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선들의 집합체.
세상 모든 것들이 구불거리는 선으로 변해 있었다.
저 멀리, 몸에 불을 두르고 지나가는 뱀을 자세히 살폈다.
일렁거리는 불꽃이 가닥가닥 붕괴하더니, 이윽고 한데 어우러진 선으로 변했다.
인식하는 순간 선으로 변하고, 곁눈질로 보면 평소 보던 것처럼 일반적인 형태를 유지했다.
어떻게 된 걸까?
기분 나쁜 감각이었다.
익히 봐온 세상이 아니었다.
외톨이가 된 것 같았다. 압도적인 고독감에 입만 벙긋거렸다.
이런 걸 보려고 눈을 뜬 건 아니었다.
색색들이 빛나는 아름다운 하늘과 신비하게 생긴 정령, 기묘한 형태의 자연을 보고 싶었지…… 괴이하게 엮인 선들을 보고 싶었던 건 아니다.
그때였다.
눈이 타들어 가듯이 아팠다.
현실 세계에서 겪었던 격통이 다시금 찾아왔다.
“아아악!”
가하란은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발버둥 치며 비명을 질렀다.
“다시 움직일 수 있나 보네.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진 것 같지는 않지만.”
사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너무 뜨거워요. 눈이 타버릴 것 같아요!”
“많은 걸 봐서 그래. 평생 굴에서 그림자만 보고 살던 놈이 갑자기 빛을 봤으니 얼마나 아프겠어.”
눈을 뽑아 버리고 싶었다. 이 통증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실명하는 것쯤이야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였다.
“꼬마야. 아까처럼 눈을 감아. 감각을 닫고 그 통증을 겪기 전 시점으로 돌아가는 거야. 정보를 차단하는 건데… 말로 하려니까 애매하네.”
정보를 차단.
가하란은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땅에 박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한 가닥의 실.
그걸 붙잡은 순간 세상이 변했다.
그렇다면 그 실을 놓아 버린다면?
의식의 안쪽으로, 안쪽으로.
아무것도 없는 어둠을 상상하며 실을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눈을 감아도 밝았다.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고개를 돌리고 싶어도, 가리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빛은 사방에 있었고 집요하게 눈을, 전신을 괴롭혔다.
방법이 있을 거야, 방법이.
고통 속에서 정신을 붙잡은 채 궁리할 때였다.
-생각보다 일찍 열렸네.
짙은 쪽빛을 띤 물이었다.
발밑에서 차오른 물이 온몸을 덮었다. 물은 사방으로 뻗어나가 이윽고 강렬한 빛을 차단해 버렸다.
긴장감이 탁 풀리는 안락함.
가하란은 이 물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산페르 아저씨?”
눈을 살며시 뜨며 말했다.
코앞에 푸르게 반들거리는 벽이 있었다. 그 벽이 눈동자라는 걸 알아차린 순간, 가하란은 온몸을 떨며 연약한 신음을 흘려보냈다.
-겁낼 필요 없어. 네가 항상 봐오던 모습이야. 단지 제대로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일 뿐.
살짝 가시가 돋친 듯하지만 정이 느껴지는 목소리. 몸을 찍어 누르는 위압감이 서서히 흩어졌다.
가하란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목을 최대한 뒤로 꺾었는데도 눈동자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반들거리는 푸른 눈동자가 스르륵 움직였다. 주변을 감싼 물들이 물보라를 일으켰다.
눈동자가 살짝 움직였을 뿐인데 세상이 요동쳤다.
“아, 아저씨 맞아요?”
-맞아.
“여기는 어디예요?”
-네 안. 너의 심상세계. 내가 잠깐 네 영역으로 들어왔어. 내버려 두면 자아가 타들어 갈 것 같았으니까.
타들어 간다.
가하란은 떨리는 손으로 눈가를 매만졌다. 불에 덴 것처럼 쓰라리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눈이 열린 거야.
“이상한 선과 실들을 봤어요. 제가 봐왔던 것들이 다 선으로 변했어요.”
-너한테는 선으로 보이는구나.
부글부글, 거대한 눈동자 주변에서 거품이 일었다. 아저씨는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근데 순서가 잘못됐어. 선으로 변한 게 아니야. 원래 그 모습이었어. 단지 각각의 지성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로 교환됐을 뿐이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보고 싶은 것, 볼 수 있는 것만 봐왔다는 거야. 모든 지성체는 거름망을 갖고 있거든. 세계의 모든 정보를 일시에 받아들이면 미쳐 버리거나 소멸하거나 아니면 침묵해 버리니까.
