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165화 (138/558)

제165화

“이거 가져왔어요. 그때 아저씨가 주신 드라이버예요.”

가하란은 허리춤에 달아놓은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드라이버를 꺼냈다.

“안 버리고 잘 갖고 있었구나.”

“평생 안 버릴 거예요. 제 첫 공구니까요.”

“그렇게 말하면 내가 부담스러운데.”

아저씨가 손을 내밀었다.

“내가 그때 이름을 알려줬던가?”

“아니요. 안 알려 주셨어요.”

“투발이다. 네 이름은 가하란 맞지?”

“네.”

두 손으로 투발의 손을 붙잡았다.

“올란트가 점심 먹을 때면 네 얘기를 매일 해줘서 잘 알고 있지. 그때도 처음 봤는데 마치 몇 번이나 본 것처럼 익숙했고.”

투발이 셀베이아를 바라봤다.

“그쪽은 이름….”

“셀베이아입니다.”

“그래요. 오늘 하루 이 녀석 잘 데리고 다니다가 돌려보낼 테니 너무 걱정 마쇼.”

셀베이아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6시에 맞춰서 데리러 올게. 그때까지 여기 계신 분 말 잘 듣고 있어.”

“알겠어요.”

셀베이아가 떠나갔다.

가하란은 바닥에 깔린 레일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거대한 철제 지붕, 두꺼운 벽, 듬성듬성 튀어나온 파이프라인.

빛바랜 청색 멜빵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맑은 쇳소리와 둔탁한 파열음이 어지럽게 바닥에 깔리고 하늘로 올랐다.

하아, 가쁜 숨이 저절로 나왔다.

저번에는 입구만 구경하고 돌아갔는데, 이번에는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구나.

“그 표정, 네 아빠하고 똑 닮았네.”

투발이 뒷짐을 지며 따라오라고 말했다. 잽싸게 옆에 붙은 다음 고개를 쉼 없이 움직였다.

한 줄로 깔려 있던 레일은 정면에 있는 거대한 창고 앞에서 다섯 가닥으로 나뉘었다.

완만하게 휜 레일들은 각기 다른 건물로 향했다. 연구단지처럼 제철소 역시 여러 파트로 나뉜 것 같았다.

활짝 열린 쇠문 너머로 한 걸음 내디뎠을 때였다. 따끔한 열기가 얼굴로 훅 끼쳐왔다.

묵빛 수레에 환하게 빛나는 주홍빛 쇳물이 담겨 있었다. 쇠사슬이 쩔그렁 소리를 내며 수레를 잡아당긴다.

가하란은 두 손을 들어 얼굴을 살짝 가리고 움직이는 수레를 봤다.

“쇠를 녹인 건가요?”

“그래. 용광로에서 녹인 쇠다. 정확히 말하자면 철뿐만 아니라 다른 잡다한 것들도 같이 녹여낸 거지만.”

그르르릉, 철로 된 수레바퀴가 뻑뻑한 소리를 내며 눈앞을 지나갔다.

심장이 더욱 요동쳤다.

약간 시큼한 냄새, 귀를 아리게 하는 소리, 온몸을 덮쳐오는 열기.

말로 들었던 것보다 더욱 적나라하고 강렬했다.

“잠깐 이걸 껴라.”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말랑말랑한 물건이었다. 뭐에 쓰는 건지 몰라 투발을 바라봤다.

투발이 말랑한 물건으로 귓구멍을 막았다. 얼른 따라 했다.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며 투발이 움직였다. 머리 위로 거대한 쇠사슬이 지나갔다. 중간에 갈고리가 달려 있었는데, 큼지막한 자루가 매달려 있었다.

걸으면서 자루를 바라봤다. 커다란 용기 위로 올라간 자루에 칼을 찔러 넣는다. 자루가 터지며 고운 모래가 밑으로 쏟아졌다.

“사회석 더 가져와! 3번 라인으로!”

“거기 비켜요! 모가지 떨어지기 싫으면!”

육중한 기계음만큼이나 기술자들의 목소리도 컸다. 마법을 쓰는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쩌렁쩌렁하다.

두리번거리며 걷다가 콩, 하고 부딪쳤다. 투발의 다리가 앞에 보인다.

“앞 보고 걸어. 넘어지면 크게 다칠 수도 있으니까.”

“네!”

첫 번째 건물에서 나와 오른편에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상대적으로 조용한 곳이라고 생각했을 때, 쾅 소리가 귀를 때렸다.

놀라서 양손으로 귀를 막고 뒷걸음질 쳤다.

“놀랐지?”

투발이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가하란은 어안이 벙벙해서 한 박자 늦게 웃었다.

“저기서 난 소리다.”

투발의 손가락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였다.

