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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158화 (131/558)

제158화

입이 근질거렸지만 말하지 않고 잘 넘어갔다. 가하란은 닫힌 문을 보며 작게 숨을 토해냈다.

정령세계에 다녀온 일, 거기서 겪은 일.

전부 꺼내놓고 달이 뜰 때까지 얘기하고 싶었다. 아빠와 민 교수의 경고가 없었다면 분명 털어놓았을 것이다.

일단은 참아야 한다. 특이한 일을 겪었다면 우선 브라인과 민 교수에게 상담해야 했다.

벨솔 교수가 못 미더운 건 아니나 약속은 약속이니까.

가하란은 유사 정령으로 다가갔다. 의식을 집중하고 형태를 이루는 선을 찾아봤다.

표면에 가느다란 실이 보였다. 정령세계에서는 모든 형태가 선으로 변했는데.

원인이 뭘까?

가하란은 손으로 눈가를 매만졌다. 정령세계와 현실세계의 차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몸이었다.

사슴은 ‘정신체’란 단어를 사용했다. 퀼비언도 같은 말을 했었고.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이 아닌 정신만으로 이루어진 형태가 정신체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껍데기라고 볼 수 있는 건가?”

가하란은 손등을 살짝 꼬집었다. 늘어나는 살점이 보인다. 산페르 말에 따르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한정된 정보’였다.

정신을 집중했다. 눈 가운데가 따끔거리면서 피부를 이루는 선들이 보였다.

선이야말로 본래의 모습.

눈이 점점 저려 온다. 동시에 선들이 붕괴하며 다시 피부로 돌아갔다.

가하란은 눈을 살며시 감고 눈두덩을 문질렀다. 본래의 형태를 계속 관찰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필요할 때만 짧게 쓰면 될 텐데…….

문제는 언제 필요한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정보를 오롯이 볼 수 있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으며, 꿈을 이루는 데 어떤 도움이 될까?

아직 알아야 할 것들이 하늘처럼 높고 바다만큼 깊었다.

가하란은 눈에 힘을 준 채 유사 정령 주변을 빙빙 돌았다. 보이지 않던 마력선이 이제는 뚜렷이 구분된다.

오밀조밀 엮인 마력선.

의미 없이 새겨진 선은 없을 것이다.

“최초의 오토마타.”

가하란은 눈앞에 새겨진 마력선을 보았다.

다른 선들은 뜻을 알 수 없으나, 지금 눈앞에 있는 선만큼은 의미부터 발음까지 모두 읽어낼 수 있었다.

-최초의 오토마타로부터 태어난 마흔세 번째 아이. 언젠가 이 문구를 발견할 후학들에게 묻고 싶네요. 그대들은 도달했나요? 감정으로 회전하는 톱니바퀴에.

최초의 오토마타.

이 문구가 눈에 들어와서 벨솔에게 질문했다.

누가 만들었는지, 언제 만들었는지, 어떻게 만들었는지. 누구도 알지 못하는 마법공학품.

“마흔세 번째.”

눈앞의 유사 정령은 최근 제작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여기에 적용된 마력선 도안은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이리라.

마흔세 번째 아이라는 건 마흔세 번의 수정이 있었다는 건가?

가하란은 겹겹이 쌓인 마력선을 바라봤다.

어지러운 선들도 처음에는 단순한 모양이었을 것이다. 그 위에 학자들의 고심이, 연구가들의 노력이 덧대어져 지금의 모습이 됐을 테고.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 하나하나가 역사였다.

동시에 궁금증이 커진다.

최초의 오토마타, 그곳에 새겨진 마력선은 어떤 형태였을까?

찬물을 들이켰을 때처럼 찡한 두통이 머리를 관통했다.

다시 눈을 감고 안정을 취했다. 눈을 쓰면 쓸수록 피로감이 배가 됐다.

어쩌면 열병을 앓았을 때처럼 크게 아플지도 모른다. 되도록 조심해서 써야 할 것이다.

오늘은 여기서 멈출까,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딱 하나. 확인하고 싶은 게 남아 있었다.

정령세계에 이끌려 가기 전, 선명하게 들려왔던 목소리.

“그것은 하늘을 갈망한 자의 부단한 노력이었고.”

들었던 말을 되뇌며 의자를 가져왔다. 폴짝 뛰어 유사 정령 위로 올라갔다.

여기쯤이었는데.

집중해서 살피자 흰 점이 눈에 들어왔다. 눈이 뜨이고 나니 더욱 선명해진 점이었다.

