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밀리언은 칼을 내려놓고 조리실 밖으로 이동했다. 가하란도 뒤따라갔다.
가게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당황한 네일라가 보였다. 셀베이아도 그 옆에 있었다.
서둘러 가게 밖으로 나갔다.
가게 앞에 고기와 채소가 나뒹굴었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덩치 큰 말과 엎어진 짐수레.
아무래도 사고가 난 것 같았다.
털모자를 쓰고 망토를 두른 남자가 쩔뚝거리며 다가왔다.
“미안합니다. 방향을 꺾어보려 했는데 늦었군요. 몸은 괜찮으십니까?”
말의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마흔 초반에 입가를 다 덮을 정도로 수염을 길렀다.
“저는 괜찮습니다만….”
셰프와 같은 복장을 한 남자가 멍한 눈으로 나뒹구는 식료품을 바라봤다. 밀리언과 같이 일하는 요리사 같았다.
“돈, 몸은?”
밀리언이 다가서며 물었다. 돈이라 불린 남자는 몸은 멀쩡하다며 말한 뒤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털모자를 쓴 남자가 가게를 쓱 바라봤다.
“요정의 안뜰이군요. 오너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체이스라 합니다. 성도 거병관리국에서 일하고 있죠.”
남자, 체이스가 털모자를 벗으며 손을 내밀었다. 밀리언이 그 손을 가볍게 쥐었다.
“서두르는 바람에 사고가 생겼습니다. 수습하고 변상하는 게 마땅한 수순이지만….”
한쪽 눈을 찡그리는 체이스였다. 낙마했을 때 크게 다친 모양이다.
“여기. 내가 가지고 있는 돈 전부입니다. 정말 미안합니다만, 차후에 찾아와서 제대로 보상하겠습니다.”
밀리언이 돈주머니를 받으며 말했다.
“용무 마치시고 몸을 돌본 뒤에 찾아오시죠. 이 앞은 저희가 정리할 테니.”
“고맙습니다.”
체이스가 말에 올라탔다. 투레질하던 말이 눈발을 뚫고 저 멀리 나아갔다.
“셰프님. 이대로 보내도 괜찮은 거예요? 오늘 들어오는 물건, 한두 푼이 아니에요.”
네일라가 다가와서 말했다.
“돈 문제라면 저분이 돌아와서 해결해줄 거다.”
“믿을 수 있어요?”
“괜찮을 거다. 신분은 확실하니까.”
“…아는 분이세요?”
“아니. 하지만 안에 찬 휘장을 봤다. 꽤 높은 직급이야. 문제를 일으키면 손해를 볼 관료이니 마무리 지으러 돌아올 거다.”
밀리언이 돈주머니를 네일라에게 던졌다. 네일라가 그 안을 살폈다.
“셰, 셰프님. 이 돈이면 보냉 처리한 해산물을 최고급으로 들여올 수 있겠는데요?”
“피해 본 만큼만 정확히 계산해서 그 돈으로 결제해. 나머진 손님이 돌아오면 돌려줘야 하니까.”
밀리언이 널브러진 음식 재료를 주워 담기 시작했다. 가하란도 뒹구는 토마토를 주워 바구니에 담았다.
“옆에 터졌는데, 어쩌죠?”
가하란이 물었다.
“성치 않은 재료를 돈 받고 팔 수는 없지. 이렇게 된 거 색다른 요리를 해보자. 셀베이아 씨도 도와주시겠습니까?”
양손에 고구마를 든 셀베이아가 물론이죠, 라고 대답했다.
가하란은 바닥에 떨어진 음식 재료를 주우며 곧게 뻗은 도로를 바라봤다.
아까 그 아저씨는 왜 그렇게 서두른 걸까? 눈보라가 심해서 앞도 잘 안 보이는데 말까지 타다니.
왼손에 길쭉한 호박을 든 채 오른손으로 머리에 내려앉은 눈을 털어냈다.
화가 많이 난 하늘은 계속해서 눈을 뿌려댔다. 문득 아빠 생각이 난다.
아빠가 있는 곳에도 눈이 오고 있겠지?
* * *
국장의 호출을 받고 관리국으로 가는 길에 비일을 만났다. 민은 뺀질거리며 웃는 비일에게 질문했다.
“뭐 들은 거 있어?”
“아니요. 교수님은요?”
“나도 없어.”
