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161화 (134/558)

제161화

-얘기가 길어질 거 같으니까 난 돌아갈게.

어, 하는 사이 산페르가 모습을 감췄다. 제멋대로인 아저씨다.

“오늘은 인사한 걸로 만족해야지. 3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으신 분이야.”

브라인이 은근슬쩍 말을 돌리려 했다. 가하란은 입을 앙다문 채 브라인을 바라봤다.

“왜?”

“아직 대답 안 해주셨어요.”

“집착도 심해. 알았어. 약속은 약속이니까.”

“근데 브라인 님.”

질문을 내뱉기도 전에, 브라인이 의자에 털썩 앉으며 선수를 쳤다.

“레거시도 궁금한 거지?”

“네. 들어본 적은 있는데 자세한 건 몰라요.”

“어려울 거 없어. 오래전에 만들어진 마법공학품이야. 현시대와 차이점이 있다면,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자들도 마법에 가까운 힘을 쓸 수 있게 해주지.”

우와, 감탄이 절로 나왔다.

“누구나 다 마법사가 될 수 있는 건가요?”

“가능은 하지. 하지만 이 시대에 레거시는 흔치 않아. 있다고 해도 일회성인 것들이 대다수고.”

“레거시를 만들어내면….”

“오토마타조차 해석 못 한 너희들이 레거시를? 이르지, 일러.”

수염을 쓸어 올리며 웃는 브라인이었다. 가하란은 의자를 끌고 브라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브라인 님은 오토마타의 비밀을 아세요?”

“아니. 나도 몰라. 그건 하늘석과 마찬가지로 내가 세상을 인식하기 전부터 존재해왔어. 너희들이 말하는 유사 정령의 형태로 말이야.”

“정말 오래된 물건이네요. 누가 만들었을까요?”

“모른다니까 그러네. 그걸 알게 되면 나부터 알려줘. 기록해 놓게.”

브라인이 검은 손가락으로 턱을 긁다가 왼쪽으로 손을 뻗었다. 회색빛 캐비닛이 쿵쿵거리며 다가왔다.

“여기 어디쯤 있을 텐데.”

세 개의 서랍이 동시에 열리며 안에 든 문서들이 촤르륵 펼쳐졌다.

무지개처럼 곡선을 그리며 늘어진 문서들이 어느 순간 한데 뭉쳐 브라인 앞으로 내려왔다.

“여기 있네.”

브라인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두 손을 내밀어 받으려 하는데, 브라인이 대뜸 손목을 툭 꺾으며 종이를 낚아챘다.

“네가 아무리 내 심부름꾼이지만 보안은 보안이니까.”

눈웃음 지으며 다시 종이를 내민다. 가하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종이를 받았다.

“…이게 뭐예요?”

“뭐긴. 네가 원하는 자료지.”

“죄다 검게 칠해져 있는데요?”

우측 상단에 박혀 있는 사진, 이름을 비롯한 거주지와 가족관계, 그 아래 적혀 있는 글도 검게 칠해져 있었다.

“이는…… 해당 관계자…… 그러므로…….”

보이는 것만 일단 읽어봤다.

이걸로 뭘 알 수 있지? 눈을 살짝 찌푸리며 브라인을 응시했다.

브라인은 나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열람에는 자격이 필요해. 넌 내 심부름꾼이라 보안등급을 어느 정도 무시할 수 있지만, 기록보관서를 이용할 때는 얘기가 다르지.”

“쩨쩨해요.”

“나 쩨쩨한 거 세상 모든 종이 다 알아.”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는 얼굴이다. 가하란은 뚱한 표정으로 종이를 들여다봤다.

“난 분명 알려줬다. 네가 못 볼 뿐이야.”

검게 칠해져 있는데 어떻게 봐요, 라는 말이 입 안에서 맴돌 때였다.

가하란은 왼손으로 검게 칠해진 곳을 만져보았다.

대령님은 알려줬다고 말했다. 거짓말할 분은 아니니, 이건 분명 자료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내가 못 볼 뿐?

검게 덧씌워진 게 물감이 아니라 다른 거라면?

가하란은 눈을 살며시 감았다가 떴다. 아릿한 통증이 망막 안쪽에서 일어났다.

조금만 참아보자.

종이의 질감이 가닥가닥 끊어지며 선으로 변했다. 좀 더 세밀하게 관찰했다.