선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눈앞으로 떠올랐다. 가하란은 재빨리 층과 층을 잇는 선을 찾아냈다.

한번 해봐서 그런지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여기였어.”

층과 층이 단절된 곳을 찾았다.

새로워진 눈으로 보니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있었다.

나눠진 곳을 기점으로 위쪽은 일정한 패턴을 지닌 마력선이었다. 선의 진행 방향이나 꺾임이 비슷했다.

반면 아래쪽은 전혀 다른 형태를 지녔다. 보다 명쾌하고 막힘이 없다.

겹겹이 쌓인 위쪽 마력선들은 겹치는 모양과 의미를 잃고 끊긴 곳이 종종 보였는데, 아래쪽은 펜촉을 떼지 않고 그림을 그린 것처럼 매끄러웠다.

확연히 느껴지는 통일감.

그 순간 깨달았다.

단절된 층을 기점으로 위쪽 마력선은 여러 사람의 지식으로 만들어진 거고, 아래쪽은 단 한 명의 작품이구나.

실력이 뛰어난 화가들도 시차를 두고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야 한다면 분명 어그러지는 부분이 생길 것이다.

시대마다 쓰이는 붓의 형태도, 염료의 질감도, 색을 채워 넣는 형식도 바뀔 테니까.

가하란은 아래쪽 마력선을 들여다봤다.

누구일까?

혼자서 이 마력선을 고안한 사람은.

천천히 선을 따라 눈동자를 굴릴 때였다.

목소리가 되살아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그것은 하늘을 갈망한 자의 부단한 노력이었고, 허탈한 실패였다. 인생은 트라우마를 극복해도 새로운 트라우마에 걸려 넘어지고 마는 희극이라지만, 연이은 실패에 내 영혼이 닳는 느낌이다.

씁쓸한 의미와 달리 목소리는 경쾌했다. 이런 억양을 어디서 들어 봤는데.

기억을 되짚던 가하란은 아, 하고 탄성을 냈다. 극장. 무대 위 배우들과 말하는 방식이 비슷했다.

과장해서 어조에 힘을 주고 노래를 하듯 음률이 느껴지게 말하는 것.

머리에 직접 전달된 여자 목소리에 다시 집중할 때였다.

-얼마나 고독한…… 잠깐만! 거기 올라가면 안 된다니까. 크랜베리, 블루베리!

여자의 다급한 목소리 사이로 ‘야아옹’ 장난기 어린 울음이 들려왔다.

음성뿐이지만 어떤 상황인지 그림이 그려진다. 웰턴이 키우는 고양이도 시도 때도 없이 난간으로 올라갔다. 가지 말라고 하면 놀리듯 올라가 긴장하게 만드는 녀석.

목소리의 주인공 역시 고양이들에게 시달리는 것 같다.

크랜베리와 블루베리. 낮게 그르릉 거리는 게 크랜베리 같고, 높은 소리로 우는 게 블루베리 같았다.

가하란은 한 편의 거리 연극을 감상하듯 눈을 감고 목소리를 들었다.

-엄마 말 들으라고 했어, 안 했어? 응? 거기 올라가면 혼난다고 했지! 그리고 엄마가 녹음 중일 때는 방해하면 안 되는 거야. 후배들한테 전할 멋진 소리인데, 이런 식으로 끼어들면 안 돼.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진지하게 설교 중인데 고양이들은 계속 울어댈 뿐이었다.

그 뒤로 몇 초간 침묵이 이어졌다. 소리의 공백동안 가하란은 ‘녹음’이란 단어를 곱씹었다.

소리를 저장해 놓았다가 전달하는 마법인가?

-마흔세 번째 녹음도 엉망이 됐네요. 선배로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근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다른 녹음들도 이런 식이라 별로 멋져 보이진 않겠네요.

마흔세 번의 녹음.

그리고 최초의 오토마타로부터 태어난 마흔세 번째 아이.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이 마력선으로 문장을 낸 사람이다.

명쾌하고 반듯한, 혼자서 그려낸 하부의 마력선 구조 역시 이 사람의 작품인 걸까?

언제, 어디에 살던 사람일까.

벨솔은 몇백 년 전 왕조를 언급했었다. 그 시대 사람이라면…….

-근데 음성을 남기면서도 한 가지 고민되는 게 있어요. 만약 이 목소리가 수백 년 뒤에 발견된다면, 내 말의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가하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런 걱정을 하는 걸까.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말의 형태가 변하는 건 아닐 텐데.

