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화
“평소에는 눈치 보느라 못 했던 일도 마음껏 할 수 있거든. 연구실 안에 있는 물건도 막 만져도 되고. 그러다 망가지면? 괜찮아! 왜 그런 줄 알아?”
가하란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망가져도 괜찮은 이유라니.
“애가 사고 친 건 어른 탓이거든. 널 혼자 내버려 둔 어른들 잘못이니까 여길 난장판으로 만들어도 그 사람들은 할 말 없어.”
그, 그건 아닌 거 같은데요.
입 안에 말이 맴돌았지만 내뱉을 수는 없었다. 민 교수와 한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
그러고 보니 지금 몇 시였지?
가하란은 벽면 시계를 바라봤다.
12시 59분.
앞으로 1분만 더 참으면 된다.
“보아하니 이제 곧 말할 수 있나 보네?”
가하란은 손가락 한 개를 펼쳤다.
“1시간만 더 참으면 돼?”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분침이 틱 움직이는 게 보였다. 가하란은 다물었던 입을 크게 벌렸다.
“1분이요!”
“한 시까지 참는 거였구나.”
“네. 원래는 하루 동안 참기였는데, 처음이니까 여섯 시간만 참아 보라고 해서요. 아침부터 말 한마디 안 했어요.”
후련했다. 말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 새삼 깨닫게 된다.
“민 교수가 처음이라 살살 했나 보네.”
“여섯 시간도 엄청 힘들었어요.”
“이 정도로 힘들어하면 안 돼. 내가 아는 민 교수라면 다음 과제는 더 힘들 테니까.”
“시간을 늘리는 거라면….”
벨솔이 고개를 저었다.
“시간을 늘리는 것도 늘리는 거지만,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 거야. 민 교수라면 ‘말’에서 그칠 사람이 아니니까.”
말에서 그치지 않는다면?
가하란은 골똘히 생각하다가 눈을 번쩍 떴다.
“대화뿐만 아니라 소통 자체를 막겠네요.”
“눈치가 좋네. 말은 소통을 위한 도구잖아. 아주 편리하지. 하지만 말이 없더라도 의사표현은 가능해. 네가 고개를 끄덕이고, 손가락을 펼쳤던 것처럼.”
고갯짓도 못 하고 손짓, 발짓도 금지당한다면?
잠깐 상상했고 곧바로 우울해졌다.
“민 교수가 무슨 의도로 너한테 그런 걸 시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쓸데없는 짓 할 사람은 아니니까 잘 적응해 봐.”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가하란은 입술을 쌜룩거렸다.
“힘들어요.”
“힘들다는 건 네가 안 해봤다는 뜻이야. 민 교수는 너한테 다양한 경험을 시키려는 거 같은데?”
“말 안 하는 거 말고 다른 거였으면 좋겠어요. 골목 탐험 같은 거면 종일 할 수 있어요.”
“그런 건 네가 좋아하는 거겠지? 이미 몇 번 해본 거기도 하고.”
“…맞아요.”
다음에는 무엇을 하게 될까.
추측하건대 요리일 가능성이 컸다. 요리라면 기쁜 마음으로 할 것이다. 입 꾹 다물고 있는 것보다야 훨씬 즐거운 일이니까.
“근데 교수님.”
“응?”
“정말 저기 있는 거 만져 봐도 돼요?”
각종 공구가 놓여 있는 선반을 가리켰다.
“얼마든지 가지고 놀아도 돼. 여기 놓고 갔다는 건 중요품이 아니라는 뜻이니까. 그리고 커넥터가 없으면 작동하지 않는 기구가 대부분이라 손대는 것 정도는 문제 될 것 없어.”
커넥터란 단어에 고개를 들었다.
모르는 말이었다. 벨솔이 빙긋 웃으며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연구실 구석으로 갔다. 휴게실 입구 옆 벽이었다. 바닥에 철판이 보인다.
“이걸 들어 올리면.”
벨솔이 끙 소리를 내며 철판을 올렸다. 끼이익, 쇠 갈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 안쪽이 드러났다.
반투명한 원통형 물체가 나란히 누워있었다. 양 끝단에 굵은 선이 연결돼 있는데, 연구실 내에서 자주 본 선이었다.
“이게 커넥터야. 연구단지의 핵심이지.”
“이 선이요?”
벨솔이 선을 들어 올렸다. 무게가 꽤 되는지 철판을 젖혔을 때보다 힘을 더 주는 것 같았다.
“이 선을 통해서 마나가 공급돼. 연구단지 내 모든 제반 시설은 이 선에 의지하고 있는 거야.”
“마나는 쓰기 어려운 거 아니었어요?”
“어렵지. 그래서 연구단지 내에 이런 시스템을 조성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벨솔이 선을 놓았다. 퉁, 소리를 내며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선이었다.
“이게 있으면 마나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건가요?”
“규격을 맞추기만 하면 일단은 쓸 수 있지.”
가하란은 감탄하며 선을 바라봤다.
“마법도 마음껏 쓸 수 있어요?”
“마법과 마법공학품은 달라.”
“아하. 그러면 이걸 저희 집에 깔면 마법등을 쓸 수 있는 거예요?”
“깔 수 있다면 가능은 해.”
