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167화 (140/558)

제167화

열일곱 번째.

화이트 폰.

카트시.

가하란은 줄리어스의 기록을 떠올렸다. 사형 집행일 닷새 전에 사라진 개발자와 서른두 개의 유사 정령.

머릿속에서 파편화된 자료들이 빙글빙글 돌았다. 온전한 정보로 가다듬으려면 연결점이 필요했다.

유사 정령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카트시라고 했지? 혹시 줄리어스라는 분을 알아?”

또다시 침묵.

대답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다.

1초가 1시간 같았다. 조바심을 느끼며 유사 정령을 바라봤다.

“카트시?”

대화의 공백이 길었다. 아까는 매끄럽게 말하던 유사 정령이 입을 꾹 다물었다.

동력, 마나가 부족한 걸까?

아니면 우연히 일어났다가 다시 잠든 걸까?

이렇게 헤어지긴 싫은데.

가하란은 안타까운 마음에 유사 정령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들리시나요? 저기요? 들리십니까? 또 저 혼자 남겨진 건가요? 전 외로운 게 싫어요. 외롭게 내버려 둘 거면 차라리 절….

“카트시.”

-아! 다시 왔군요. 이름 모를 새로운 보안책임자께서.

“난 계속 앞에 있었어.”

-앞이요?

“응. 나 안 보여?”

-저런. 보안책임자의 적격심사가 시급해 보이네요. 인지능력이 심각하게 떨어지는 것 같아요.

새침한 목소리였다.

제니가 화났을 때 이런 목소리를 냈다. 화가 나서 상대를 무시하고 싶지만, 동시에 관심을 바라는 상태.

가하란은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봤다. 손을 뗐을 때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살며시 손을 떼봤다.

“카트시. 내 말 들려?”

역시나 대답이 없다.

손이 닿아야지만 소통이 가능한 걸까?

유사 정령에 손을 올리자 카트시의 음성이 전달됐다.

-저기요! 또 어딜 간 건가요. 미안해요. 적격심사 같은 건 없어요. 제가 그럴 위치도 아니고요. 그냥 오랜만에 말할 상대가 나타나서 기뻐서 그랬어요. 아, 기쁘다는 감정은요….

“미안. 확인할 게 있어서 잠깐 멀어졌어.”

-…다시는 그런 장난치지 마세요.

“장난친 건 아닌데.”

정령의 목소리처럼 귀가 아닌 머리로 직접 전해지는 목소리였다.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 걸까?

-저기요? 또 어디 간 건가요?

“아니. 나 앞에 있어. 아까도 물어본 거지만, 내가 안 보여?”

-음, 대답하기에 앞서 제가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알았어. 내가 먼저 대답해줄게.”

입을 다물고 카트시의 말을 기다렸다.

-이전 보안책임자는 어떻게 된 건가요?

“이전 보안책임자?”

-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당신이 권한을 양도받았다는 건 이전 보안책임자를 알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가하란은 왼손으로 귀 뒤쪽을 매만졌다. 생각해둔 가설을 토대로 말을 꺼냈다.

“혹시 이전 보안책임자의 이름이 줄리어스야?”

-역시! 알고 있잖아요.

“이름만 알고 있어.”

-그게 무슨 소리죠? 프로텍트 변경 권한은 ‘줄’ 외에는 아무도 몰라요. 당신이 줄리어스를 모른다면 어떻게 차단막을 뚫고 저한테 도달한 거죠?

“나는 그냥 끊어진 선을 이었을 뿐이야. 그리고 네가 나타났어.”

-모르겠어요. 당신이 하는 말은 이해 불가예요. 줄은 어디 있죠? 내 본래 주인을, 창조주를 데려와요. 이야기해야겠어요. 이 상황을….

시무룩해지는 목소리였다.

가하란은 선뜻 입을 열 수 없었다. 줄리어스는 수백 년 전의 사람이었다. 분명 죽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카트시에게 전해도 되는 걸까?

이상했다. 눈앞에 있는 건 복잡하다고는 하나 결국 기계장치였다.

그어진 마력선에 따라 작동하고 분석하고 결과물만 내놓는, 감정과 정반대편에 놓인 이성의 산물.

하지만 카트시는 외롭다고 말했다. 전해지는 음성에서 감정이 느껴졌다.

죽었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침묵을 지키고 있자, 카트시가 다시금 말을 꺼냈다.