거대한 망치. 생김새는 조금 다르지만 말로 설명하라고 하면 ‘거대한 망치’밖에 떠오르지 않는 기계였다.

자루를 지탱하는 굵은 쇠기둥이 양쪽에 박혀 있고, 망치는 시소처럼 앞뒤로 천천히 움직였다.

천장 가까이 올라간 망치 머리가 우뚝 멈추더니 이내 지면을 향해 원호를 그리며 떨어졌다.

카앙!

다시금 몸을 들썩거리게 하는 소리와 충격이 땅을 훑고 지나갔다.

“이제 귀마개를 빼도 된단다.”

투발을 따라 귀마개를 뺐다. 먹먹한 귀를 매만지며 거대한 망치 아래로 갔다.

회색 지지대 위에 검은색 광물이 올려져 있었다. 거대한 망치가 내려찍었는데도 울퉁불퉁한 형태를 유지 중이었다.

시선은 잡아당기는 쇳덩어리였다.

만져 보고 싶은 욕구를 겨우 참아내며 투발을 보았다. 설명이 필요했다.

“이게 탈로스다. 거병의 뼈대와 각 모듈, 그리고 외장갑에 두루두루 쓰이는 광물이지.”

수백 번은 들어온 합금.

거병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금속.

“만져봐도 될까요?”

“뜨거워서 안 돼. 네 여린 손가락 정도는 닿기도 전에 벌겋게 익어버릴 거다.”

아쉬운 마음에 탈로스만 바라봤다. 그렇게 뜨거워 보이지는 않는데.

“민 교수가 그러더라. 어려워도 상관없으니 이것저것 설명해 주라고.”

“저 듣는 거 좋아해요!”

“그러냐?”

투발이 검은 쇳덩이 곁으로 다가갔다. 가까워지니 알 수 있었다. 쇠에서 엄청난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걸.

“탈로스는 하나의 광물을 일컫는 말이 아니야. 여러 배합을 통해 만들어진 이런 합금을 보통 탈로스라고 하지.”

“아빠한테 들었어요. 나라마다, 제철소마다 다 다르다고.”

“금적철을 얼마나 넣느냐, 청철과 황동의 배합을 어떻게 하냐에 따라 다양한 탈로스가 만들어지지.”

투발이 검은 쇳덩이 상단을 가리켰다. 망치머리가 강타한 부분이다. 아주 약간 찌그러져 있을 뿐, 다른 곳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배합을 끝낸 쇠는 조형에 앞서 여기서 담금질을 한단다. 기름은 필요 없고 환기가 잘 되는 곳이면 어디든 괜찮지.”

“계속 두드리는 건가요?”

“그 역시 탈로스마다 다르다.”

투발이 위를 보라며 고개를 들었다.

“망치 머리에 뭔가 새겨져 있지?”

“네. 마력선인가요?”

“그래. 탈로스의 담금질은 특별해. 기름이나 물에 식히는 게 아니라 마나로 달래는 거지. 보기에는 투박해 보여도 참 섬세한 쇠거든.”

쇠를 달랜다.

재미난 표현이라 기억에 남았다.

“탈로스에 녹아든 금적철과 망치머리에 모여든 마나의 충돌. 이때 발생하는 강렬한 마나 파장이 배합된 금속을 더욱 단단히 결속하여 인장력을 높인단다. 동시에 표면경도가 높아지고 강도 자체도 좋아지지.”

이해되는 단어는 받아들이고 모르는 건 일단 기억해 뒀다.

“내가 말재주가 좋지 않아 쉽게 설명은 못 하겠다. 사실 우리끼린 이런 말도 잘 안 써. 대충 이렇게 말하지. ‘아주 딴딴하네’, ‘빌어먹게 무르네’라고.”

투발이 뒷짐 지며 다시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망치 머리가 서서히 들렸다. 귓가에 손을 대며 부랴부랴 움직였다.

건물 밖으로 나와 조금 걷자, 또다시 청명한 쇳소리가 등 뒤에서 터져 나왔다.

거병을 만들어내는 소리.

심장을 들뜨게 하는 소리.

“울지 않아서 다행이네. 구경하고 싶다고 떼쓰는 애들도 여길 보여주면 무섭다고 도망치기 바쁜데.”

“이렇게 재미난 걸 두고 도망쳐요? 이상하네요.”

“그렇지? 하여간 등 따습고 배부른 놈들의 애새끼들은 겁이 너무 많아.”

킥킥 웃던 투발이 아차 싶은 얼굴로 가하란을 바라봤다.

“아저씨가 입이 좀 거칠어. 안 좋은 말이 나오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라.”

“골목에 사는 할아버지보단 입담이 순하신걸요? 그 할아버진 아침 인사가 ‘안 뒈졌네’거든요.”