눈을 감았다 떴다.
작게 변한 산페르가 앞에 있었다.
-날 제대로 봐봐.
“싫어요. 무서워요.”
-두려워하지 마. 내가 정보를 차단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여긴 네 심상세계야. 네가 바란다면 모든 걸 막아낼 수 있어.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에 용기가 살짝 생겼다.
가하란은 사건을 되짚어봤다. 격통이 시작된 순간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실 한 가닥이 물을 뚫고 내려왔다.
“이 실! 이걸 붙잡으면 세상이 이상하게 변해요.”
-나한테는 작은 기포로 보여. 각자의 취향이 반영된 거니까 큰 문제는 없지.
“정말 붙잡아도 될까요?”
-선택은 언제나 네 몫이야. 여기서 완전히 놓아버려도 돼. 네가 그걸 바라면 심상세계는 널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 아마 활짝 열린 눈도 조만간 닫히겠지.
눈이 닫힌다는 말에 얼굴이 폈다.
감게 되면 더는 아프지 않겠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생긴 것이다.
타챠의 말대로 놓아버리면 된다. 이해할 필요 없이 흘려보내 버리면 된다.
그러면 일상으로 돌아가서 평소처럼…….
가하란은 가느다란 실을 보았다.
후, 하고 불면 이 실은 저 멀리 사라져 버릴 것이다.
“아저씨.”
-왜.
“눈을 감으면 아프지 않겠죠?”
-그럴 거야.
“아빠가 말했어요. 건강한 게 제일이라고.”
-그렇지.
“그러면 전 이 선을 멀리 버려야 해요. 그게 당연한 선택이에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야. 결정은 네 몫이야.
길게 늘어진 실을 따라 시선을 올렸다.
“이걸 놓아버리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거겠죠?”
-응. 돌이킬 수 없어.
가하란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왜 망설이고 있지?
아픈 건 싫잖아. 그 이상한 세계를 또 보고 싶은 건 아니잖아.
“모르겠어요.”
입을 열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뭘?
“아픈 걸 생각하면, 그 괴상한 선들을 생각하면 전 이걸 잡지 말아야 해요.”
-돌아서는 것도 방법 중 하나야. 언제나 정면만 보고 살 수 없어. 무엇보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고.
“사슴님이 그랬어요. 모두가 동굴 속에서 그림자만 보고 있다고.”
-빛을 보면 눈이 타들어 가니까. 그렇기에 그들은 나름의 방식을 찾아낸 거야.
“그동안 제가 봐왔던 건 전부 그림자인가요? 잘못된 것들인가요?”
-그건 내가 대답해줄 수 없어. 옳고 그름은 네가 정의하는 거야.
“똑바로 본다는 건 괴롭고 징그러워요.”
-그렇다면 눈을 감아.
“하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머릿속이 정리되질 않았다.
그 끔찍한 고통을 참아가며 선을 붙잡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세상과 동떨어진 기분을 맛보면서 빛을 봐야 할 이유가 있나?
“아까 그러셨죠. 세상은 원래 그런 모습이었다고. 단지 제가 보고 싶은 것, 볼 수 있는 것만 본 거라고.”
-그래.
“아저씨는 괜찮은 거예요? 저랑 똑같은 걸 보고 있잖아요.”
-난 본디 그렇게 존재했으니까. 나에겐 고통도 어려움도 없어.
가하란은 산페르의 눈을 바라봤다.
“세상은 정보라고 하셨죠?”
-맞아. 하지만 지금 단계에서 네가 보고 있는 건 정보라고 할 수 없어. 방대한 자료지. 그걸 정리하고 구분할 수 있는 식견이 갖춰지면, 그제야 정보가 되는 거고.
“정보… 자료라는 건 대체 뭐죠?”
산페르가 잠깐 침묵한 뒤 말했다.
-있음과 없음의 교차. 있으면서 동시에 없는 것의 모음. 점이자 파동인 것들의 집합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무슨 말인지 알고 싶어?
“…네.”
-그렇다면 네가 뭘 해야 할지 알고 있지?
가하란은 실을 바라봤다.
“전 아픈 게 싫어요.”
-누구나 그래.
“남들과 다른 세상을 보고 싶지만, 혼자 이상한 걸 보고 싶지는 않아요.”
-동질감은 소중하지.
“이런 이상한 선은 무시하는 게 옳아요!”
