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6화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길을 따라 걸었다. 방수포로 덮어둔 트레일러를 지나 천장이 낮은 건물 앞에 도착했다.
밀집한 제철소 건물들과 조금 떨어진 곳. 시끌벅적했던 소음도 없는, 아주 조용한 장소였다.
“들어와라.”
녹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로세로 4미터 남짓한 공간.
넓디넓은 제철소 건물을 보다가 이곳으로 오니 굉장히 좁게 느껴졌다.
안에는 아무런 도구도 없었다. 비바람을 막아줄 간이 벽만 세워둔 느낌이었다.
투발이 바닥에 놓인 천을 들쳤다. 먼지를 잔뜩 머금은 천 아래 낡은 나무 덮개가 있었다.
손잡이를 잡고 들어 올리니 밑으로 내려가는 사다리가 나왔다.
“높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내려와라.”
투발이 먼저 내려갔다. 밑에서 불빛이 올라왔다. 유등을 켠 듯했다.
조심스럽게 사다리를 밟고 내려갔다.
“바깥보다 덜 추울 거다. 그리고 여름에는 시원하지.”
투발이 앞으로 나아갔다. 주홍빛 불빛이 벽면을 따라 아른거렸다.
길은 완만한 경사로 밑을 향하고 있었다. 가하란은 벽면에 손을 댄 채 투발을 따라갔다.
“여긴 둔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있던 곳이다.”
“오래된 곳이네요.”
“그렇지.”
손바닥 크기만 한 벌레가 눈앞을 휙 지나갔다. 마른침을 삼키며 질문했다.
“여기가 무덤이라고 하셨죠?”
“그래. 강철의 무덤. 왜 그렇게 부르는지는 곧 알게 될 거다.”
투발의 등을 보며 쭉 걸었다. 곧게 뻗은 길 같았는데, 뒤를 돌아보니 굽어진 벽면이 보였다.
휘어진 길이구나. 제철소에서 멀어지는 걸까?
또다시 사다리가 나왔다. 길이는 2미터 정도. 점점 더 깊게 내려가고 있었다.
“숨차거나 그러진 않지?”
“네.”
“어지럽거나 몸에 힘이 빠지면 바로 말해. 좁고 어두운 곳에 들어오면 회까닥하는 애들이 종종 있더라.”
한 점으로 모이듯 조금씩 좁아지던 길이 어느 순간 넓어졌다. 힘껏 뛰어도 천장에 손이 닿지 않을 정도다.
“다 왔다.”
투발이 유등을 높게 들며 말했다.
가하란은 입을 살짝 벌렸다. 큼지막한 공동이었다. 제철소 밑에 이런 공간이 있다니.
“참고로 말해두는 건데 위쪽에 있는 건 제철소가 아니라 훈련장이다. 지반 점검 당시 이곳이 발견돼서 제철소 자리가 옮겨졌지. 뭐, 워낙 옛날 일이라 확실한 건 아니지만.”
입가에 손을 대고 크게 소리 지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런 곳에서 소리치면 메아리도 엄청나겠지?
“혹여나 큰 소리 낼 생각은 마라.”
“안 되나요?”
“벌레와 쥐 떼가 발밑으로 지나가는 꼴을 보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되고.”
참아야겠다. 가하란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저씨. 저게 다 뭐예요?”
너른 땅 군데군데 천으로 덮인 것들이 보였다. 늘어진 천의 형태로 보건대 아래 놓인 물건은 둥그스름할 것이다.
“궁금하면 직접 확인해 봐라.”
투발이 턱짓했다. 가하란은 가까이 있는 천으로 걸어갔다. 끝단을 강하게 움켜쥐고 있는 힘껏 당겼다.
처음에는 꿈쩍도 안 했지만, 계속 힘을 주자 서서히 천이 움직였다.
“…유사 정령인가요?”
“그래. 맞아.”
“근데 왜 이렇게 작죠?”
연구실에서 본 유사 정령은 의자를 놓고 올라가야 할 정도로 컸다.
하지만 앞에 놓인 유사 정령은 반구 형태만 닮았을 뿐, 크기는 상당히 작았다.
의자의 도움 없이도 위쪽에 올라갈 수 있을 정도.
“다른 것들도 전부 유사 정령인가요?”
“아닌 것도 있어. 근데 대부분은 유사 정령이지.”
강철의 무덤.
가하란은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기록에 의하면 처음 이곳을 발견했을 때는 이보다 더 많은 기계 장치들이 놓여 있었다고 하더라.”
이야기를 들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텅 빈 공간에 듬성듬성 천이 놓여 있다.
“쓸 수 있는 건 전부 가지고 나간 건가요?”
