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155화 (128/558)

제155화

무슨 소리지?

아주 작게, 하지만 분명하게 소리가 들렸다.

가하란은 주변을 살펴봤다. 쥐가 있는 걸까? 아니면 길 잃은 새가 들어온 걸까?

무채색 도구들 사이에서 움직이는 생명체는 없었다.

뭐였을까?

가하란은 둥글게 만 손바닥을 양쪽 귀에 가져다 댔다. 언젠가 조개를 귀에 댔을 때 들었던 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난다.

스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싸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소리. 출처를 알고 싶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소리가 나지는 않을 것이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든 생각에 아래를 보았다. 묵빛의 쇠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이유가 뭘까?

눈동자를 굴려봤다. 어둠을 덮어쓴 것처럼 검지만, 알게 모르게 붉은색이 감도는 쇳덩이.

항상 봐 온 유사 정령이다.

손바닥으로 몸을 지지하며 조금씩 움직였다. 이윽고 엉덩이로 깔고 앉았던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점이었다.

흰색 점. 검은색 바탕에 고독하게 남겨진 흰 점은 결코 먼지 같은 게 아니었다.

만져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머리에 맴돌고 있지만 이미 손은 나가고 있었다.

벨솔은 말했다. 커넥터가 끊겨 있으니 아무 문제 없다고.

점에 손가락이 닿았다. 온도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질감 역시 다르지 않았다. 물감으로 톡 찍어 놓은 듯한 점.

원래 이런 게 있었던가?

언제나 곁에 있던 유사 정령이지만, 꼭대기를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뛰어서 올라왔을 때도 상단부를 자세히 살피지 않았다. 작은 점 정도는 못 보고 지나쳐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왜일까.

원래는 없었던 점이라고, 방금 나타난 거라고 직감이 강력하게 주장했다.

만드는 과정에서 칠을 잘못한 것 같지는 않은데.

발견한 점을 손가락으로 문지를 때였다.

점이 희미한 빛을 띠며 왼쪽으로 번졌다. 가하란은 놀라서 손가락을 뗐다. 왼쪽으로 볼록해진 점이 다시 원형으로 돌아왔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분명 변했다. 이게 흰색 염료였다면 번진 채로 가만히 있었을 것이다.

보고 깨달았으니 재확인할 차례였다.

이번엔 왼손 검지로 점을 만졌다. 손가락 끝을 따라 점이 번졌다.

어디로든 뻗어나갈 수 있는 건가?

오른쪽으로 점을 이끌어 봤다. 변화가 없었다. 왼쪽으로만 늘어나는 것 같았다.

방향이 한정돼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눈이 따끔했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건….”

복잡한 선들이 유사 정령 표면에 나타났다. 어찌나 얽혀 있는지 어디가 시작점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었다.

가하란은 옆으로 고개를 뉘었다.

평면에 그어놓은 선처럼 보였는데, 옆에서 확인하니 층층이 쌓여 있었다.

보고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3센티미터가량 되는 좁은 공간에 몇 겹으로 이루어진 선들의 세계가 있었다.

슬며시 손가락을 뗐다.

살짝 떠올랐던 선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가하란은 주먹 쥔 손을 입가에 대고 골똘히 생각했다. 기묘하게 엉킨 선들을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생각은 길지 않았다.

“…마력선 도안.”

예전에 아빠가 보여준 마력선 도안과 무척이나 닮았다. 도안은 평면에 그려진 선이고, 방금 본 선은 입체적이었지만 형태가 비슷했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유사 정령에 나타난 마력선 또한 뜻이 있을 것이다.

미지의 세상을 발견했다.

마음껏 탐험할 수 있는 세계.

점에 손가락을 대고 왼쪽으로 슬며시 움직였다.

이제는 알 수 있다.

이건 점이 아니다.

이건 선의 시작이다.

개미굴처럼 복잡한 선의 세계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덴스 아저씨가 말하길, 마력선은 높은 수준의 언어라고 했다.

-세로로 살짝 그어진 이 선 안에 무수히 많은 뜻이 담겨 있어. 우리는 그중 사용할 수 있는 몇 가지 단어를 뽑아내 이용할 뿐이야.

간단한 선 안에 수많은 단어가 숨어있다면,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난해한 이 세계 안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스며들어 있을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얼른 이 안에 숨겨진 이야기를 발굴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조바심 낼 필요는 없었다.

탐험가는 언제나 침착해야 하며 멀리 내다봐야 한다. 할아버지가 해준 얘기였다.

