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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159화 (132/558)

제159화

“단련만큼 지루한 게 없어. 특히나 육체를 단련하는 건 더욱 지겹지. 부단히 노력한다 한들 성과가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니까.”

민 교수의 목소리가 모기의 날갯짓만큼이나 듣기 싫었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었다.

밀레나는 들썩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숨을 마셨다. 쉴 수 있을 때 제대로 쉬어야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변태와 미친 사람이 많고, 그 지루한 일을 죽는 그 순간까지 수행하는 자들이 있어. 지금 자빠져 있는 너희들 중 몇몇은 번듯한 가문의 자녀들이니까, 당연히 1등 귀족이 품은 검사들을 봤겠지?”

1등 귀족이 품은 검사.

밀레나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검을 들지 않았음에도 예기가 흐르는 자들이었다.

“가문에 따라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하나같이 뛰어난 실력을 지녔지. 내가 만나본 분들은 자신의 실력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어. 완벽. 정말 무서운 단어야.”

민 교수가 머리맡으로 걸어왔다. 먼지 묻은 군화가 얼굴 바로 옆에 멈췄다.

민 교수는 밀레나를 무심히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분들은 자신의 한계를 명확하게 알고 있어. 도전과 과욕을 정확하게 구분하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다. 밀레나는 안간힘을 쓰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리가 떨리고 눈은 자꾸 감기지만, 걸을 수 있는 체력과 마나를 붙들어 둘 정신력이 남았다.

“밀레나.”

“예!”

“한 바퀴 더 돌 수 있겠어?”

마나를 붙잡아 둔 채 훈련장 한 바퀴. 마른침을 삼키며 민 교수는 어깨 너머로 펼쳐진 훈련장을 바라봤다.

이곳이 이리도 넓었던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포기하겠습니다.”

“할 수 있지 않을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해낸 다음에 문제가 생길 겁니다. 전 낙오자가 되기 싫습니다.”

가만히 쳐다보던 민 교수가 빙긋 웃었다.

“네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그런 거겠지. 자, 다들 기상!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사흘간 휴식 후 다시 보자.”

사흘이란 말에 저도 모르게 만세를 외쳤다. 자빠져 있던 동기들도 기쁨에 시름시름 앓는 목소리로 와아, 소리를 냈다.

“밀레나.”

“네.”

“열심히 하는 건 좋아. 부러지지 않으려고 버티는 것도 좋고. 근데 조금만 더 여유를 가져. 동기들과 달리 네 육체는 아직 연약해. 신체술 사용 능력이 뛰어나 잘 버티고 있지만, 그래도 기본 바탕은 중요한 법이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민 교수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여유를 가지라는 건 그런 생각을 덜어내고 쉬라는 뜻이야. 단련은 지루한 일이야. 거기서 재미를 찾으려고 이것저것 했다가는 망가지는 수가 있어. 육체와 정신의 속도에 맞게, 차근차근히 올라와.”

수고했어, 민 교수가 어깨를 툭툭 친 다음 누워 있는 동기들에게 걸어갔다.

한 사람씩 붙잡고 짧은 대화를 하는데, 다들 진중한 얼굴로 말을 새겨들었다.

밀레나는 머리를 묶고 있던 스카프를 풀었다. 교수님 말대로 얌전히 누워 있어야겠네.

목덜미 사이로 찬바람이 지나갔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먹구름이 잔뜩 꼈다.

이 날씨에 비가 올 리는 없고.

살랑거리며 눈송이 하나가 스카프 위로 떨어졌다.

“겨울이네.”

계절감이 훅 끼쳐왔다.

살포시 열린 입 사이로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하늘거리며 올라가는 하얀 김을 멀거니 바라볼 때였다.

저건 뭐지?

드문드문 떨어지는 눈 사이로 자그마한 물체가 재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뚝 떨어지던 물체가 눈앞에서 멈춰 섰다.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공중에 뜬 새. 부리가 샛노란 새를 웃으면서 맞이했다.

“잭, 네가 여기 왔다는 건….”

고개를 좌우로 까닥거리던 ‘잭’이 따라오라는 듯 머리맡을 빙글빙글 돌았다.

“뭐야? 가하란이 우리 찾는 거야?”

밀레나는 옆을 바라봤다. 율이 기어서 다가오고 있었다. 진이 다 빠진 모양이다.

“그런 거 같아.”

“그 꼬맹이가 처음 호출한 건데, 나 어떡하지?”

“넌 쉬고 있어. 급한 일 아닌 거 같으니까 나 혼자 갈게.”