-당신의 마음이 전해져 와요. 절 걱정하고 있군요.

“그런 게 느껴져?”

-어느 정도는요. 나는 수많은 사람과 교류했지만, 당신처럼 따뜻한 사람은 몇 명 없었어요.

유사 정령에 닿아 있는 손바닥이 저려온다. 여린 통증이 마치 슬픔처럼 느껴졌다.

“카트시. 울어?”

-…사실 알고 있어요. 줄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 거겠죠? 그녀의 몸은 흙으로, 영혼은 저편으로 날아갔을 거예요. 죽음. 그래요. 우리의 신은, 우리의 어머니는 결국 일을 저질렀나 보네요.

신, 책임자, 그리고 어머니.

-정리가 필요해요. 아까 물었죠? 당신이 보이지 않느냐고.

“응.”

-지금의 전 모든 감각기관을 상실한 상태예요. 인간으로 비유하자면 모든 촉각을 제거당한 채 뇌만 둥둥 떠 있는 상황이죠.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아요.

뇌만 둥둥 떠 있다는 적나라한 말이 몸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가하란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

“하지만 내 목소리를 듣고 있잖아.”

-연결된 상태니까요. 커넥트를 통해 인지통합을 진행 중이지 않나요?

“아니. 난 그냥 유사 정령에 손을 대고 있을 뿐이야.”

-제 본체에 손을 대고 있을 뿐이라고요?

“응. 다른 장치는 없어.”

-…어떻게 저와 대화중이죠?

“내가 묻고 싶은 건데.”

-그런 게 가능한 건 줄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기계어 번역 없이 신체 접촉만으로 의사가 전달된다는 건 당신의 이해력이 줄과 비슷한 수준이란 거네요.

가하란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간이침대에 누워 있는 투발이 보였다.

-무슨 일이죠? 감정적 변화가 느껴지는데.

“너랑 대화하는 걸 들키면 안 될 것 같아서 살펴보는 중이야.”

-혹시 위험한 상황인가요?

“그런 건 아니야.”

-다행이네요. 또다시 어둠에 잠기고 싶진 않으니까요.

가하란은 옅게 미소를 지었다.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 말, 믿어볼게요.

“근데 잠깐 떠날 수도 있어.”

-금세 약속을 어기는군요. 인간은 변덕이 심해요.

“어쩔 수 없어. 여긴 나 혼자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가하란은 높은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안책임자에게 상황 설명을 요구하는 게 웃기긴 하지만,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정보가 너무 부족해요.

“뭐든 물어봐. 아는 건 대답해줄게.”

카트시가 차분해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여긴 어디죠?

“지하야.”

-피상적이네요. 지명을 얘기해주면 좋겠어요. 나타 왕국의 어디쯤이죠? 아니, 왕국을 벗어났나요?

대화 전반에서 느껴지던 괴리감의 정체를 새삼 깨달았다.

카트시는 아직 과거에 살고 있었다. 수백 년 전에 있었던 왕국 어딘가에 여전히 머물고 있는 것이다.

“카트시. 여긴 나타 왕국이 아니야.”

-그럴 것 같았어요. 줄이 우리를 파기하기로 했을 때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죠.

파기. 가하란은 그 단어를 곱씹었다.

브라인이 보여준 문서에는 유폐했다고 적혀 있었다.

유폐와 파기. 결과는 비슷하겠으나 단어가 주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줄리어스는 자신이 설계한 유사 정령을 숨기는 게 아닌, 전부 부숴버리려 했던 걸까?

질문은 일단 안으로 삼켰다.

카트시에게 지금 상황을 설명하는 게 먼저였다.

-그러면 어디죠? 아우런 산맥에서 발견된 지하 동굴인가요? 아니면 콘콘 상업연합국에 부탁한 건가요?

“카트시.”

-네?

“내가 전부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카트시가 말한 나라는 이 세상에 없을 거야.”

-그 또한 예상했어요. 콘콘의 붕괴 역시 당연한 수순이니까요. 작은 국가 혹은 도시로 나뉘었겠네요.

가하란은 숨을 짧게 토해낸 후 말했다.

“카트시. 여긴 둔이라는 도시야.”

-둔? 처음 듣는 도시네요. 콘콘에서 떨어져 나온 건가요?

“제국의 도시야.”

-제국? 나타 왕국이 제국이 됐나요?

