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그러게 처음부터 우리가 돌봤어야 한다니까. 괜히 애만 고생하고.”
“그쪽 교수도 뭔가 사정이 있겠지.”
“사정이야 다들 있겠죠. 그래도 애를 책임지겠다고 했으면 약속은 지켜야지. 짐 빼서 이사까지 시켰더니….”
어른들이 한데 모여 얘기 중이었다. 가하란은 틈 사이로 끼어들었다.
“저 괜찮아요. 교수님도 미안하다고 하셨고요.”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어른들이 옅은 한숨을 내쉰 뒤 미소를 지었다.
“가하란. 할머니 앞으로 와봐.”
곁으로 다가가자 파훈 할머니가 꽉 안아주었다.
“차라리 잘됐어. 여기만큼 사람 살기 좋은 곳 없으니까. 할머니 얼굴도 매일 볼 수 있고, 좋지?”
“네. 좋아요.”
가하란은 해죽 웃은 다음 어른들을 돌려보냈다. 시끌벅적하던 집 앞이 다시 조용해졌다.
“잠깐이나마 골목 떠나서 좋은 집에 살아보니 어때?”
자리에 남은 웰턴이 질문했다.
“좋았어요. 따뜻하고 조용하고.”
“그래?”
“근데 너무 조용했어요. 한 번은 툴이 크게 짖었는데, 관리인 아주머니가 찾아와서 경고하고 갔어요.”
가하란은 뒤를 돌아봤다. 살던 집으로 돌아온 게 기쁜지, 툴이 방방 뛰고 있었다.
“여긴 툴이 짖는다고 화내는 사람 없으니까.”
“맞아요.”
“그리고 이거.”
웰턴이 종이를 내밀었다. 읽어보라는 말에 접힌 종이를 펼쳤다.
익숙한 필체. 아빠가 보낸 편지였다.
“올란트가 둔으로 가는 상단한테 맡긴 거야. 너희 아빠는 무사히 이동 중인 것 같더라.”
웰턴의 말을 들으며 편지를 살폈다. 꾹꾹 눌러쓴 글씨가 아빠의 손길 같아 반가웠다.
길지 않은 내용이었으나 불안감을 녹이기에는 충분했다.
“아빠가 계신 곳은 여기보다 눈이 더 온 것 같아요. 발목까지 잠겼다고 쓰여 있어요.”
“여기나 거기나 눈 때문에 난리도 아니지.”
“그리고 새하얀 여우도 보셨대요. 눈처럼 흰 털이 정말 예뻤다고.”
“흰여우라. 나중에 올란트와 같이 가서 보면 되겠네.”
“네. 아빠도 그렇게 써놨어요. 저랑 같이 보고 싶다고.”
푸슥, 소리와 함께 지붕에 눌러앉아 있던 눈들이 땅으로 떨어졌다.
눈보라는 그쳤지만 쌓인 눈은 녹을 기미가 안 보였다.
“아빠한테 편지를 보낼 순 없겠죠?”
“힘들 거야. 마을에 정착했다면 상단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지만, 지금은 한창 움직이고 있을 테니까.”
“그러면 나중에 써야겠네요.”
편지를 곱게 접어 품 안에 넣었다.
“이제 너랑 놀아줄 사람은 나 말고 없나? 마침 나도 눈 때문에 일 쉬는데, 눈사람이라도 만들래?”
웰턴이 눈을 작게 뭉치며 물었다.
가하란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저씨랑 놀고 싶은데 먼저 한 약속이 있어요.”
“그, 그래.”
웰턴이 손에 든 눈 뭉치를 저 멀리 던져버렸다.
“다음에 만들면 되니까. 아저씨 실망한 거 아니다. 나 그렇게 유치하지 않아.”
가하란은 웰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저씨.”
“응?”
“고맙습니다. 저 챙겨주셔서.”
“…고맙긴.”
머쓱한 얼굴로 턱을 매만지는 웰턴이었다.
“근데 저 정말 괜찮아요. 아빠랑 처음 헤어졌을 때는 진짜 무서웠는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아요.”
“정말 아무렇지 않아?”
“…조금 외롭고, 아주 조금 무서워요. 그래도 괜찮아요. 절 생각해주는 사람이 많다는 걸, 이제는 알거든요.”
“철이 들어도 너무 들었다. 응? 나보다 더 어른이야.”
웰턴이 가하란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매번 하는 말이지만 필요한 일 있으면 고민하지 말고 아저씨 찾아와. 알겠지?”
“네! 그렇게 할게요.”
