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162화 (135/558)

제162화

밀리언이 어깨에 쌓인 눈을 툭툭 털어냈다.

“셰프님. 오늘 댁에서 쉬시는 거 아니었어요?”

네일라의 물음에 밀리언은 연한 미소를 지었다.

“쫓겨났어.”

“네?”

“에나가 가게 나가서 내일 쓸 식자재 확인하라고 다그치더라. 등쌀에 떠밀려서 온 거니까 이상하게 보진 마.”

“그렇다는 건….”

밀리언이 왼손을 목덜미에 얹었다. 머쓱한 표정 사이로 기쁨이 느껴진다.

“둘 다 무사해. 아내도, 아기도.”

“축하드려요!”

네일라가 양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얌전히 대화를 듣고 있던 가하란도 살며시 다가가 말했다.

“아저씨, 축하해요!”

“고맙다.”

크고 두꺼운 손이 머리에 얹어졌다. 밀리언이 셀베이아를 바라봤다.

“셀베이아 씨. 오늘 예약이었죠?”

“네.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정말 축하드려요. 부인과 아기, 둘 다 건강한 거죠?”

“아무 탈 없습니다. 아기는 우렁차게 울더라고요.”

“아들인가요?”

“아니요. 딸입니다. 그 자그마한 녀석을 보자마자 알겠더라고요. 다행히 절 안 닮았다는 걸.”

가하란은 곰 같은 밀리언을 올려다봤다. 저번에 봤을 때와 또 다른 얼굴이다. 무뚝뚝한 요리사는 없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남자가 있었다.

“가게에 사정이 있다는 걸 미리 알렸어야 했는데, 저희가 늦었군요.”

“아니에요. 경사스러운 날인데 그럴 수 있죠. 다음에 다시 올게요.”

밀리언이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오신 김에 식사하고 가시죠. 예약은 편안한 날짜로 다시 잡아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밀리언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짓고 조리실로 걸어갔다. 네일라가 테이블 쪽으로 손짓했다.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가볍게 마실 수 있는 걸 내올게요. 추운 날씨에 딱 알맞은 음료가 있어요.”

가하란은 자리에 앉아 조리실을 바라봤다. 입구만 보일 뿐 안쪽 상황은 보이지 않았다.

저 안에서 맛있는 음식이 만들어지는 거겠지.

높이가 있는 의자라 발이 지면에서 떨어졌다. 발장구를 살짝 치며 조리실 쪽을 계속 쳐다볼 때였다.

“주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

네일라가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컵 귀에 예쁜 문양이 새겨져 있다.

“볼 수 있나요?”

“셰프님이 허락하면 볼 수는 있어. 애들한테는 아주 상냥하신 분이니까 아마 허락할 거야. 구경하고 간 애들도 꽤 많고.”

기대감이 부풀어 오른다. 맞은편에 앉은 셀베이아가 살짝 눈치를 줬다.

“셰프님 방해하면 안 돼.”

“그냥 보기만 할게요. 정말로요.”

“난 그 말에 믿음이 안 생기네. 너 다른 건 다 잘 참지만, 물어보는 것만큼은 못 참으니까.”

“저도 참을 땐 참아요.”

“정말?”

“…아마도요.”

눈동자를 슬그머니 아래로 내리깔았다. 거짓말한 건 아닌데 왜 거짓말 같지.

가하란은 따뜻한 컵을 양손으로 쥐고 안에 든 물을 마셨다. 볶은 곡물을 우려낸 건가? 고소한 맛이 몸을 감싸 안았다.

나른한 숨이 후, 하고 절로 나온다.

“이거 맛있어요.”

“그러게.”

셀베이아도 마음에 들었는지 물을 홀짝거렸다.

“꼬마야. 들어와도 돼.”

네일라가 주방 입구 앞에서 손짓했다. 가하란은 남은 물을 단번에 마시고 의자에서 내려왔다.

“셰프님 귀찮게 하면 안 돼.”

셀베이아가 재차 말했다. 가하란은 네, 라고 대답한 후 걸음을 뗐다.

“와아.”

생각했던 거보다 더 넓었다. 바닥이 매끈매끈했는데, 유약 같은 걸 덧바른 것 같았다. 물기가 바닥에 고이지 않고 한쪽으로 흘러가는 게 보인다.

“셰프님. 전 셀베이아 씨와 얘기하고 있을게요. 예전에는 몰랐는데, 말이 은근히 통하더라고요.”

네일라가 들어가 보라며 등을 살짝 밀었다. 가하란은 머리보다 높이 있는 조리대를 올려다보며 밀리언에게 다가갔다.