유사 정령의 마력선을 훑듯이.

검게 칠해진 곳이 잘게 떨렸다. 다른 부분은 선으로 변했는데, 검은 영역은 여전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눈 안쪽에 열기가 더해진다.

이제는 찡한 감각을 넘어 뜨거울 정도다.

그래도 괜찮았다. 심상세계에서 겪은 거에 비하면 아직 버틸 만하다.

그림자를 걷어내고 본래의 형태를 보자.

사정없이 흔들리던 검은 칠이 녹이 벗겨지듯 한순간 떨어져 나갔다. 박리돼 공중에 뜬 검은 막 아래 온전한 자료가 있었다.

하지만 너무 집중한 나머지 사진도, 글자도 모두 선으로 변해버렸다.

아직은 선에 담긴 내용을 읽어낼 수 없었다. 보려면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의 형태로 바꿔야 했다.

선과 현실 형태의 경계를 세밀하게 조정했다.

난잡하게 꾸물거리던 선들이 다시 종이의 질감을 되찾았다. 둥둥 떠다니던 선들이 빛바랜 잉크로 변해 글자가 되었다.

됐다!

가하란은 사진 속 여자를 보았다.

양 옆구리에 고양이 두 마리를 끼고 있었다. 크랜베리와 블루베리.

구불거리는 머리를 한데 묶어 왼쪽 어깨 앞으로 뺐다. 눈썹은 머리와 같은 연붉은색.

조금 피곤해 보이는 눈과 살짝 말아 올린 입술 사이로 아담한 코가 자리했다.

이름은 ‘줄리어스’.

나타 왕국 중앙연구실 부속 인지통합 연구팀 소속.

학술서 『밑에서 본 오토마타』에서 마력선 중첩형식 재정립.

최초의 오토마타를 기반으로 한 쉰두 개의 복사본 제작, 베이스 소스 위에 새로운 마력선을 덧대는 형식 착안.

거병 거대화 계획 책임개발자.

그 밑으로도 여러 업적에 관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지식이 모자라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분명 사람들을 놀라게 한 사건들이리라.

아침에 밥을 먹었다, 이런 사소한 것들을 기록에 남길 리 없으니까.

얼마나 똑똑한 사람이었던 걸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업적 끝단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서른두 개의 유사 정령을 유폐한 죄목으로 사형 선고가 내려졌으나 형 집행일 닷새 전에 실종. 최초의 오토마타도 이때 소실된 것으로 추정.

기록은 거기서 끝났다.

가하란은 종이에서 눈을 떼며 눈꺼풀을 닫았다. 눈이 지글지글 끓었다.

“혹시나 했는데, 사용법을 제대로 익혔구나.”

브라인이 종이를 가져갔다.

“아프지만 조절할 수는 있어요.”

“정령술사들이 보면 입에 침을 흘리며 널 쫓아다닐 거야. 네 눈을 파내려고.”

“…농담이시죠?”

“아닐걸?”

눈을 쓱쓱 비빈 후 숨을 토해냈다.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오랫동안 집중하는 건 역시 위험했다.

“봤으니까 됐지?”

회색 캐비닛이 종이를 삼키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가하란은 따뜻한 손바닥을 눈 위에 대며 물었다.

“브라인 님은 직접 만나본 적 있나요?”

“줄리어스랑?”

“네.”

“보긴 봤지. 말수가 적은 여자애였어. 자기가 기르는 고양이한테만 속내를 털어놓는, 사교성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은 애였지. 사람들은 그 애를 가리켜 반짝이는 지식을 얻는 대신 그 외의 모든 걸 포기한 인간이라고 했어.”

의외의 평가였다.

녹음된 목소리는 활기차고 장난기가 많았는데. 그러고 보니 녹음할 때도 고양이한테 말을 걸고 있었다.

“유사 정령 서른두 개를 감췄다고 쓰여 있었어요. 그 글씨체는 브라인 님 것이었고요.”

“맞아. 내가 쓴 거야. 그 애의 최후를 기록 중이었거든.”

“실종됐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야. 감옥에서 사라졌어. 누가 빼돌린 건지, 아니면 사고사한 건지 알 수 없어. 닷새 전에 실종됐다고 써놨지? 그때 엄청난 지진이 있었거든. 난리도 아니었지.”

브라인이 코를 찡긋거렸다.

서른두 개의 유사 정령.

“왜 숨겼을까요?”