“그럼 부탁할게. 나 도저히 못 일어나겠어.”

밀레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율의 허벅지를 꾹 눌렀다. 율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이따가 봐.”

민 교수에게 눈짓으로 인사했다. 사정을 알고 있는 터라 별말 없이 보내주었다.

잭을 따라 움직였다. 신체술을 사용하지 않고 달리니 날아갈 것 같았다.

족쇄를 풀고 달리는 기분이다.

훈련장을 나와 연구단지로 들어섰다.

“정말로 왔네.”

잭이 내려앉은 커다란 창고 앞에 군청색 재킷을 입은 여자가 있었다.

왼쪽 가슴 꽂혀 있는 은색 핀이 눈에 들어왔다. 연구소 내에서 랩을 개설한 ‘정교수’.

“벨솔이라고 해요. 보다시피 교수고.”

“안녕하세요. 밀레나입니다.”

둔의 정교수는 2등 귀족에 버금가는 위치였다. 상대가 먼저 인사해 왔는데 무시할 수 없었다.

“요즘 연구단지 옆 훈련장에서 매일 뛰고 있죠? 아침마다 커피 내리면서 잘 구경하고 있어요.”

구경이란 말에 작게 헛기침이 나왔다.

“민 교수가 극성이죠?”

“아, 아닙니다.”

“아니긴. 내가 그 친구랑 몇 년을 보고 지냈는데. 그보다 몸 괜찮아요?”

밀레나는 밑을 쓱 내려다보았다. 서둘러 오느라 잊고 있었다. 복장 상태가 말이 아니라는 걸.

뒤로 돌아서서 훈련복에 묻은 흙을 털어낼 때였다. 벨솔이 곁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살살 쳐서 먼지가 털어지나.”

팡팡 소리 나게 등짝을 때리는 벨솔이었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다.

“내 친구가 늦둥이를 봤는데, 나이가 딱 밀레나 씨 정도예요.”

“아, 네.”

거리낌 없는 손짓과 살짝 불편할 수 있는 거리감인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놓였다.

“나 기억 안 나요?”

벨솔이 눈웃음 지으며 물었다.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연회장에서 봤나, 아니면 성도 모임에서? 어쩌면 저택을 찾은 손님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당황할 필요 없어요. 기억 못 하는 게 당연하니까. 아주 어릴 때 봤거든요.”

마당발인 엄마를 둔 덕일까.

둔에 와서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멋쩍게 웃으며 무난한 인사말을 궁리할 때였다.

“‘블루아이’는 여전히 잘 있죠?”

밀레나는 놀란 눈으로 벨솔을 바라봤다. 엄마의 전용기를 언급했다는 건….

“내가 참가한 프로젝트 중 블루아이만큼 골치가 아팠던 적이 없어요.”

놀라움이 감탄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블루아이의 제작자라니.

밀레나는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블루아이를 보며 언제나 꿈꿔 왔어요. 저런 전용기를 갖고 싶다고.”

“내 손길이 닿아서 이런 말 하긴 좀 뭐하지만, 블루아이는 정말 잘 만들어진 애죠. 조교수 시절을 그 애를 만지는 데 다 보냈고요.”

밀레나는 벨솔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 보았다. 민 교수와 비슷한 나이. 마흔 초중반으로 보인다.

블루아이가 제작된 건 20년 전이라고 들었다. 스무 살 초반에 제국을 대표하는 거병을 만들어 내다니.

“물론 나 혼자 만든 건 아니에요. 블루아이 안에 든 액상근육. 그게 내 연구성과예요. 4세대 근육의 배열을 바꿔 꼬임을 더 증가시킨 거였는데, 결과는 아주 훌륭했죠.”

“저도 정기점검 때 몰래 지켜봐서 알고 있어요. 그 섬세한 근육구조. 연결관 배치가 예술의 경지라고 정비관 아저씨들이 매번 말했어요.”

“부정하진 않을게요. 블루아이는 예술 작품이었으니까.”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블루아이의 제작과정은 물론, 시범기동 때 엄마가 어느 정도의 능력을 보였는지도 알고 싶었다.

하지만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벨솔도 그걸 아는지 창고 쪽을 곁눈질했다.

“여기가 연구실이에요. 창고처럼 보이긴 하지만.”

“가하란은 안에 있나요?”

“안에서 졸고 있어요. 혼자 신나게 놀았는지, 난로 옆에 앉자마자 병아리처럼 졸더라고요.”

병아리란 말에 작게 웃음이 나왔다.