밀리언이 물이 담긴 바가지를 내밀었다.

“주방에 들어오면 우선 손부터 씻어야 한다.”

손을 담그고 박박 비비면서 말했다.

“아기를 처음 만날 때도 손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그랬어요.”

밀리언이 물끄러미 바라본다.

“누가 그런 말을 하든?”

“후란핀 할머니가요. 제가 사는 골목에서 아기가 태어나는 날이면, 항상 후란핀 할머니가 도와주러 가세요.”

이야기를 멈추고 밀리언을 바라봤다.

“계속 말해봐.”

“아기가 세상에 나오는 날이 되면, 골목 사람들은 다 같이 모여 기도해요. 아기가 무사히 나오도록 말이에요.”

“나도 밖에서 기도를 올렸다. 믿는 신이 있는 건 아니지만.”

밀리언이 옅게 미소 지었다.

“할머니는 아기를 만나기 전에 꼭 손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했어요. 손에는 보이지 않는 작은 악마들이 살고 있어서, 막 태어난 아이한테는 위험하다고.”

“지혜로운 분이시구나.”

“꼭 기억해 두라고 했어요. 나중에 다 쓸모가 있을 거라고.”

밀리언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 턱짓으로 바닥에 놓인 상자를 가리켰다.

“옆에 있는 상자 밟고 올라와라. 조리모도 쓰고.”

사용감이 가득한 상자였다. 자그마한 발자국이 여기저기 찍혀 있었다.

상자에 올라가 발 크기를 대봤다. 상자에 찍힌 발자국이 조금 더 크다.

“수습 온 애가 쓰는 거다. 나이는 너보다 한두 살 정도 많을 거고.”

그렇구나,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밀리언의 손을 봤다.

큼지막한 칼로 양파를 다지고 있었다. 일정한 박자로 칼날이 움직이는데, 간격에 변화가 없었다.

정교한 기계 같았다.

“요리해본 적은 있고?”

“간단한 건 몇 번 해봤어요. 근데 그걸 요리라고 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어요.”

“입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음식을 만들었다면 그건 훌륭한 요리라고 할 수 있지.”

금세 양파 하나가 자그마한 네모들로 변했다.

“아저씨는 누구한테 요리를 배우신 거예요?”

“여러 사람에게 배웠지. 제대로 공부한 건 20년 정도 됐을 거다. 아니, 더 오래됐나?”

밀리언이 당근과 칼을 살짝 들어 보이며 말했다.

“예전부터 가게에서 일하신 거예요?”

밀리언의 손이 잠시 멈췄다. 가하란은 슬쩍 눈치를 살폈다. 귀찮게 하면 안 된다고 했지.

멈췄던 셰프의 칼이 다시 움직였다.

“요리를 제대로 시작한 건 군대에 있을 때였다.”

“군대요? 군인이셨어요?”

“요리사보단 그쪽이 어울리지 않니?”

가하란은 스스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도보다는 거대한 창과 방패가 어울려 보이니까.

“저번에 군부 재정처에 갔을 때 들었어요. 밥만큼 중요한 게 없다고.”

“그 말대로 밥보다 중요한 건 없지. 배가 고프면 힘이 안 나니까.”

“힘이 안 나면 싸움도 지겠네요.”

“그렇지.”

“아저씨는 그 중요한 밥을 책임지고 만드신 거네요?”

음, 소리를 내며 잠시 대화를 멈춘 밀리언이었다.

입은 멈췄어도 손은 박자감을 유지한 채 채소를 손질해 나갔다.

밀리언이 다시 입을 연 건 당근을 얇은 천처럼 깎아낸 다음이었다.

“나는 규모가 작은 부대에 있었다. 종종 다른 부대에 가서 식사를 준비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몇 안 되는 내 동료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었지.”

과거를 되짚는 밀리언의 눈빛에는 따뜻하면서도 예리한 기운이 감돌았다.

“오랫동안 같이 있었나요?”

“질리도록 붙어 다녔지.”

“아저씨는 그분들을 아끼셨나 봐요.”

“아낀다는 표현이 맞는지, 잘 모르겠구나. 서로 얼굴만 보면 욕하던 놈들이라.”

“웃으면서 하는 욕은 가장 친하다는 뜻이래요.”

“그럴지도 모르지.”

밀리언이 오목한 그릇을 내밀었다. 안을 보니 밀가루와 계란, 약간의 물이 들어 있었다.