“내가 그걸 알았으면 적어뒀겠지? 그 애는 자신의 죄를 인정한 다음부터 입을 열지 않았어. 아! 최후의 변론에서 이런 말을 하긴 했지.”

“어떤 말이요?”

브라인이 어둠 저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태엽을 멈추게 했고, 그건 옳은 일이었다.’ 이게 그 애가 한 마지막 말이야.”

* * *

“밀레나 누나는요?”

가하란은 복도를 보며 말했다. 셀베이아가 서류 더미를 툭툭 정리하며 대답했다.

“지쳐 있는 것 같아서 내가 돌려보냈어. 대령님하고 얘기가 길어질 것 같기도 했고.”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밀레나가 계속 기다리고 있었으면 미안했을 것이다.

“얘기는 다 끝난 거야?”

“네. 어느 정도는요.”

“근데 표정이 어둡네.”

“찾아내야 할 게 더 많아졌거든요. 답을 찾으면 또 다른 문제가 튀어나와요.”

“그게 인생이란 거지.”

가하란은 접수대 옆으로 걸어갔다.

“도울 거 있나요?”

“다 끝냈어.”

서류를 캐비닛에 넣은 셀베이아가 복도 끝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눈발이 더 거세지네.”

“많이 오면 눈사람 만들 거예요.”

“중앙부 근처에서는 못 만들 거야. 쌓이는 족족 치워 버리거든.”

가하란도 까치발을 세워 밖을 보았다. 큰길 주변에 싸리비를 든 군인들이 모여 있었다.

“가하란. 배고프지 않아?”

“배고파요.”

“좋아, 그러면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어디로 가요?”

가보면 안다는 말과 함께 걸음을 떼는 셀베이아였다.

중앙부를 나와 시내로 들어섰다. 얼마 걷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기예요?”

가하란은 요정의 안뜰을 보며 환한 표정을 지었다.

입 안에 절로 침이 고인다. 이곳에서 맛본 음식 맛은 워낙 강렬해서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을 것이다.

“1년에 두 번 정도 식사할 수 있어. 대령님 덕분이지. 게다가 단품이 아니라 코스로.”

“정말요? 저도 같이 먹을 수 있는 거예요?”

“물론이지.”

얼굴로 쏟아지는 눈을 두 손으로 막아내며 가게 입구로 걸어갈 때였다.

셀베이아가 멈칫했다.

“밖에 아무도 없네.”

“날이 추워서 안에 들어간 게 아닐까요?”

“근데 불도 꺼져 있어. 아직 준비시간이 아닐 텐데.”

의아해하며 가게 문을 두드리는 셀베이아였다. 문이 살짝 열리며 종업원이 고개를 내밀었다. 저번에 심부름 왔을 때 본 사람이다.

“네일라 씨. 가게에 무슨 일 있나요?”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문을 여는 네일라였다.

“일단 들어오세요. 밖이 춥네요.”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네일라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오늘 오기로 예약하셨죠?”

“네.”

“미리 알렸어야 하는데, 날씨가 이래서 소식 전달이 늦어졌어요.”

가하란은 가게 안쪽을 바라봤다. 저번에 왔을 때는 안쪽 조리실에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오늘은 조용했다.

무슨 일이지?

걱정하고 있을 때였다. 셀베이아가 살짝 높아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정말인가요?”

“예. 그래서 오늘은 영업을 못 하게 됐어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축하해야 할 일인데 죄송할 건 없죠.”

가하란은 셀베이아의 바짓단을 살짝 잡아당겼다. 무슨 일인지 알고 싶었다.

“아기가 태어났대.”

“아기요?”

“응. 셰프님의 아이가.”

골목에서도 아기가 태어나는 날에는 다 같이 모여 문밖에서 기도했다. 부디 건강하게 태어나길, 산모가 안전하길 기원하며.

가하란도 두 손을 맞잡았다.

“저도 기도할게요. 아기가 건강하도록.”

네일라가 웃으며 가하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기도해줬다는 걸 셰프님께 전해줄게.”

그때였다. 굳게 닫힌 문이 확 열렸다. 강풍에 휩쓸린 눈이 가게 안쪽으로 들어왔다.

어두운 그림자가 문을 비집고 들어왔다. 곰인가 싶었지만 사람이었다.

의족이 내는 묵직한 걸음 소리.

밀리언 셰프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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