“대답은 잘하는데 매번 안으로 삼키는 것 같아 걱정이다.”
“저 안 그래요. 무슨 일 생기면 아저씨한테 제일 먼저 달려갈게요.”
“그래 주면 정말 고맙겠네.”
웰턴이 빙긋 웃으며 골목 끝을 바라본다.
“약속이 있다더니, 저 사람이구나.”
“네.”
가하란은 멀리서 걸어오는 셀베이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 저 가볼게요.”
“그래. 눈 쌓인 곳은 가지 말고. 뛰다가 넘어지지도 말고.”
“네!”
“근데 오늘도 군부로 가는 거야?”
“아니요. 오늘은 다른 곳으로 가요. 민 교수님께서 저한테 주신 선물이 있거든요.”
“선물?”
궁금해하는 웰턴에게 눈웃음 지은 다음 앞으로 뛰어나갔다.
“이따가 돌아와서 말해 드릴게요!”
“그래. 잘 들어줄 테니까 선물인지 뭔지 잘 받고 와. 조심하고!”
* * *
“발가락 얼겠네.”
“난 이미 얼었어.”
“이러고 있으니까 훈련 때가 생각나네. 로운, 기억나? 너 참호 파다가 귀찮아서 대충 누웠다가 입 돌아갈 뻔했잖아.”
“그땐 추운 것보다 잠이 우선이었어.”
낮은 텐트 안에서 옛 얘기를 주고받았다. 밀레나는 따뜻한 과일주를 한 모금 마시다가 고개를 들었다.
정에 연결해놓은 줄이 헐거워졌는지, 천장이 조금 내려앉았다.
“보고 올게.”
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같이 가겠다는 율에게 됐다고 말한 후 밖으로 나왔다.
팅팅, 소리를 내며 줄 달린 정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줄이 헐거워진 게 아니라 언 땅에 박아놓은 정이 빠진 것이었다.
군화로 정을 지지한 후 망치로 힘껏 내리쳤다. 깡 소리와 함께 불티가 튀어 오르고 정이 땅 깊숙이 박혔다.
“애들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몸을 틀었다. 방한복을 손에 들고 있는 민 교수가 보였다. 몸에서 김이 솟구치고 있었다.
“안에 있습니다. 그보다, 어디 다녀오신 거예요?”
“잠깐 운동할 겸 옆에 다녀왔어.”
옆. 밀레나는 울창한 숲을 바라봤다. 흰색으로 뒤덮인 그곳은 운동 목적으로 방문하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해 보였다.
하지만 민 교수라면 상관없겠지.
곰과 마주쳐도 맨손으로 때려잡을 사람이니까.
“좀 걷자.”
민 교수가 방한복을 입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밀레나도 털모자를 쓴 뒤 민 교수를 쫓아갔다.
“애들 상태는 어때?”
“다들 좋습니다. 혹한기 훈련은 매해 해왔으니까요.”
“요즘도 눈밭에 던져놓고 일주일간 버티라고 하니?”
“네. 훈련 당시 교관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변치 않는 스콜라의 유구한 전통이라고.”
“전통까진 아니야. 그거 내가 처음에 시킨 거니까.”
“…….”
“왜 그런 눈으로 봐?”
“좋아서요. 혹한기 훈련을 가장 좋아했거든요.”
“차라리 대놓고 욕을 하는 게 어때?”
“정말 그래도 될까요?”
민 교수가 풋 웃었다.
“방금 말투는 필렌하고 똑같았어. 역시 피는 못 속이네.”
벼락 맞아 반으로 쪼개진 나무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았다.
저 멀리 소 두 마리를 끌고 가는 노인이 보였다. 흰 눈밭을 가로지르는 모습이 장엄하기까지 하다.
“필렌, 너희 엄마의 뒤를 쫓고 싶다고 했지?”
“예.”
“그러면 저 노인을 잘 봐둬. 네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니까. 아무런 도움 없이, 이정표도 없는 곳을 스스로의 힘으로 나아가야 해. 여간 고된 일이 아니야.”
“그래도 해볼 겁니다. 그래서… 언젠가 블루아이를 넘겨받을 거예요.”
“블루아이.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
밀레나는 민 교수의 옆얼굴을 보며 물었다.
“벨솔 교수님께 들었습니다.”
“뭘?”
“블루아이와 민 교수님에 관한 얘기를요.”
“내가 블루아이를 길들일 뻔했지만, 결국 필렌한테 뺏겼다는 그 재미없는 얘기?”
“그렇게까지는 말씀 안 하셨어요.”
