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7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밝았어요. 그러다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어두워졌고요.”
“그래, 그래.”
“엄청 아팠어요. 너무 아파서 울지도 못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또 안 아픈 거예요. 안 아파서 좋았지만 동시에 무서웠어요. 또 고통이 찾아올까 봐….”
“벌써 세 번째 들은 말이야.”
가하란은 네 다리를 굽히고 옆에 앉아 있는 사슴을 바라보았다.
“못 돌아오는 줄 알았어요. 그대로 빛에 녹아서 사라지는 줄 알았어요.”
“근데 돌아왔잖아. 그러면 된 거야.”
가하란은 입 안쪽에서 꾸물거리는 울음을 꿀꺽 집어삼켰다.
여전히 몸이 떨렸다. 눈도 쓰라렸고. 밝은 곳에서 갑자기 어두운 곳으로 이동한 것처럼 시야도 흐리멍덩했다.
“눈 감고 있어. 이제는 감는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알 테니까.”
사슴이 날개를 뻗었다. 보드라운 날개가 가하란의 몸을 덮어 주었다.
“사슴님.”
“왜.”
“고마워요.”
“고마우면 약속을 꼭 지켜. 난 너를 통해 현신해 층 너머를 구경할 테니까. 네 감각을 통해 바라보는 그쪽 세계는 무척이나 흥미롭거든.”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머리맡에 닿은 사슴의 앞다리에서 온기가 전해진다.
“사슴님.”
“또 왜.”
“사슴님도 정령이잖아요. 그냥 층을 넘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저희 집 근처에서 사는 정령들은 자유롭게 오가는 것 같던데.”
“이제 좀 살 만한가 봐? 입이 또 쉬질 않네.”
“사슴님이 곁에 있어서 안심되거든요.”
“…내가 널 돌본 게 잘한 짓인지 모르겠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사슴이었다.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궁금한 것보다는 침묵이 무서워서 입을 연 거니까.
심상세계에서 아주 오랫동안 혼자 있었다.
빛에 뒤채이고 어둠에 치이고.
타들어 가는 고통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아 매번 고래고래 비명을 질러야 했다.
몇 번이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실을 놓아버릴걸.
뒤돌아서 그림자를 바라볼걸.
빛 따윈 아무래도 좋았는데.
하지만 신기하게도, 눈이 불에 익어 저며지는 고통이 더해갈수록 마음 한구석에 낯선 감정이 솟아났다.
그건 오기였다.
반항심 같기도 했다.
좋아, 계속 울 거야. 계속 소리칠 거야. 근데, 손은 놓지 않을 거야.
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빛 속에서 선 하나만을 붙잡고 울고 기절하길 계속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이 떠진 것이다.
심상세계에서 겪었던 일들이 마치 꿈만 같았다.
손가락 발가락을 다 동원해도 모자랄 정도의 시간을 그 안에서 보낸 것 같은데, 돌이켜 보면 눈 한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네?”
위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사슴이 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질문해놓고 딴생각 중이야?”
“얘기 안 해주시는 줄 알았어요.”
“…아무튼, 우리는 층을 넘을 때 감각 대부분을 박탈당해. 전부 사라진다고 봐도 무방하지. 층 너머의 세계가 보이고, 어느 정도 구분도 되지만 상세한 건 알 수 없어.”
가하란은 수다쟁이 정령들을 떠올렸다.
“제가 아는 정령들은 종일 떠들기만 했어요.”
“그거 외에는 할 게 없으니까.”
“감각을 박탈당한다는 건….”
말끝을 흐리며 사슴을 바라보았다.
“쉽게 말하면 무채색 세상에 떨어지는 거야. 아무런 도움 없이 층을 넘게 되면, 밋밋한 세상만 보게 되는 거지. 무지개조차 회색빛으로 보인다면 대충 이해가 되지?”
“세상이 그렇게 보이면 재미없겠네요.”
“맞아. 재미가 없어. 그래서 도움 없이 층을 넘어가는 놈들은 둘 중 하나야. 죽기 위해 가는 놈, 혹은 이상한 집착을 가진 놈.”
“이상한 집착이요?”
“뭐라 한정 지을 순 없어. 넘어가서 모래알을 세는 놈도 있고, 토끼 굴을 탐방하는 놈도 있고 그러니까.”
가하란은 끔찍했던 정령을 떠올렸다. 핀들론에게 저주를 퍼붓던 정령을.
“사람에게 해선 안 될 말을 하는 정령도, 어떤 집착에 빠진 건가요?”
“그런 놈들도 있지. 언어의 힘을 탐구하는 놈들. 층 너머의 존재를 말로 죽이고자 하는 애들도 더러 있어. 다들 심심하니까 이것저것 해보는 거지.”