“열심히 주물러봐라. 네가 힘낼수록 맛있는 음식이 나올 테니.”

“저 이런 거 잘해요.”

손가락 하나하나에 힘을 실어 반죽을 주무르고 치댔다.

“아저씨 친구분들이 부러워요. 맛있는 걸 매일 먹었을 테니까요.”

“그놈들은 고맙다는 말조차 안 했다. 매정한 놈들이었지.”

“말은 안 해도 속으로는 다 고마워했을 거예요. 이렇게 맛있는 걸 먹고 고맙다고 하지 않으면 벌 받아요.”

“그놈들한테 네가 한 말을 그대로 해주고 싶구나.”

칼을 내려놓고 선반에서 무언갈 꺼내던 밀리언이 눈을 살짝 찌푸리며 왼발을 좌우로 비틀었다.

가하란은 반죽에서 손을 떼며 물었다.

“의족이 불편하세요?”

“가끔 이래.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 걱정할 필요 없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면 종종 그래요. 달군 돌을 천에 감아 연결부 쪽에 대고 있으면 좀 나을 거예요.”

밀리언이 빙긋 웃었다.

“이걸 담당해주는 사람도 너와 똑같은 얘길 했다. 아버지 일을 도우면서 잘 배웠구나.”

“기본적인 것만 배웠어요. 언젠가는 미세조정도 배워볼 거예요.”

가하란은 바지 밑단 사이로 빠져나온 검은 의족을 바라보다가, 밀리언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왼쪽 눈을 가린 안대가 시선을 끈다.

입이 간지러웠지만, 꾹 참았다.

상처를 헤집는 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됐다.

아빠도 이웃들의 의수를 손볼 때 왜 이렇게 된 건지 묻지 않았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워지는 과거가 그 안에 있으니 항상 조심해라, 아빠가 한 말이었다.

“내 눈이 왜 이렇게 된 건지, 궁금하니?”

“아, 아니요.”

“넌 거짓말에 소질이 없구나.”

“그렇지 않아요. 어른들은 항상 그렇게 말하는데, 저도 거짓말 잘해요.”

“방금은 표정에 훤히 드러났는데?”

“…실패할 때도 있어요.”

밀리언이 작게 웃었다.

“듣고 싶어?”

“솔직하게 말하면 듣고 싶어요. 하지만 아픈 일을 되돌아보는 건 괴로운 일이잖아요. 남의 상처를 헤집으면 안 된다고 배웠어요.”

“아픈 과거인 건 확실하지. 괴롭기도 하고. 하지만, 이 상처가 마냥 끔찍한 건 아니다.”

밀리언이 안대를 밑으로 살짝 당겼다. 지네 같은 흉터가 눈썹에서 시작해 광대 쪽까지 자리 잡았다.

얼마나 아팠을까.

가하란은 눈이 지져지는 고통을 알고 있었다. 밀리언 아저씨 역시 그와 똑같은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상처가 안대 뒤로 다시 숨었다.

“왼쪽 눈도, 다리도 군대에 있을 때 잃었지.”

“…전쟁 때문인가요?”

“조금 달라. 난…… 사람이 아니라 동물한테 당한 거거든.”

“동물이요?”

“사나운 맹수라고 해두자. 정말 위험한 동물이지. 사람을 공격하고, 사람을 먹기도 하는 그런 맹수였다.”

먹는다는 말에 괜히 움찔하게 된다.

“방심한 건 아니었다. 준비를 철저하게 하고 놈을 잡으러 갔지만, 예상보다 더 흉포했을 뿐이지.”

“그 동물은….”

“놓칠 뻔했다. 같이 간 동료들도 큰일을 겪을 뻔했지. 하지만 다행히도 대장이 그곳에 나타났어.”

“대장이요?”

밀리언의 오른쪽 눈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 대신, 대장을 믿었다. 그걸로 충분했거든.”

짧은 대답에 담긴 무한한 신용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잘된 일이었지. 군에서 나와 내 이름을 건 가게를 차리고, 가정을 꾸렸으니까. 불행한 사건이 불행한 결말을 낳는 건 아니라는 걸 그때 배웠다.”

한쪽 눈과 다리를 잃었음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가하란은 밀리언을 우러러보며 말했다.

“아저씨처럼 멋진 남자가 되고 싶어요.”

“그러려면 일단 그 반죽부터 제대로 해야 할 거다. 찰기가 올라올 때까지 열심히 주물러야 해.”

“네!”

웃음을 띠며 양손에 힘을 꽉 줄 때였다.

“조심해요!”

가게 밖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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