“뭐 어때. 그게 사실인데. 그땐 억울해서 잠도 안 왔어. 난 스콜라 우등교관에 실력도 검증받은 기사인데, 그 애한테 블루아이를 줘야 했으니까.”
민 교수가 팔짱을 꼈다.
“하지만 억울한 감정도 길게 가진 않았어. 변명할 구석이 없었거든. 당시 엔첸세는 이름난 가문도 아니었고, 그 애는 로비가 아닌 실력으로 블루아이를 가져간 거니까.”
“교수님. 그 당시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어떤 사람? 음, 뭐라고 말하기가 힘드네. 인상이 많이 달라졌으니까. 첫인상은 허약한 인형 같았어. 패기도 고집도 욕심도 없는, 사람 손에 휘둘리는 게 당연한 듯한 멍청한 여자애.”
민 교수가 밀레나를 바라봤다.
“악의가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야. 솔직한 감상일 뿐이니까.”
“다른 분들도 다 그러셨어요. 과거의 어머니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고.”
“그랬던 필렌이 확 바뀌었지. 눈에 독기를 품었어. 욕심을 내고 원하는 걸 쟁취했지. 싸움을 아는 애가 됐어. 피하지도 않고 대들고. …그게 마음에 들었지. 싸가지는 없지만, 멋있었으니까.”
싸가지가 없다는 말.
다시 들어도 웃음이 나온다.
절친하기에 가능한 말이니까.
“나중에 보게 되면 내 말 전해줘. 블루아이 타기 버거우면 나한테 넘겨도 된다고.”
“죄송하지만, 그 아이가 교수님에게 갈 일은 없을 거예요. 제가 받을 거니까요.”
“쉽지 않을걸? 그거 길들이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니까.”
“해낼 겁니다. 전 하기로 했으면 반드시 해야 속이 풀리니까요.”
민 교수가 소리 죽여 웃었다.
그쳤던 눈이 또 내리기 시작했다. 정말 지긋지긋한 눈이었다.
하늘을 바라보던 민 교수가 나직이 말했다.
“걔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가하란이라면 괜찮을 거예요.”
“어떻게 알았어? 내가 누굴 걱정하는지.”
“느낌이요.”
밀레나는 어깨를 으쓱거린 다음 말을 이었다.
“사실 저도 살짝 걱정했거든요. 인사만 겨우 하고 헤어져서.”
“둘이 꽤 친했지?”
“친한 것도 친한 건데, 제자가 스승 걱정하는 마음이죠.”
“체스 얘기?”
“네.”
손으로 앞 머리카락에 붙은 눈을 털어냈다.
“외롭지 말라고 나름 선물을 준비해 뒀는데, 막상 얘기할 때 보니까 크게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더라.”
민 교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애가 속이 단단해진 느낌이었어. 원래부터 물렁물렁한 녀석은 아니었는데, 하루 만에 인상이 달라졌지.”
밀레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느꼈어요. 웃는 건 평소와 다름없는데, 뭔가 깊이감이 느껴졌어요. 이상하죠? 한참 애인데.”
“오히려 애라서 휙휙 바뀌는 걸지도 몰라.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무슨 일을 겪었다거나.”
“그 짧은 시간에요?”
“충격의 강도는 시간에 비례하지 않아. 찰나에도 사람이 바뀌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어. 필렌이 그랬던 것처럼.”
해맑게 웃던 가하란을 떠올렸다.
그 애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만약 있었다면 고통이 아닌 즐거운 일이었길, 밀레나는 먼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교수님. 그런데 어떤 선물을 남기신 건가요?”
“그 애가 환장할 선물.”
“환장할 선물이요?”
민 교수가 미소 지으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 * *
“여긴 멋대로 돌아다니면 정말 위험하니까 어른들 말 잘 들어야 해.”
“알겠어요, 누나.”
“정말이야. 위험한 물건이 사방에 깔려 있으니까 진짜 조심해야 해.”
“진짜로 조심할게요.”
몇 번이나 당부하던 셀베이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여길 구경하는 게 그렇게 좋아?”
“여기만큼 신나는 곳도 없어요.”
“나는 잘 모르겠다. 이 연기 나고, 뜨겁고, 위험한 곳이 왜 즐거운지.”
셀베이아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눈을 흩뿌리는 하늘을 가로지르며 두꺼운 증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거병제철소.
아빠가 일하던 장소.
위험해서 브라인의 통행증으로도 통과할 수 없었던 곳.
“민 교수가 말한 꼬마가 너였구나. 나 기억하냐?”
가하란은 마중 나온 아저씨를 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