“그건 잘못된 거예요.”
“왜?”
“…해선 안 될 짓이니까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사슴이 가하란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뜸 들여 말했다는 건 너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거겠지? 네가 한 말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지.”
“…알아요. 타챠 아저씨가 그랬어요. 다름을 알라고. 층 너머는 모든 게 다르니까 이곳의 상식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사슴이 고개를 쳐들었다.
녹빛 하늘이 은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불그스름한 기운이 서쪽에서 몰려와 은빛 하늘과 뒤섞인다.
“당장 보이는 저 하늘부터 달라. 나는 이제 너희의 생리를 알지만, 이곳에서만 산 이웃들은 너희들을 보며 의아해할 거야. 왜 저렇게 번식에 목을 매지? 왜 저렇게 영역을 욕심내지? 왜 저렇게 지식 전달에 안간힘을 쓰지?”
“다르네요.”
“달라.”
“그래도 사슴님은 이해해 주니까 괜찮아요.”
“나야 이것저것 구경한 게 많아서 그렇지.”
가하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저 먼 곳을 바라봤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희미하지만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것 같다.
“사슴님. 저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다음엔 이쪽으로 오지 말고 네가 날 그쪽으로 초대해. 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방법을 알아내면 언제든 초대해 드릴게요.”
“그래. 열심히 찾아내봐. 난 오래된 형태처럼 자력으로 널 찾아낼 수 없으니까.”
목소리가 점점 더 선명해진다.
가하란은 사슴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또 봐요.”
사슴이 앞발을 살짝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뭔가 부끄럽다는 눈빛이다.
가하란은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근데 사슴님.”
“왜?”
“이제 화 안 내시네요.”
“뭘?”
“제가 사슴님이라고 불러도 괜찮은 거죠?”
“…내가 뭐라고 한들 네가 들어먹겠냐? 그러니까 포기한 거야. 수긍한 게 아니라.”
“알겠어요. 그렇다고 해둘게요.”
코웃음 치던 사슴이 날개를 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가하란은 멀어지는 사슴을 지켜보다가 몸을 돌렸다.
매번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오고, 튕겨 나갔지만 이번에는 정신을 유지한 채 돌아갈 것이다.
몸에 남아 있는 두려움을 툴툴 털어냈다. 괜찮다는 확신이 들었다.
가하란은 눈을 똑바로 떴다.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세계가 시야 가득 잡힌다.
긴장 섞인 숨을 한 모금 마시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누가 설명해준 것도 아니었다.
책을 뒤적거려 배운 것도 아니었다.
심상세계에서 몸부림치며 빠져나온 순간,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천천히 눈을 떴다.
굴러다니는 바위가 선으로 변했다. 하늘을 가로질러 가는 거대한 뱀 역시 선으로 변했다.
꿈틀대는 길고 짧은 선 안에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다를 뿐, 틀린 건 아니다.
처음 봤을 땐 질겁하고 두려움에 떨었으나 지금은 괜찮았다.
저것이 본래의 모습이라는 걸 이제는 아니까.
눈을 깜빡였다.
선의 총합체가 사라지고 익히 봐오던 세상으로 변했다.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는 것만 봐온 세상. 하지만 이 세상이 거짓되거나 틀린 건 아닐 것이다.
산페르라면 깐깐한 목소리로 ‘틀린 세상’이라고 하겠지만, 과연 그럴까?
본질이 만들어낸 그림자도 나름의 멋과 쓸모가 있는 건 아닐까?
모든 걸 알고 있는 빛도 좋지만, 조금 가려져 있는 그림자도 좋다.
“예쁘니까 좋잖아요.”
가하란은 백색 산 너머를 보며 말했다. 산페르 아저씨라면 분명 이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정면을 보며 눈을 갸름하게 떴다.
색채의 세계와 선의 세계가 뒤엉켜 있었다.
가하란은 주변에 있는 수많은 선 중 한 가닥을 살며시 쥐었다.
이곳 너머와 연결된 선이었다.
눈으로 선을 좇으며 걸음을 옮겼다.
* * *
연구실 문을 열었는데 애가 안 보였다. 어디로 간 거지?
벨솔은 가하란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헛웃음을 냈다. 유사 정령 위쪽에 신발이 보인다.
널브러진 의자를 똑바로 세우고 위로 올라갔다. 작은 몸을 웅크린 채 유사 정령 위에서 잠이 든 가하란이 보였다.
“용케 안 떨어졌네.”
조금만 뒤척여도 미끄럼틀 타듯 아래로 굴러떨어졌을 텐데.