“맞아. 몇십 년에 걸쳐 하나씩, 하나씩 빼 갔지. 길을 하나 더 뚫어보려는 계획이 있었다는데, 위험해서 그만뒀다고 하더라.”
“그러면 여기 남은 것들은….”
“방치된 애들이지. 수많은 학자와 기술자, 마법사들이 이곳을 찾아왔다. 그때마다 평가가 이뤄졌고 가치 있는 물건들은 다 위로 가져갔지.”
무덤.
여기 있는 기계들은 버려진 것이다.
가하란은 옆에 놓인 유사 정령에 손을 올렸다. 왠지 안쓰러웠다.
“예전에는 여기도 나름 관리했다고 들었는데, 이제는 반기마다 쓱 내려와 살펴보는 게 전부야.”
“여기 있는 것들은 정말 못 쓰는 건가요?”
“녹여서 불순물을 걸러내는 비용조차 아까운 애들만 여기에 남았다. 현시대의 유사 정령은 금적철을 녹여서 만들었기에 존재만으로도 가치가 있지만, 여기 있는 애들은 아니야.”
투발이 곁으로 다가왔다.
“유사 정령을 만져본 적 있냐?”
“네. 매끈하면서도 까칠한 느낌이 들었어요. 따듯한 기운도 느껴졌고요.”
“그게 금적철의 특성이지. 지금 만지고 있는 건 어떠냐?”
가하란은 앞에 놓인 유사 정령을 쓰다듬었다. 차갑고 매끄럽다. 익히 만져온 쇠의 감촉이다.
“그냥 쇠예요.”
“그래. 연구자들이 그러더라. 새겨진 마력선도 별 의미 없는 것들이라고. 단순한 정보 처리만 가능해서 쓸모도 없고.”
“교수님이 그랬어요. 기술은 계속 발전해서 옛것들은 이제 쓸 수 없다고.”
투발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거시처럼 재현 못 하는 과거의 물건도 있지만, 대개는 골동품이 돼 가치를 잃어버리지. 특히나 거병에 쓰이는 마법공학품은 첨단 공학의 산물이야. 몇백 년 전 시대의 물건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지.”
지식은 더해지고 기술은 발전한다.
과거에는 찬란했을 용품도 시간이 지나면 볼품없는 물건으로 변하는 걸까.
“최근에 만들어진 유사 정령은 다양한 연산이 가능해지면서 부피도 커졌다. 이 자그마한 유사 정령에서 시작해 지금에 이른 거지.”
“이 유사 정령으로는 거병을 움직일 수 없겠네요?”
“내가 그쪽 방면에 전문가가 아니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못할 거다. 유사 정령은 거병의 뇌니까. 이런 작은 걸로는 운동 정보를 처리할 수 없겠지.”
가하란은 다른 곳에 놓인 천들도 당겨 보았다. 뽀얗게 먼지가 일어나며 유사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찬가지로 크기가 작았다.
“옛날에는 거병 크기가 작았던 걸까요?”
“문헌에는 그렇다고 하더라. 온전하게 남은 옛 거병이 없어서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현시대 학자들은 아주 단순한 인형이었을 거라고 추측하더라.”
“단순한 인형.”
가하란은 하늘을 떠받칠 것처럼 거대했던 거병을 떠올렸다. 그걸 인형이라 부르는 건 어울리지 않았다.
“그 커다란 마법공학품을 움직이려면 여러 장치가 필요하지. 뼈대만 잘 만든다고 해서 움직이는 게 아니거든. 체임버 안에 가해지는 압력과 하중, 그리고 접지압 문제. 각 관절과 장갑 사이의 윤활과 마디 운동 제어 문제.”
투발이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몸뚱이를 아무리 잘 만들어 봤자, 그걸 지탱해줄 마법이 없으면 거병은 한 발자국도 못 떼. 근데 이것들은 그 방대한 연산을 처리하기엔….”
말끝을 흐리는 투발이었다. 가하란은 유사 정령을 바라보며 투발의 말을 받았다.
“너무 작아서 안 되는 거네요.”
누군가가 공들여 만들었을 작품이 이제는 쓸 수 없게 되다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민 교수 말대로 여길 보여주긴 했는데, 어떠냐?”
가하란은 드넓은 공동과 그곳에 드문드문 놓인 유사 정령을 바라봤다.
“쓸쓸해요.”
유사 정령에 손을 올렸다. 둔을 지키는 거병들도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 버려지는 걸까.
“아저씨.”
“응?”
“좀 더 봐도 될까요? 다른 유사 정령들도 보고 싶어요.”
“오늘은 널 위해 시간을 낸 거니 마음 내키는 대로 해라.”
그렇게 말하며 벽으로 걸어가는 투발이었다. 오래된 의자 두 개를 붙여 간이침대를 만들더니, 그 위에 누웠다.
