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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160화 (133/558)

제160화

“깼어?”

꿈인 줄 알았다. 하지만 흔들리는 몸이 꿈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었다.

가하란은 땅으로 내려와 눈가를 비볐다.

“누나.”

“왜?”

“언제 왔어?”

“언제 오긴. 아까 전에 왔지. 그보다 잠부터 깨. 발 헛디디겠다.”

끄덕인 다음 뺨을 꾹 눌렀다. 바람을 타고 얼굴로 들이닥친 눈발에 눈이 번쩍 뜨였다.

“눈이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시야 안쪽으로 밀레나의 손이 비집고 들어왔다.

“얼른 가자. 쌓일 거 같아.”

가하란은 방긋 웃으며 손을 붙잡았다.

“난 셀베이아 누나가 오는 줄 알았어.”

“잭이 나한테 먼저 오더라. 급한 상황이었다면 대령님한테 갔을 텐데.”

눈을 헤치며 걷다 보니 어느덧 중앙부 앞이었다. 귀마개를 한 검문대 군인들이 얼른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다녀왔습니다.”

매일 보는 군인에게 인사한 후 3층 기록보관서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누나를 힐긋 보며 물었다.

“누나 많이 바쁘지?”

“바쁘면 못 왔겠지? 며칠 동안은 한가해.”

“정말?”

같이 놀자는 말이 입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밀레나가 대답했다.

“내일은 약속이 있어서 안 돼.”

“그다음 날은?”

“생각해 보고.”

“…알겠어.”

시무룩해져서 땅을 보고 있으니 밀레나가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모레 시간 내볼게. 근데 뭐 하고 놀게?”

“모르겠어.”

정령세계에서 겪은 일 때문인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무엇을 하며 놀아야 할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생각해봐. 정 없으면 툴이랑 산책해도 좋고. 오랜만에 툴도 보고 싶다.”

“그러면 되겠다.”

골목 끝 기록보관서 앞에 셀베이아가 서 있었다.

“대령님 만나러 가는 거지?”

“어. 말해야 할 게 있어.”

“내가 들어도 되는 얘기야?”

가하란은 멈칫하며 밀레나의 눈치를 보았다. 친구 사이에 비밀은 없어야 하는데.

얘기해주지 않는다고 누나가 섭섭해하면 어쩌지?

고민이 시작되던 찰나였다. 밀레나가 손을 놓으며 말했다.

“전부 다 말할 필요는 없어. 비밀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거야. 나중에 네가 말해줘도 괜찮겠다 싶을 때, 그때 얘기해줘.”

“알았어. 나중에 꼭 말해줄게.”

밀레나에게 손을 흔든 뒤 문으로 뛰어갔다.

“누나. 브라인 님 안에 계시죠?”

“응. 널 기다리고 계셔.”

“저를요?”

“들어가 봐. 그러면 알게 될 테니까.”

셀베이아에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문을 열었다. 저 멀리 브라인이 보였다.

다가가야지, 하고 걸음을 내딛자마자 브라인 앞이었다. 가하란은 눈을 깜빡이며 뒤를 돌아봤다.

한순간에 거리가 좁혀진 것이다.

“얘기할 게 많아서 바로 끌고 온 거니까 되묻진 말고.”

“다른 손님들도 이렇게 데려오면 안 되는 거예요?”

“되묻지 말라니까.”

“알겠어요.”

브라인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설 때였다.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가하란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작은 거북이, 산페르가 보였다.

“아저씨.”

-보아하니 잘 이겨냈네.

“오기로 버텼어요.”

헤엄치며 공중을 한 바퀴 돈 산페르가 브라인에게 다가갔다. 브라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살짝 숙였다.

“바라라의 딸이 인사 올려요. 오랜만에 이렇게 뵙네요.”

-난 보고 싶지 않았어.

“거짓말 못하시는 건 여전하시네요.”

브라인이 가하란을 바라봤다.

“앉아서 얘기해봐. 내가 뭘 들어야 하고, 뭘 알아야 하는지.”

의자에 앉은 다음 정령세계에서 겪은 일을 전부 설명했다.

브라인이 다리를 꼬며 산페르를 보았다.

“퀼하고 비슷한 종류인가요?”

-비슷하다고 봐야 할지, 아니면 전혀 다른 것으로 분류해야 할지 모르겠어.