민은 비일을 노려봤다.
“혹시 사고 친 거 있으면 미리 말해.”
“제가 무슨 철부지 애도 아니고 사고를 칩니까.”
“애 맞잖아. 스무 살 넘어도 철이 안 든 애.”
“저 정신 똑바로 차렸어요. 정말입니다. 애들 교육할 때 보셨죠?”
“정말 아무 일 없는 거야?”
“믿어주세요.”
민은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국장의 갑작스러운 호출. 반갑지만은 않았다.
“들어가시죠.”
비서의 안내를 받으며 국장실로 들어갔다. 후끈한 열기에 안구가 금방 건조해졌다.
밖에 펑펑 내리는 눈발이 살짝 그리워질 정도로 실내 온도가 높았다.
민은 국장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를 봤다. 다듬지 않은 수염. 머리도 산발했다.
두툼한 신과 한쪽에 걸려 있는 망토. 멀리서 온 손님 같았다.
“민 교수, 왔는가.”
차라트라 국장이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비일에게 턱짓하며 소파로 걸어갔다.
“국장님이 아니라 이쪽에 계신 분이 용무가 있으신 거 같네요.”
민은 정면에 앉은 남자를 보았다.
“체이스입니다. 성도 거병관리국, 운동지각개발 팀장을 맡고 있습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한창 바쁘실 텐데, 여긴 어쩐 일로?”
체이스가 국장과 시선을 교환한 다음 품 안에서 편지를 꺼냈다.
“팀원들보다 앞서 이곳에 온 이유입니다.”
새하얀 편지 봉투였다. 받아서 뒤쪽을 살폈다. 붉게 발린 실링 왁스에 아무런 문양도 없었다.
문장이 새겨지지 않은 실링 왁스.
민은 슬쩍 눈을 들어 체이스를 바라봤다.
“확인하시죠.”
뜯고 싶지 않은 편지다. 마음 같아서는 저기 지글지글 타들어 가는 난로 속에 던져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지.
실링 왁스를 떼어내고 편지를 꺼냈다.
아.
이럴 것 같더라니까.
-오랜 친구인 민 크알데 교수에게.
오랜 친구란 문구부터가 글러 먹었다. 이 사람과 우정을 나눈 적이 없으니까.
옆에 앉은 비일이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옆에 이 친구도 함께 호출했다는 건 같이 봐도 된다는 뜻이겠죠?”
“죄송합니다만, 편지 내용은 교수님만 확인해 주시죠. 그 뒤에 필요한 내용을 써전에게 전하면 됩니다.”
체이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당연한 일인가.
이 서신은 아무나 볼 수 없었다. 편지를 쓴 남자가 높아도 너무 높은 곳에 앉아 있으니까.
작게 한숨을 내쉰 후 편지를 읽었다. 그 남자답게 인사는 짧았고, 본문은 더욱 짧았다.
민은 편지와 봉투를 들고 난로 앞으로 걸어갔다. 불길 속으로 편지를 던졌다.
재로 변해 사라진 종이를 확인한 후 자리로 돌아왔다.
“준비할 시간은 있나요?”
“정말 죄송합니다만, 지금 출발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럴 것 같았어요.”
민은 차라트라 국장을 바라봤다.
“교육을 받고 있는 스콜라 생도들도 데려가야 해요.”
“그렇게 하게.”
“제가 처리해야 할 일이 몇 개 있어요. 부재중에 문제가 생길 것 같은데…….”
“염려 말게. 민 교수 이름에 오점이 남지 않도록 내가 처리할 테니. 체이스 팀장도 도움을 줄 거라고 했으니 걱정 말고.”
이미 결정된 사안이었다.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국가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처지인데, ‘이 남자’의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지.
“식구가 한 명 있어요. 걔한테 대충 사정을 설명한 다음 바로 출발할게요.”
“그러시죠.”
자리에서 일어나 체이스와 악수한 뒤 국장실을 빠져나왔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비일이 뒤따르며 물었다.
“다 들었잖아. 얼른 가서 성도로 갈 준비를 해.”
“밖에 눈 잔뜩 오는 건 알고 계시죠?”
“그래서?”
“뭐, 그렇다고요. 근데 왜 갑자기 성도행이에요? 전 이곳으로 훈련지원을 온 건데.”
“훈련 중인 스콜라 생도들도 같이 귀환할 거니까 됐네.”