가하란은 일단 흰 점에 집중했다.

겹겹이 쌓인 세계를 탐방하려면 표시가 필요했다. 헤매지 않도록 도와줄 표지판이.

놀고 있는 오른손을 움직였다. 흰점에서 뿜어져 나온 실 가닥 중 하나를 선택해 차분히 따라가 봤다.

하나의 덩어리처럼 뭉쳐 있는 선이었지만, 희한하게도 집중하면 한순간 팽창하며 내부를 훤히 보여줬다.

그럴 때마다 눈이 시리긴 했지만, 아직은 버틸 만했다.

꼭대기 층의 선들을 이리저리 따라가다 보니, 아래층과 연결된 지점을 발견했다.

층을 내려와서 다시 탐험.

그렇게 세 개의 층을 훑으며 내려왔을 때였다.

아, 이 느낌.

왜인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굉장히 답답한 기분이 든다. 아빠가 보여준 도안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다.

다음 층으로 이어져야 할 선이 단절돼 있었다.

건너뛰고 다음 층을 살필 수 있지만, 그러면 하나하나 되짚어가며 이동한 이유가 없어진다.

왜 이곳만 떨어져 버린 걸까?

답답했다. 허공에 휘날리는 선들이 애처롭게 느껴진다. 살짝만 당겨서 이어주면 될 것 같은데.

오른손을 뻗었다.

손이 다가가자 촘촘하게 뭉친 선들이 한순간 팽창했다. 머리카락 굵기 정도로 변한 선을 살짝 꼬집었다.

다행히 붙잡을 수 있었다.

허공의 뜬 선을 아래로 당겨 밑에 층과 연결하면…….

-그것은 하늘을 갈망한 자의 부단한 노력이었고.

귀가 아닌 머리를 뚫고 들어오는 듯한 목소리였다.

가하란은 헛숨을 삼키며 유사 정령에서 손을 뗐다. 눈앞에 떠올랐던 선의 세계가 유사 정령 표면으로 녹아들었다.

심장의 위치가 선명히 느껴질 정도로 쿵쿵, 쿵쿵 요동쳤다.

“누구세요?”

텅 빈 연구실을 향해 말했다.

방금 그 목소리는 뭐였지?

정령들의 속삭임처럼 머리로 직접 전해진 음성.

혹시?

“저한테 말한 건가요?”

가하란은 유사 정령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순간, 흰색 점에서 두 가닥의 실이 뽑혀 나왔다.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실 두 가닥이 망막 앞에 도달했다.

아, 하는 헛된 비명이 입술을 스쳐 나감과 동시에 실이 망막을 뚫고 들어왔다.

“아아악!”

눈 안쪽에서 불길이 일었다.

아파, 아파, 아파!

눈을 부여잡고 몸을 틀 때였다.

풍경이 바뀌었다.

신비로운 색으로 물든 세계.

반듯하게 누운 채로 정령 세계의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긴 갑자기 왜?

“이쯤 되면 정말 여기다가 집이라도 한 채 짓지 그러냐. 안원을 제집 드나들 듯이 오는 인간은 네가 처음이야.”

사슴이 옆에 있었다.

가하란은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미칠 듯이 뜨겁던 눈이 지금은 괜찮다는 점이다.

눈을 지지던 열기를 생각하면 돌아가기 무서울 정도였다.

눈에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인간족 꼬마야. 오늘 왜 이렇게 조용하냐.”

곁으로 다가온 사슴이 눈동자를 위아래로 굴리며 가하란을 살폈다.

“형태가 무너지지 않는 걸 보면 정신체는 멀쩡한 거 같은데.”

말을 해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쓰러진 빗자루가 된 기분이었다.

“대답 없으면 난 간다.”

사슴이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가지 마요!

두려움 가득 찬 외침은 가슴 안에서 메아리칠 뿐이었다.

가하란은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눈동자를 오른쪽으로 굴렸다.

바위가 쿵쿵,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오고 있었다.

샬롯을 발견한 장소였다.

너무나도 위험한 곳. 굉음을 내는 바위가 점점 가까워졌다.

죽는다.

머릿속에 그 단어가 가득 찰 때였다. 그림자를 드리우며 나타난 사슴이 옷깃을 물며 날아올랐다.

사슴은 잠시 비행하다가 바위와 떨어진 곳에 내려앉았다.

“생각해 보니까 네가 없어지면 날 현신시켜 주겠다는 약속도 사라지는 거잖아? 그건 곤란하지. 감각을 맛볼 기회를 놓칠 순 없잖아.”