“위대한 존재께서 판단치 못하는 눈이라. 흥미롭네요. 기록해둘 가치가 있어요.”

브라인이 손가락을 튕겼다. 뒤편에 있는 검은 캐비닛에서 밴드 노트가 튀어나왔다.

검은 의수로 펜을 쥐고 열심히 써 내려 나가는 브라인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빠의 말을 되새김질했다.

아빠는 떠나기 전 이런 말을 남겼다.

-문제가 생긴다면 브라인 님과 민 교수님께 얘기해. 그분들이라면 큰 어려움 없이 해결해주실 테니까. 하지만 문제가 아니라 감춰야 할 일이 생긴다면, 브라인 님에게 먼저 말해. 알겠지?

가하란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브라인 님.”

“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하나밖에 없어? 아주 경사스러운 날이네.”

말해봐, 브라인은 노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아빠가 감춰야 할 일이 생기면 민 교수님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렇겠지.”

“왜 그런 거죠?”

“민 교수는 괜찮은 인간이야. 하지만 이해관계에 묶여 있어. 무슨 뜻인지 알겠니?”

“…민 교수님은 절 속이실 분이 아니에요.”

“내가 저번에도 말하지 않았나? 좋고 나쁨은 무의미한 기준이라고. 민 교수가 널 돕는 건 알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야. 그 여자애가 끝까지 널 지킬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거지.”

“전 민 교수님을 믿고 싶어요.”

“믿는 건 자유니까. 하지만 기억은 해둬. 안 좋은 일은 언제나 생길 수 있는 법이야.”

브라인이 노트를 탁 덮으며 웃었다.

“그러면 왜 브라인 님은 믿어도 되는 거죠?”

“나 믿기 싫어?”

“아니요. 근데 아빠는 브라인 님한테 먼저 가라고 했어요.”

“내가 했던 말에 이미 답이 있어. 너도 그걸 알고 있을 테고.”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건가요?”

“정답. 난 인간족이 무엇을 하든 상관치 않으니까. 가끔 뒤치다꺼리를 해주지만 어디까지나 방관자이자 관찰자야. 그러니 네 아빠도 나한테 널 맡긴 거고.”

브라인이 앞으로 다가왔다.

새빨간 눈동자가 얼굴을 훑는다.

“완전히 뜨인 눈이라. 퀼한테 물어보고 싶지만 그놈이 얌전히 와줄 리 없겠죠?”

-쥐새끼와 틈 사이에서 날뛰고 있는 동안은 불러도 오지 않겠지.

가하란은 고개를 살짝 들어 브라인과 산페르를 바라봤다.

“산테 님과는 아직도 냉전 중이신가요?”

-애초에 싸운 적도 없어.

“그러시겠죠. 300년 전에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그때도 말한 거지만 난 너랑 말 섞기 싫어.

“전 산페르 님 곁에서 모든 걸 기록하고 싶은걸요?”

산페르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가하란의 등 뒤로 이동했다. 가하란은 부담스러운 브라인의 눈빛을 받아내며 멋쩍게 웃었다.

“제 앞에 현신하셨으니 앞으로도 몇 년간은 볼 수 있겠죠. 사소한 대화는 나중으로 미루고… 이제 본론을 꺼내시죠.”

본론이란 말에 가하란은 산페르를 바라봤다.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 헷갈리는 상황이었다.

산페르 아저씨라면 이 답답함을 해결해주지 않을까?

-이 녀석 눈에 관한 건 좀 더 지켜봐야 알 것 같으니 넘어가고.

“그러시죠.”

-내가 본 것에 대해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모든 걸 봐오신 분이 찰나를 사는 저한테 질문을 하시고.”

-짧게 살기에 오히려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으니까.

가하란은 눈을 꿈뻑거렸다.

브라인은 천 년을 넘게 살아왔다. 숫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찔해지는 시간이다.

그 긴 세월조차 산페르가 보기엔 찰나인 걸까.

-기이한 인간을 봤어. 그런 게 존재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이상한 놈이었고.

“누굴 말하는지 알 것 같네요.”

-인간들은 그걸 내버려 두는 거야?

“저야 모르죠.”

-퀼비언에 이어서 또 이상한 게 나타났어. 아니, 어떤 면에서는 퀼비언보다 위험해 보여. 난 이 층이 사라지는 걸 원치 않아.