“근데 내가 좀 피곤하거든. 간밤에 일이 생겨서 잠을 못 잤단다.”
“그러면 주무시고 계세요. 조용히 있을게요.”
“시끄럽게 떠들어도 돼. 망치질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자는 게 나니까. 아! 마음껏 만지고 조금 부숴도 되지만 다치지는 마라.”
“조심할게요.”
투발이 팔로 눈가를 가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렁드렁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피곤했던 모양이다.
가하란은 볼록 솟은 천으로 다가가 안을 살폈다. 이번에도 버려진 유사 정령이었다.
표면에 흠집이 가득했다.
숨을 느리게 내쉬며 선으로 이뤄진 세계를 들여다봤다.
“…망가졌구나.”
이어져야 할 마력선이 흠집에 의해 단절됐다. 선이 담고 있는 이야기가 가닥가닥 끊긴 것이다.
조금 더 집중했다. 새겨진 마력선이 살며시 떠올랐다.
연구실에서 본 유사 정령과 마찬가지로 몇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눈앞에 있는 유사 정령은 층의 개수가 적다는 것이다.
여기는 끊어져 있고, 여기는 뭉개져 있고. 여긴 아예 지워진 건가?
눈을 살며시 감았다. 입체 모형으로 공중에 떠올랐던 마력선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나중에 내가 고쳐줄게.”
다른 유사 정령들도 살펴봤다.
상황은 비슷했다. 투발의 말대로 제 기능을 못 하는 상태였다.
현대의 체계화된 마력선은 그어진 형태만으로 기능을 알 수 있지만, 과거에 그려진 마력선은 모양만으로는 뜻을 알아내기 어렵다.
덴스 교수의 설명을 떠올리며 자리를 옮겼다.
언젠가 이 눈에 보이는 모든 선을, 정보를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면 다른 사람이 그려낸 마력선의 뜻도 읽어낼 수 있게 되는 걸까?
선이 감추고 있는 이야기들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알 수만 있다면 본래 모습으로 되돌려줄 텐데.
한때 누군가의 기쁨이었을, 누군가의 목표였을 작품들이 땅 밑에서 녹슬어 간다. 슬픈 이야기였다.
아저씨의 코 고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 공동의 끝자락이었다.
가하란은 앞에 놓인 천을 끌어당겼다.
“네가 마지막이구나.”
자그마한 유사 정령 앞에 쭈그려 앉았다. 유사 정령에 손을 얹고 선의 세계를 살펴봤다.
눈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더 쓰면 아주 뜨거워질 것이다.
짧게 살피고 돌아가려 했는데, 눈길을 잡아끄는 구석이 있었다.
단절된 층과 층.
그 사이에 놓인 선.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연결해야 할 지점은 알 것 같았다.
연구실에서 본 유사 정령의 마력선 형태와 동일했다.
그렇다는 건?
가하란은 손을 내밀었다. 살랑거리는 실을 붙잡아 아래층에 연결했다.
찾아올 변화를 대비했으나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냥 고장 난 건가?
그때였다. 최하층이라 생각했던 마력선 밑에서 무엇인가가 꿈틀거렸다.
옅은 빛이 보인다.
선의 세계에서만 보이는 빛이다.
읽어낼 수 없는 정보의 형태이나, 중요한 건 그곳에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점이다.
가하란은 그 빛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유사 정령의 단단한 표면이 손가락에 닿았다. 하지만 빛은 그보다 아래 있었다.
손가락에 조금 더 힘을 줬다.
빛무리가 밀고 들어오는 손가락을 막아내는 느낌이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강렬한 빛이 눈을 때렸다. 가하란은 눈을 가늘게 떴다. 손가락을 막던 빛무리가 흩어지며 새로운 형태로 바뀌었다.
빛의 덩어리가 가늘어지더니 선으로 변했다.
그 선들은 유사 정령의 표면을 타고 춤을 추며 온전한 그림을 그려나갔다.
마력선 도안.
베이스 소스라 불린 최초의 오토마타의 도안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눈이 지글지글 끓기 시작했다.
통증을 이겨내며 선이 안착하는 순간까지 지켜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가중연산 작업을 마쳤습니다. 보안 형식 변경을 수락했습니다.
탁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찢어지고 불안정했던 음성이지만 뒤로 갈수록 음색이 좋아졌다.
가하란은 유사 정령을 바라봤다.
“혹시… 네가 말한 거야?”
기다렸다는 듯이.
-네.
대답이 돌아왔다.
가하란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물었다.
“넌 누구야?”
검은 유사 정령은 한동안 침묵한 후 말을 건네왔다.
-저는 열일곱 번째 ‘화이트 폰’. 명명된 이름은 ‘카트시’입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