현실 세계의 몸이었다면 아마 토하지 않았을까. 몸을 지배하던 저릿한 공포가 서서히 빠져나갔다.

“그 샬롯이란 애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작은 인간족은 왜 이렇게 멍청하게 있을 때가 많을까?”

가하란은 눈동자를 굴려 사슴을 보았다. 미우면서도 고마운, 복잡한 마음이 든다.

“그러고 보면 얼마 전에도 비슷한걸 봤지. 아니, 너희들의 시간 개념으로 따지면 몇십 년 전인가?”

사슴이 옆에 앉았다.

“‘표리영역’의 틈새를 통해 층 너머로 나간 적이 있어. 어느 정도의 감각을 유지한 상태라 무척 신이 났지.”

평소 같았으면 귀담아들었을 테지만, 지금은 말이 한쪽 귀로 전부 흘러나갔다.

눈은 어떻게 된 거지?

정령세계에서 돌아가면 그 아픔을 또 겪어야 하나?

그러는 사이 사슴은 혼자 떠들었다.

“가장 오래된 형태와 인간의 껍데기를 쓴 괴물이 난리를 치고 있더라고. 그 옆에 통나무집이 있었는데, 딱 너만 한 인간족 여자애가 지금의 너처럼 멍청하게 누워 있었지.”

사슴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연녹색으로 번들거리는 수평형 동공이 좌우로 천천히 움직인다.

“그 꼬마는 심상세계가 완전히 망가져 있어서 멍청하게 있는 게 당연했지만, 넌 아니야. 네 안쪽은 멀쩡해. 근데 왜 못 움직이는 거지?”

저도 이유를 알았으면 좋겠네요.

답답함을 담아 속으로 외칠 때였다.

사슴이 아, 하면서 탄식을 내뱉었다.

“가까이서 보니 알겠네. 너, 눈이 완전히 열리는 중이야.”

완전히 열리는 중?

“가장 오래된 형태를 현신시킬 정도로 우수한 매개가 이렇게 죽어버리는 건가. 아쉬운 일인데.”

죽음.

선명한 단어로 다가온 죽음은 차가운 손길로 변해 심장 언저리를 매만지고 지나갔다.

더는 만날 수 없는 것.

더는 같이 밥 먹을 수 없는 것.

더는 꿈꿀 수 없는 것.

“나도 자세히 아는 건 아니야. 안원 밖, 층 너머의 존재가 눈을 완전히 뜬다는 건 정말 드문 일이거든.”

사슴이 주변을 빙빙 돌며 말했다.

가하란은 깨달았다.

도움을 구할 수도,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는 걸.

이건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내가 아는 걸 얘기해주자면, 일단 생물학적 눈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야. 본다는 것 또한 편의상 쓰는 말이고. 이건 정보의 문제야. 받아들이는 정보의 양.”

받아들이는 정보의 양이 늘거다, 예전에 산페르가 했던 말이다.

동시에 기록보관서에서 만난 퀼, 아니, 퀼비언의 말도 떠올랐다.

-네 눈은 세상을 온전한 정보로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

혼란스러웠다.

정보가 늘어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와닿지 않았다.

타챠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모든 걸 이해할 수는 없으니 흘려보내야 한다.

그렇지만 뭘 놓아줘야 하지?

“죽지는 마. 나한테 빚이 있잖아.”

안 죽을 거예요!

속으로 크게 외치며 침착하게 따져봤다.

문제는 늘어난 정보의 양이었다. 하지만 당장 느껴지는 것에는 변화가 없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는 것도 아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상태.

곰곰이 생각하던 중 칼리고와의 대화가 생각났다. 분명한 형태가 있는 숟가락조차 본질을 파고들기 시작하면 까다로워진다.

사슴은 말했다.

본다는 건 편의상 쓰는 말이라고.

그렇다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들은 뭐지?

제대로 본다.

그 말을 의식하는 순간 눈이 살며시 감겼다. 눈꺼풀이 만들어낸 어둠 속에서 가하란은 한 가닥의 실을 보았다.

하늘에서부터 길게 내려온 길.

저걸 붙잡기만 하면 뭔가 방법이 떠오를 것 같았다.

손을 내밀어 그 실을 움켜쥐었다.

닫혔던 눈꺼풀이 서서히 열렸고….

“아.”

가하란은 두려움에 찬 탄식을 내뱉어야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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