“크게 걱정하지는 마세요. 그 아이 성격상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도시 하나둘, 나라 하나둘쯤은 지워질 수 있지만.”

-네가 그렇게 평가한다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네. 역시 이 세계는 아직도 많은 것을 감추고 있어. 지루하지만, 계속 지켜보게 되는 이유지.

“하늘이 닫히는 날을 직접 볼 수 있다면, 기록자로서 더 바랄 게 없겠네요.”

-어떨 때 보면 네가 가장 위험해.

“그럴 리가요.”

둘의 대화를 빠짐없이 기억했지만, 이해되는 건 몇 없었다.

두 분이 언급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한 사람이 나라를 멸망시킨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산페르가 의심했던 사람이라면 구치 아저씨와 그 곁에 있던…….

“산페르 아저씨. 한동안 안 보인 이유가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어요?”

-맞아. 언제부터 그런 게 존재했는지 알아보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녔어.

“그 사람이 구치 아저씨인가요? 아니면….”

-그 옆에 있던 인간.

랜더 아저씨구나.

하지만 이상했다. 랜더는 위험한 사람이 아니었다. 거병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길을 잃을 뻔한 날 도와준 고마운 아저씨였다.

기이하다거나, 위험하다는 단어는 그 아저씨와 어울리지 않았다.

“가하란.”

브라인이 노트를 흔들며 말했다.

“지금 당장은 몰라도 되는 거니까 고민하지 마. 한동안 만날 일도 없을 테고. 만약 네 귀에 그 아이의 이름이 들어온다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세상이 변해 있을 테니까 그때 차차 알아가면 돼.”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겠다는 단호한 말투였다. 가하란은 호기심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다른 거 물어봐도 되나요?”

“눈을 잃지 않고 살아 돌아온 기념으로 한두 개 정도는 더 말해줄게.”

살아 돌아온 기념.

가슴이 뜨끔했다. 돌이켜 보면 빛 안에서 몇 번이나 기절했었다. 실을 놓지 않고 끝까지 버티긴 했지만, 만약 잘못됐다면 어떻게 됐을까?

정말로 죽었을까?

“미치거나, 텅 비거나, 죽었을 거야. 그랬다면 돌아온 올란트는 날 저주하며 울었겠지. 자주 있는 일이라 크게 찝찝하진 않겠지만.”

무덤덤하게 말하는 브라인을 보며 다시금 깨닫게 된다. 항상 나른한 눈으로 서류를 보는 대령님이 어떤 존재인지.

“아빠가 슬퍼하는 건 싫어요.”

“그렇다면 앞으로 조심해.”

“그럴게요.”

“네 인생은 네가 사는 거니까 설교할 마음은 없어. 옆에 계신 산페르 님도 비슷한 입장일 거야. 네가 죽게 되면 물론 슬프긴 할 거야. 하지만 그 감정이 얼마나 오래갈지, 나는 모르겠어.”

“…전 브라인 님이 아프다면 엄청나게 걱정할 거예요.”

“그거 고맙네.”

가하란은 산페르를 바라봤다. 산페르는 푸른 눈동자를 움직이며 시선을 피했다.

“저는 산페르 아저씨도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프다는 게 어떤 건지 나는 잘 몰라.

입이 비죽 앞으로 나온다.

“두 분 다 못됐어요.”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거야. 그보다 궁금한 건 없어진 거야?”

“아니요! 더 물을 거예요.”

“아이구, 그건 좀 섭섭하네.”

브라인이 손가락을 까락거리며 말했다.

“그래서 뭐가 듣고 싶은데?”

“유사 정령의 마력선을 봤어요.”

“네 눈이라면 선과 선 사이에 만들어진 층도 봤겠네.”

“네.”

“성능이 좋네. 그래서?”

“글을 발견했어요. 남겨진 소리도 들었고요. 녹음이라는 마법 같았어요.”

“‘레거시’구나. 그런데?”

“그걸 남긴 분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요. 혼자서 마력선을 그려냈어요. 엄청 단순하면서도 예뻤어요. 다른 사람들이 그린 마력선하고는 구조가 달랐어요.”

“……음.”

브라인이 팔짱을 끼며 눈을 돌렸다. 모르는 눈치가 아니었다. 저건 알고 있다는 신호다.

“알고 계시죠? 그 사람이 누구인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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