“…그건 좀 너무하구나.”

투발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걸음을 뗐다.

“다음엔 뭘 보러 가나요?”

“네가 가장 신기해할 만한 것.”

앞서 본 건물보다는 조금 작은 곳이었다. 네모반듯하게 세워진 회색 벽.

바닥에 깔린 레일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희미한 빛이 스며들어 건물 안을 밝혔다.

강철 손.

거병의 손처럼 거대한 손이 사슬에 걸려 공중에 떠 있었다. 두꺼운 사슬은 천장을 가로지른 쇠를 한번 감고 바닥으로 내려와 말뚝에 고정됐다.

“거병의 손인가요?”

“아니. 그랑겔의 건틀릿이다.”

그랑겔?

투발이 멜빵 벨트에 걸어놓은 장갑을 손에 꼈다.

“이 장갑이 뭔지 아냐?”

“마나밀도 감각장갑, 맞나요?”

“그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용도가 조금 다르지만 만들어준 분은 같거든.”

“엔엔 님께서 만들어주신 거네요.”

“잘 알고 있구나.”

장갑을 낀 투발이 오른쪽 벽에 다가갔다.

벽면에 두꺼운 외투가 걸려 있었다. 외투에는 굵은 선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데, 어디선가 본 형태였다.

“그 선, 커넥터인가요?”

연구실에서 본 커넥터보다는 가늘지만, 표면 생김새가 비슷했다.

“민 교수 말대로 아는 게 많구나. 네 말대로 커넥터다. 이게 뭘 하는지도 알고 있겠지?”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설명보단 보여주는 게 낫겠군.”

투발이 소매에 팔을 찔러 넣었다. 외투에 달린 후드를 눌러쓰고 손목 부위와 장갑을 연결했다.

“가하란. 거병이 얼마나 큰지 봤겠지?”

“네! 하늘에 닿을 것처럼 커요.”

“각 모듈조차 사람이 어찌하지 못할 정도로 크지. 그렇다면 그 커다란 물건을 어떻게 매만지고, 결합하며, 분해할까?”

몸을 훑고 지나가는 기이한 힘을 느꼈다. 이 감촉이 무엇인지, 가하란은 알고 있었다.

마나 파장. 혹은 마법 파장.

투발이 기지개를 켠 다음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별다른 변화는 없지만 몸을 덮치는 파장의 간격이 짧아지고 있었다.

보이는 세계가 아닌,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가하란은 눈동자에 의식을 집중했다. 한순간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변했다.

일렁거리는 선들.

조금 더 집중했다. 제멋대로 날뛰던 선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정보의 형태로 변했다.

선과 사물이 겹쳐 보이지만 어지럽지는 않았다.

커넥터를 타고 이동하는 마나가 보였다. 모노클을 썼을 때처럼 선명하진 않지만, 선으로 변한 마나가 꾸물꾸물 움직이는 건 확인 가능했다.

땅을 바라봤다. 바닥을 이루는 선들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커넥터가 보였다.

마나는 말뚝으로 이동해 사슬을 타고 천장에 걸린 거대한 팔을 휘감았다.

“그랑겔은 야장(冶匠)의 신이라고 불렸다. 실존하는 신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우린 저 팔을 그랑겔의 유산이라 부르지.”

투발이 손가락을 활짝 폈다.

천장에 달린 건틀릿이 굉음을 내며 움직였다.

아름답다.

건틀릿을 이루는 선은 마치 예술 작품처럼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유사 정령의 베이스 도안처럼, 흠결이 없어 보였다.

건틀릿이 투발의 손짓에 맞춰 움직였다. 가하란은 눈을 살며시 감았다가 떴다.

선의 세계가 사라지고 육중한 쇳덩이가 망막을 장식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전율에 휩싸인다.

실에 엮인 인형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던 건틀릿이 한순간 축 늘어졌다.

투발이 외투를 벗는 게 보였다.

“나도 썩 괜찮게 다루지만, 너희 아빠는 이걸 완벽하게 주물렀다.”

“아빠가요?”

“손재주가 대단했지. 연구실로 안 갔으면 최연소 치프에 이은 야장의 호칭을 받았을 텐데. 뭐, 거기서도 잘할 테지만.”

투발이 어깨를 빙빙 돌렸다. 잠깐 움직인 것만으로도 꽤 피곤하다는 듯이.

“이건 내가 보여준 깜짝 선물이고, 이제 민 교수가 부탁한 걸 보러 갈 차례다.”

그랑겔의 건틀릿만으로도 만족했는데, 남은 게 더 있다니.

“따라와라. 강철의 무덤을 보여줄 테니.”

투발이 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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