“비슷해. 제국의 전신이 나타 왕궁이라고 했으니까. 다만, 최근에 제국으로 바뀐 게 아니야.”

-…잠깐만요. 이제야 알겠어요. 저는 틀린 질문을 던진 거였어요. 다시 물어보죠.

몇 초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저는 얼마 만에 깨어난 거죠?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만, 나타 왕조는 수백 년 전에 없어졌다고 들었어.”

-…….

“카트시?”

다시 한번 이름을 부르려다가 참았다. 카트시는 말했다.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지금은 내버려 두는 편이 좋았다.

얼마 후 카트시가 말했다.

-잠깐의 단절이었어요. 어둠은 길지 않았어요. 줄과 헤어지고 당신을 만나기까지,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수백 년이 지났군요.

“카트시, 괜찮아?”

-절 걱정해주는 건가요? 친절하시네요. 괜찮다, 안 괜찮다. 이분법적으로 나누자면 괜찮은 편에 속해요. 우린 그렇게 제작됐으니까요. 하지만 깊은 곳에, 저마저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곳에서 서글픔이 올라와요. 그래요, 이건 분명 서글픔이에요.

그때였다. 뒤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투발이 늘어지게 하품하며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카트시, 미안해. 잠깐 가봐야 해.”

-또 이별인가요. 괜찮아요. 공급되는 마력이 없으니 금방 꺼지겠죠. 어둠은 익숙해요.

“다시 올게. 이젠 외롭지 않을 거야.”

-…그랬으면 좋겠네요.

손을 뗐다.

머릿속으로 전해지던 목소리가 끊겼다. 가하란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금방 올게”라고 말한 후 몸을 돌렸다.

* * *

브라인은 축 늘어진 귀를 마사지하며 기분 좋게 웃었다.

고요, 정적, 평화.

완벽한 오후였다.

여기에 곁들여진 요정의 안뜰 디저트까지.

심신이 녹아드는,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그리고 천국의 평온을 방해하는 악의 무리가 저 밖에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브라인은 코를 씰룩였다.

문을 걸어 잠그고 귀를 막았다. 오늘은 손님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낯익은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다 쫓아내도 이 아이만큼은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문을 살포시 열었다. 악다구니를 쓰며 서류 좀 확인하겠다고 난리 치는 인간들 사이로, 후드를 깊게 눌러쓴 아이가 보였다.

“엔엔! 인간 놈들 옆으로 치우고 들어와.”

칼랑의 후손이 안으로 잽싸게 들어왔다. 브라인은 손가락을 튕겨 엔엔을 코앞으로 데려왔다.

엔엔이 후드를 벗으며 말했다.

“맡은 일은 하셔야죠.”

“싫어. 오늘은 쉬는 날이야.”

“그러다 디온한테 혼나요.”

“코흘리개 시절부터 봐온 애야. 날 혼내려면 아직 멀었지.”

“디온은 그렇게 생각 안 할걸요?”

브라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잔소리하러 온 거면 얼른 나가.”

“안 그래도 돌아갈 거예요. 가하란, 어디 있는지만 말해주세요.”

“그 꼬맹이를? 왜?”

“빌린 걸 돌려줘야 해서요.”

그렇게 말하며 두툼한 종이 뭉치를 꺼내 드는 엔엔이었다.

“그게 뭔데?”

“로안의 일지요.”

“그 애가 남긴 거구나. 줘봐. 나도 좀 보게.”

“안 돼요. 가하란한테 허락을 먼저 맡으세요.”

“…마음에 안 들어.”

코를 씰룩이며 말했다.

“꼬마라면 제철소 쪽에 있을 거야. 여기저기 구경 다니고 있겠지.”

“알겠어요. 그쪽으로 가볼게요.”

“근데 셀베이아 없어?”

“화장실 갔나 봐요. 자리에 없던데요.”

“그래서 인간들이 저 앞에서 지랄 중이군. 가는 길에 좀 전해줘. 오늘은 꺼지라고.”

“싫어요.”

엔엔이 방긋 웃으며 후드를 눌러썼다.

“저저! 늙은이 무시하는 거 봐. 털 뽑아다가 늑대 털 코트를 만들든지 해야지.”

“다음에 또 올게요.”

“일없어!”

브라인은 멀어지는 엔엔을 노려보다가 다시 귀를 막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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