“뭐, 내 눈에는 밀레나 씨도 병아리처럼 보이지만.”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넣었다.

병아리라니. 물론 작긴 하지만, 그래도 가하란보다는 크다.

한 뼘 정도니까 어마어마한 차이다.

“언제 시간 되면 놀러 와요. 오후 4시 전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니까.”

“내일 찾아와도 될까요?”

“상관은 없지만, 훈련이 있지 않아요?”

“휴가를 받았어요.”

“잘됐네요. 그럼 내일 찾아와요. 수다나 떨면서 놀게.”

밀레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말씀을 편하게 해주세요.”

“그럴까? 사실 나도 불편했어.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금방 호호, 웃으며 따라오라고 손짓하는 벨솔이었다.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깔린 파이프가 쉭쉭 소리를 냈다. 중간에 유리관이 박혀 있는데, 그 사이로 붉은 액체가 보였다.

액상근육이다. 밀레나는 요동치는 근육을 보며 걸음을 뗐다.

“가하란, 너 데려다줄 사람 왔어.”

휴게실로 들어가자 얌전히 누워 있는 가하란이 보였다. 책을 베개 삼아 난로 앞에 엎드려 있었다.

꽤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곁으로 다가가 쭈그려 앉았다.

색색, 옅은 숨소리가 난다. 밀레나는 뒤에 서 있는 벨솔을 바라봤다.

“깊게 잠들었는데요.”

“저 나이 때는 원래 잠들면 업어 가도 모르지.”

밀레나는 가하란을 살며시 흔들었다. 얇게 눈을 뜬 가하란이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누나, 나 조금만 더 잘게.”

“…어. 그래.”

차마 흔들어 깨울 수 없었다.

“서둘러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니겠죠?”

“급한 일은 없을 거야. 늦으면 접수원 아가씨가 올 테고.”

벨솔이 찻잔을 내밀었다.

“잠깐 기다리는 동안 몸 좀 녹여. 밖에 꽤 쌀쌀하던데.”

“감사합니다.”

모포를 끌어 올려 가하란의 어깨까지 덮어준 다음 찻잔을 받았다.

새콤한 향이 올라오는 차와 따뜻한 난로. 겨울을 즐기는 좋은 방법이었다.

“민 교수님하고도 친분이 두터우시죠?”

“이래저래 오래 보고 지냈으니까. 말이 나와서 하는 소린데, 사실 민 교수도 블루아이의 주인이 될 뻔했어.”

“정말요?”

“거병을 쓰지 않는 대련에서는 민이 앞섰지만, 거병 다루는 기술은 필렌이 압도적이었지. 그 욕심 많은 민이 깔끔하게 포기할 정도로.”

“민 교수님과 포기. 정말 안 어울리는 조합이네요.”

“내 말이.”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물었다.

“어머니와는 어떻게….”

“어떻게 만났냐고? 블루아이 프로젝트 때 처음 봤어. 그때만 해도 참 소심한 애였지. 사람들 말에 이리저리 휘둘리기도 했고.”

칼리고 단장이 했던 말과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이쯤 되면 사실로 받아들여야 했다.

과거의 엄마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는 걸.

“안 믿길 거야. 결혼하기 전의 필렌은… 참 가련한 소녀의 표본이었으니까. 이야기 속 공주 같기도 하고.”

“정말 안 믿겨요.”

“사랑이란 게 뭔지. 사람이 확 변하더라고. 아니지, 지금 생각하면 변한 게 아니라 더 솔직해진 거야.”

“사랑의 힘이란 게 대체 뭘까요? 어떤 분이 그러셨거든요. 사랑의 힘으로 못 이겨낼 건 없다고.”

“유치하게 들리지만 무시할 수도 없지. 필렌을 보면 더욱 그렇고.”

작게 웃던 벨솔이 화들짝 놀라며 일어섰다. 밀레나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휴게실 밖, 연구실 중심부에서 연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밀레나! 미안한데, 가하란 깨워서 돌아가 줄래?”

“문제가 생긴 건가요? 저도 도울게요.”

“큰 문제는 아닌데 내가 좀 집중해야 해서. 내일 시간 된다고 했지? 내일 찾아와.”

씨근덕거리며 휴게실 문을 열고 나가는 벨솔이었다. 슬쩍 바라봤는데 파이프를 보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방해해선 안 될 것 같다.

밀레나는 가하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모포째로 등에 업었다.

“내일 다시 올게요!”

인사를 남기고 잽싸게 연구실 밖으로 나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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