멈춰 서서 뚱한 표정을 짓는 비일이었다. 민은 비일을 멀거니 바라봤다.
“준비 안 해?”
“제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놈이라지만 그래도 사정을 알려줘야죠. 겨우 둔에 적응했는데.”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그 인간이 널 지목했지만, 네가 싫다는데 어쩌겠어.”
비일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인간? 편지 쓴 사람 말하는 거죠?”
“그래.”
“누군데요?”
“누구겠어. 망할 아르드헨이지.”
짜증이 확 솟는다.
민은 혀를 내두르며 복도를 걸어갔다. 뒤따라와야 할 비일이 저만치 떨어져서 눈만 깜빡이고 있다.
“뭐 해!”
비일이 헐레벌떡 다가왔다.
“누, 누구라고요?”
“젊은 놈이 벌써 귀가 먹었어? 나보다 스무 살은 어리면서.”
“정확히는 열아홉일걸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 아….”
비일이 주변을 살폈다.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황송하다는 표정이다.
“황제 폐하를 말씀하신 거예요?”
“둔 거병관리국 국장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아르드헨이 제국에 또 있나?”
“어허! 교수님! 거, 말씀 좀!”
비일이 양손을 휘휘 저으며 크게 외쳤다. 맞은편에서 지나가던 관료가 이상한 눈길로 쳐다본다.
“왜? 듣는 귀 없는 곳에서는 나라님 욕하는 게 당연한 건데.”
“듣는 귀가 왜 없어요. 사방이 사람인데!”
“아무튼 그 인간이 우릴 불러들였어. 성도 거병관리국 쪽에 일이 생겼대.”
“일이요?”
“테스트할 게 하나 생겼나 봐.”
“소문으로만 돌던 시험기일까요?”
“모르지. 나야 그쪽에 관심 끊은 지 오래니까.”
민은 비일의 얼굴을 뜯어봤다.
촐싹거리는 애지만, 실력만큼은 우수했다.
거병 한 기를 반파시켰는데 목이 안 잘릴 정도의 실력. 게다가 다시 불러서 검사를 맡길 정도의 실력.
필렌 이후로 이만큼 거병을 잘 다루는 인간은 없지 않을까?
“폐하께서 아직 화가 덜 풀리신 걸까요? 기어이 절 죽이시려는 걸까요? 젠장. 그냥 도망칠 걸 그랬나. 얀스 말대로 제국을 떠서…….”
주절거리는 비일을 한심하게 쳐다봤다.
“배짱 좀 키워라. 실력에 걸맞게.”
“저도 민 교수님처럼 당당해지고 싶어요. 근데 지은 죄가 있다 보니….”
“이번에 돌아가면 확실한 성과를 내. 그 죄를 훌훌 털어버릴 정도로.”
건물 밖으로 나왔다.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난 우리 집 애 좀 만나고 올게.”
“가하란 말하는 거죠?”
“어. 그 애한테는 미안하게 됐네. 내가 맡아주기로 했는데.”
“어쩌시게요?”
“골목 사람들한테 다시 부탁해야지. 원래도 거기서 맡아주기로 한 거니까 크게 문제될 건 없을 거야.”
“가하란이 많이 섭섭해하겠네요.”
“…못난 어른이 죄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넌 생도들 챙겨서 성문으로 와. 나도 그쪽으로 합류할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말하고 마차 준비시켜 놓을게요.”
“부탁할게.”
* * *
“반죽이 질었어요.”
“난 괜찮던데.”
“에이, 정말요?”
“살짝 물컹거리긴 했어. 그래도 맛은 좋았어.”
셀베이아가 웃으며 말했다. 가하란은 양손에 든 바구니를 흔들며 앞으로 나아갔다.
“밀리언 아저씨가 다음에 또 찾아오라고 했어요. 간단한 요리를 가르쳐 준다고.”
“잘됐네. 배우게 되면 나중에 나한테도 만들어줘.”
“네! 브라인 님 것도 같이 만들어 볼게요.”
바구니를 살짝 들어 얼굴을 때리는 눈을 막을 때였다. 셀베이아가 걸음을 멈췄다.
“저분이 여긴 왜….”
가하란도 앞을 보았다. 중앙부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민 교수가 있었다.
“가하란, 할 얘기가 있어.”
민 교수가 차분한 목소리를 꺼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