벨솔은 가하란을 살며시 흔들었다.
“꼬마야. 일어나.”
어깨 쪽을 몇 번 더 흔들자 살며시 눈을 뜨는 가하란이었다.
“잘 잤어?”
가하란이 멍한 눈으로 두리번거린다. 잠결에 몸을 움직이다가 떨어질 수 있으니 팔을 붙잡았다.
“…다녀왔습니다.”
“아직도 꿈나라네. 그래, 다녀왔다고 치자.”
꿈에서 여행을 떠난 모양이다.
픽 웃으며 가하란의 손을 잡아 줬다.
“조심해서 내려와.”
바닥으로 내려온 가하란이 길게 하품했다.
“위에 올라가서 자는 건 위험하니까 다음부턴 그러지 마. 알겠지?”
“네.”
대답은 잘하네.
“살펴보니까 별거 없지? 평소와 달리 기재도 다 빼놓았고, 작동하는 기구도 없으니까.”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질려서 잠이 든 것이리라. 애들의 집중력은 오래가지 못하니까.
“여기 말고 내 연구실로 가자. 거기 재미있는 거 많아.”
금방 네, 라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가하란은 입을 꾹 다물고 유사 정령만 바라봤다.
유사 정령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든 모양이다. 벨솔은 곁으로 다가가 쇳덩이에 손을 올렸다.
“여기 자주 왔잖아? 그러면 이것도 많이 봤을 테고.”
“네. 엄청 많이 봤어요.”
“그러면 별로 신기할 것도 없겠네. 작동할 때야 보는 맛이 있지만, 지금은 침묵 상태고.”
팅팅, 손톱으로 유사 정령 표면을 두드렸다. 마력선 최하층에 희미한 마나가 남아 있겠지만 작동시키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백날 바라봐 봤자 변화가 없다는 뜻이다.
“교수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물어봐.”
“이게 최초의 오토마타인가요?”
“아니. 이건 카피본이야. 흔하디흔한 베이스 아키텍처지. 물론 연구단지 내에서나 흔하다는 거지, 바깥에선 이것도 귀해. 일단 재료부터 비싸니까.”
“복사품….”
가하란이 유사 정령을 쓰다듬었다.
“복사했다면 다른 오토마타들도 이것과 똑같나요?”
“베이스는 어떤 오토마타든 똑같아. 거기에 덧씌워진 마력선과 부품이 다를 뿐. 근데 너 오토마타와 유사 정령이 다르다는 건 알고 있니?”
“네. 알고 있어요.”
가하란이 유사 정령에서 손을 뗐다.
“최초의 오토마타는 어디에 있어요?”
“글쎄.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설마 잃어버린 건가요?”
“한때는 나타 왕국에 보관돼 있었어. 근데 웃기게도 카피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뒤섞여 버렸대. 그러다 유실돼 버린 거지.”
“나타 왕국이요?”
“제국의 뿌리가 되는 곳이야. 아주 먼 옛날이지.”
가하란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되물었다.
“근데 중요한 물건 아니에요? 도둑맞은 것도 아니고 관리를 잘못해서 잃어버리다니.”
벨솔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확한 내막은 나도 몰라. 이미 몇백 년 전 일이니까. 그리고 역사적, 학술적으로 중요한 물건이지만 지금 당장 필요한 물건은 아니라.”
유사 정령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미 완벽한 베이스 도안과 카피본이 존재해. 오픈소스라고 해서 거병 연구가라면 누구든 알고 있는 지식이야. 일반 시민도 간단한 절차만 밟으면 자유롭게 볼 수 있을 정도로.”
“흔해져서 더는 찾을 필요가 없는 거네요.”
“정확한 위치를 안다면야 안 찾을 이유도 없지만, 인력과 자원 동원해 열심히 찾아야 할 이유도 딱히 없지. 뭐, 나름 열심히 찾고 있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벨솔은 가하란을 툭 건드렸다.
“여기 더 있고 싶어?”
“조금만 더 있어도 돼요?”
“나야 상관없지. 난 옆 연구실에 있을 테니까 놀다가 와. 아까처럼 위험한 곳에서 자진 말고.”
“네!”
혼자 노는 걸 좋아하는 애도 있으니까. 벨솔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연구실 출입구로 걸어갔다.
문을 닫고 나가기 전 가하란에게 물었다.
“근데 심심하지 않겠어? 이젠 구경할 것도 없을 텐데.”
“괜찮아요. 이야기를 찾아내면 돼요.”
“이야기?”
벨솔은 삐뚜름하게 미소 짓고는 문을 닫았다.
“애는 애야. 알 수 없는 소리를 한다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