-하지만 넌 결국 붙잡고 말 테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심정으로, 하지만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맞아요. 전 궁금한 건 참을 수 없거든요.”
-죽도록 아플 텐데?
“잡자마자 후회하겠죠. 울면서 살려달라고 할 거예요.”
-그걸 붙잡는 순간, 난 이곳에서 밀려날 거야.
“곁에 있어 주면 안 돼요?”
-최대한 버텨볼게. 하지만 계속 있을 순 없어.
고개를 끄덕이며 느리게 손을 내밀었다. 살랑거리는 선이 손아귀에 들어왔다.
이제 남은 건, 강하게 움켜쥐는 것뿐이다.
“아저씨. 다음엔 아저씨 등에 올라타 볼래요.”
-한 번 정도는 태워줄게.
떨림이 멎었다.
숨을 고른 뒤 마지막 질문을 건넸다.
“근데 그동안 어디에 계셨던 거예요?”
-이따가 말해줄게. 네가 무사히 돌아오면.
대화가 끝났다. 가하란은 눈을 질끈 감으며 선을 붙잡았다.
몸을 감싸던 물이 한순간 흩어졌다. 거대한 산페르가 빛에 떠밀려 저 멀리 사라진다.
온다.
가하란은 세상을 덮는 빛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 * *
사슴님.
정말 해괴한 호칭이었다.
“이름이라.”
자빠져 있는 꼬마를 내려다봤다.
가장 오래된 형태의 냄새가 주변에서 진동했다. 기왕 살피러 올 거면 본체도 대동하지.
하긴, 그들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었다.
샬롯이란 인간족 꼬마를 자기 딸이라 칭하질 않나, 인간 껍데기를 쓴 괴물과 도깨비를 사냥하질 않나.
홀로 오롯이 존재할 수 있는 자들이 자꾸만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 역시 외로움을 느끼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고대로부터 홀로 존재해온 것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잠깐의 유흥일지, 아니면 새로운 도전일지.
저 멀리서 차가운 불꽃이 다가왔다. 지면을 휩쓸며 오는 소멸의 기운을 얌전히 바라보다가, 날개를 활짝 펴 꼬마를 감쌌다.
“언제 일어날 거냐?”
차가운 불꽃이 날개를 타고 비산했다. 연약한 생명을 보호하는 건 꽤 수고스러운 일이다.
꼬마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자고 있었다.
아니, 자는 게 맞나?
죽은 건지, 자는 건지, 기절한 건지.
이제 분별할 수가 없었다.
“뭐 해?”
땅에서 솟아난 이웃이 질문을 건네왔다.
“이거 돌봐주고 있어.”
“뭐 하러?”
“그냥. 별 이유는 없어.”
“그러면 내가 먹어도 될까? 입이 심심한데.”
가시가 돋아난 입을 크게 벌리며 다가오는 이웃이었다. 날개로 주둥이를 툭 쳤다.
“다른 거 먹어. 먹어봤자 맛도 모르면서.”
“그거, 너한테 중요한 거야?”
“몰라.”
“얼마 만이야? 네가 그런 것에 관심을 두고.”
“시간 같은 건 잊었어. 너무 지루한 개념이잖아.”
“그렇긴 해.”
이웃이 땅속으로 스며들며 말했다.
“참. 나 이름을 정했어.”
“뭔데?”
“‘울긋불긋’이야.”
“이름 같은 거 필요 없지 않아?”
“나도 그냥 지어봤어. 가장 오래된 형태처럼 근본에 각인된 이름은 아니지만, 그래도 좋더라고. 이름이 있다는 거 말이야.”
“그래?”
형태가 사라진 이웃의 목소리가 허공을 둥둥 떠다녔다.
“너도 이름을 지어보는 게 어때?”
“글쎄.”
담담하게 대꾸할 때였다.
나자빠져 있던 꼬마가 눈을 번쩍 뜨더니 몸을 일으켰다.
얼빠진 얼굴로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사슴님!”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사슴님. 저 진짜 아팠어요. 진짜 무서웠어요. 진짜…….”
목을 감싸 안으며 엉엉 우는 가하란이었다. 툭 밀면 무너질 것 같은 꼬마의 등을 바라보다가, 슬며시 날개를 움직였다.
“여기서 울어도 뭐 안 나와.”
“알아요. 그래도….”
“그만 비벼. 살갗 쓸리겠어.”
쭈뼛거리는 날개로 꼬마의 등을 토닥여줬다. 동시에 희미하게, 땅 밑에서 이웃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슴님. 괜찮은 이름 아니야?”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