-물론 알아들을 가능성이 커요. 왜냐하면 언어는 변하지 않으니까요. 여기서 조금 떨어진 헤반데 왕국에 갔을 때였어요. 그곳 역시 우리와 같은 말을 쓰고 있었죠. 억양은 약간 달랐지만 소통에 문제는 없었죠.

이상한 고민이었다.

말은, 문자는 어느 곳에나 똑같은 거였다. 아빠도 설명해 줬다. 시대를 뛰어넘고, 종의 차이마저 초월한 것이 언어와 문자라고.

옛날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했던 걸까?

-너무나도 당연해요. 언어는 변치 않으니까. 그곳에서 만난 바라라의 딸들 역시 대화가 잘 통했어요. 그래요, 이건 해가 뜨는 것처럼, 우리가 잠드는 것처럼, 우리가 태어나는 것처럼, 우리가 결국 죽게 되는 것처럼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에요.

의심할 필요가 없는 진리.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가하란은 말로 설명 못 할 이질감을 느꼈다.

-불변의 진리. 세계를 관통하는 이치. 근데 어느 날부턴가 나는 이런 생각을 해요. 왜 그게 당연한 거지? 당장 식문화만 봐도 그래요.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받죠. 모든 게 그래요. 모든 문화는 갖춰진 환경에 따라 변모하기 마련이에요. 근데 우리가 쓰는 언어는 어째서 똑같을까요? 왜 그럴까요?

가하란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이는 건 한정된 정보.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는 것만 보는 세계.

그렇다면 말은?

-물론 신의 뜻이겠죠. 신이 모든 걸 창조해냈을 때 모든 종의 언어를 통일해 놨겠죠. 이걸 의심해서는 안 돼요. 잡혀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쓱싹, 당할테니. 근데 말이죠, 난 여전히 이상해요. 신은 왜 우리에게 통일된 언어를 제공한 거죠? 무엇을 위해서? 아!

가하란은 눈을 깜빡거렸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굳건히 잠긴 ‘왜’의 자물쇠가 풀릴 것 같으면서도 안 풀린다.

그러는 사이 목소리는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한 가지 더. 길이는 재는 미터법은 누가 제창한 거죠? 우린 왜 이 도량형을 받아들이게 된 거죠? 이 또한 신이 제공한 편의성일까요? 그렇다면 참…… 상냥한 신이네요.

눈앞에 펼쳐졌던 입체적인 마력선이 한순간 어그러졌다.

가하란은 분주히 눈을 움직였다. 이리저리 엮이며 뜻을 만들어내던 마력선이 가닥가닥 끊기며 사라졌다.

선을 붙잡아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가하란은 마력선을 들여다보았다.

큰 구조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모든 길이 완벽하게 이어졌던 아래쪽 마력선 구조에 작은 구멍이 생겼다.

그 구멍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하란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다시금 집중해 보았다.

선명했던 목소리는 되살아나지 않았다.

한 번으로 끝.

제거된 선은 정보의 소실을 의미했다. 이건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뭐였지?”

가하란은 조금 전 들은 말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기억나는 건 고양이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잊어버린 걸까?

아닐 것이다. 정보는 머릿속으로 받아들였다.

지금도 단편적인 단어들은 생각난다. 고양이, 다른 문화, 말, 그리고 상냥한 신.

하지만 조합이 되질 않았다.

사이를 이어줘야 할 문장과 단어들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아… 이런 뜻이구나.”

가하란은 산페르가 했던 말을 되뇌었다.

“아직은 방대한 자료일 뿐. 그걸 정리하고 구분할 수 있는 식견이 갖춰져야 비로소 정보가 된다.”

자료는 머릿속에 남아 있다.

단지 정보로써 활용 못 할 뿐이다.

가하란은 바닥으로 내려와 부랴부랴 옆면에 새겨진 글귀를 찾았다.

-최초의 오토마타로부터 태어난 마흔세 번째 아이.

그 밑에 적혀 있던 문장이 사라진 상태이었다.

확실한 점이 하나 생겼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부끄럼쟁이라는 것이다.

가하란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바닥에 누웠다.

“마흔세 번째. 그렇다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거겠지?”

위대한 탐험가, 거병 마에스트로.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꿈과 이번 사건은 밀접해 있었다. 오래된 오토마타, 유사 정령을 하나씩 쫓아가다 보면 대 많은 걸 알게 되겠지?

두근거린다.

얼른 찾아 나서고 싶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가하란은 들뜬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크랜베리와 블루베리.

두 고양이의 촐랑거리는 울음이 머리맡에 맴돌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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