 살폈다.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엔엔한테는 말할 수 있었다.
“엔엔 님.”
“왜 그러죠?”
“여기 있는 물건을 가지고 나갈 수 있을까요?”
엔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출이야 어렵지 않아요. 나한테도 권한이 있고요. 하지만 여기 있는 건….”
가하란은 손가락으로 유사 정령을 가리켰다.
“저기, 아직 깨어 있는 친구가 있어요.”
“네?”
“카트시라고 하는데, 오랫동안 여기 혼자 있었어요. 전 저 애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고 싶어요.”
왼쪽으로 기울었던 엔엔의 고개가 이번엔 오른쪽으로 기우뚱거렸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여기 있는 것들은 모두 망가져서 작동을 멈췄어요. 나를 비롯해 여러 인간족이 몇십, 몇백 번 확인을 끝냈고요.”
“하지만 카트시는 살아 있어요.”
“…살아 있다? 그건 올바른 표현이 아니에요. 유사 정령은 살고 죽는 개념이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카트시는…….”
가하란은 다시금 유사 정령을 바라봤다. 말로 설명이 안 된다면 직접 보여주면 된다.
하지만 어떻게 보여주지?
카트시의 목소리는 머리로 전달될 뿐이고,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는데.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알겠어요. 저걸 가지고 나가면 되는 거죠?”
엔엔이 앞으로 나아가더니 유사 정령을 번쩍 들어 올렸다. 크기가 작다고는 하나 쇳덩어리였다.
저걸 가볍게 들어 올리다니.
“내 공방으로 가요. 가하란이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 가서 점검해보죠.”
“감사합니다. 카트시도 분명 고마워할 거예요.”
“카트시. 이름이 카트시인가요?”
“네!”
엔엔이 옅게 웃었다.
“가요. 눈발이 더 거세지기 전에. 난 비는 좋지만, 눈은 싫거든요.”
* * *
가하란은 큼지막한 우산을 낑낑거리며 들었다. 잘 가라는 인사와 함께 투발이 준 우산이었다.
“가하란. 난 우비를 입고 있으니 괜찮아요. 그러니 혼자 써요.”
“아니에요. 엔엔 님 눈이 싫다고 하셨잖아요.”
엔엔 님의 키가 그리 크지 않아서 다행이야, 가하란은 속으로 생각하며 우산으로 엔엔의 머리 위를 가렸다.
제철소를 떠나 연구단지에 진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엔엔의 공방 앞에 도달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엔엔이 유사 정령을 바닥에 내려놓고 우비를 벗었다.
“일단 안으로 가져가죠.”
가하란은 엔엔 뒤에 바짝 붙었다. 긴장한 눈으로 옆과 뒤를 살피면서.
“그 인형은 이제 없나요?”
“인형이라면 저기 구석에 숨어 있어요.”
“…괜찮을까요?”
“그때 덤벼들었던 건 도깨비 때문이에요. 저 애는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도깨비. 가하란은 공방에서 봤던 기괴한 괴물을 떠올리며 걸음을 뗐다.
공방 안쪽, 길쭉한 테이블과 각종 도구가 반겨주었다. 저번에 왔을 때보다 잡동사니가 늘어난 것 같았다.
“나름 정리해둔 거예요. 귀찮아서 안 치운 거 아니에요.”
가하란은 배시시 웃으면서 엔엔을 바라봤다. 방금 건 분명 변명이다.
“…살다 보면 치우기 귀찮을 때도 있는 법이에요. 가하란은 어려서 모르겠지만.”
“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그래요. 내가 찔려서 혼자 떠든 거예요. 그보다 여기 위에 있는 것들 좀 치워줄래요?”
테이블 구석에 있는 물건들을 들어다가 옆 선반에 올려뒀다.
쿵,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유사 정령이 올라갔다.
“좋아요. 이제 살펴볼까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