“도시 전체 깔면 귀족 거주지뿐만 아니라 도시 곳곳이 환해지겠네요?”
“낮보다 환하겠지.”
어둠은 무섭다. 위험하기도 하고.
달빛이 옅은 밤에 툭 튀어나온 돌을 보지 못해 넘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마법등을 도시 전역에 설치할 수 있다면 모두가 편해지지 않을까?
“…하면 좋은데 하지 않는 걸 보면 이유가 있겠죠?”
벨솔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하란도 따라서 궁둥이를 붙였다.
이야기가 길어질 모양이다.
“논에 물을 대는 건 농사의 기본이지. 그렇지?”
“네.”
“누구나 물을 원해. 하지만 물을 길어올 수 있는 환경은 제한적이야. 수로를 깊게 파서 물을 끌어온다고 해도 지대가 상대적으로 높은 곳은 혜택을 받기 어려워.”
벨솔이 왼손과 오른손으로 서로 다른 높이 두며 말했다.
“마나도 비슷해. 환경이란 게 중요하지.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비유야.”
비유는 진실을 반영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설명의 편의를 위한 방법일 뿐.
민 교수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벨솔의 말을 들었다.
“연구단지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건 명확한 이유가 있어서야. 둔을 어떤 도시라고 부르지?”
“계획도시요.”
“그래. 계획도시. 이곳이 연구단지로 지정되고, 근처에 거병관리국과 제철소가 들어선 건 이 일대에 돌출된 뿌리가 있기 때문이야.”
“돌출된 뿌리요?”
나무뿌리를 말하는 건 아니리라. 그렇다면 모든 것의 근원인 뿌리를 가리키는 건가?
“뿌리가 돌출됐다는 건 엄청 위험한 거 아닌가요?”
눈에 보이는 마나는 위험하다.
덴스가 알려 준 것이었다.
그렇다면 마나를 생성해내는 뿌리가 땅을 뚫고 올라와 있다면, 그건 얼마나 위험한 것일까?
“아주, 아주 위험하지. 튀어나온 뿌리를 흔히 ‘잔뿌리’라고 하는데, 이곳 둔에서 발견된 건 잔뿌리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규모가 컸어.”
벨솔이 손가락을 활짝 편 다음 이리저리 구부러트리며 말했다. 가하란도 흐느적거리는 손가락 모양을 따라했다.
“뿌리가 그렇게 움직여요?”
“이것도 비유야. 근데 모노클로 보면 비슷하긴 해. 사방으로 분출되는 마나 파장은 그야말로 장관이지.”
“저도 보고 싶어요.”
“아쉽게도 지금은 볼 수 없어. 정제시설에 가둬진 상태거든. 오는 길에 거병관리국 봤지?”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단지로 들어서는 입구에 제철소가 있고, 제철소과 맞닿아 있는 게 거병관리국이었다.
“그곳 지하에 정제소가 있어. 마나응축로라고도 부르는데, 좀 더 복합적인 시설이 추가돼 있어서 살짝 다르지.”
벨솔이 말을 멈추고 가하란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근데 내가 하는 말 이해는 하니?”
“모르겠어요. 제가 이해한 게 맞는지, 틀린지 저는 알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개념은 그려지고 있어요.”
“치프 님도 그렇고, 역시 공부 머리는 피를 타고 전해지는 건가?”
“전 아빠만큼 똑똑하지 않아요.”
“야. 내가 네 나이 때는 젖소 젖 잡고 깔깔 웃으면서 놀았어. 이런 얘기는 10초도 집중해서 듣지 못했고.”
“젖소 젖이요? 저도 만져보고 싶어요. 진짜 우유가 나와요?”
“…넌 모든 것에 관심을 보이는구나.”
“다른 애들도 다 비슷할걸요?”
“아니. 아닐 거야.”
벨솔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소젖 짜는 건 다음에 얘기하고.”
벨솔의 길쭉한 손가락이 바닥에 깔린 선을 가리켰다.
“정제시설을 통해 다듬어진 마나가 이 선을 타고 각 연구단지로 전해져. 아까 질문했지? 왜 도시 전체에 이 커넥터를 설치 못 하느냐고. 이유는 세 가지야.”
벨솔이 빤히 쳐다본다. 맞춰보라는 의미 같았다.
“두루뭉술한 대답밖에 생각 안 나요.”
“그거라도 말해봐.”
“교수님이 해준 말로 생각해 보면, 일단 선을 깐다고 해서 마나가 전해지는 건 아니에요.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물이 저절로 흐르지 않는 것처럼요.”
“빙고. 일정 범위까지는 잘 흘러. 근데 그 범위를 벗어나면 효율이 뚝 떨어져. 바짝 마른 땅에 물을 붓는 것과 비슷해. 바가지로 왕창 부어도 결국 땅에 다 스며들고, 반대편까지 흘러가는 건 쥐꼬리만 하지.”
첫 번째 이유는 알겠다.
가하란은 손가락을 두 개 폈다.
“이것도 당연한 이유일 거예요. 이 선이 비싸요.”
“옳지. 마나는 어떤 성질이 있다?”
“자연상태로 퍼지려고 해요. 내버려 두면 농도가 옅어져요.”
“그래. 그걸 잘 모아둬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 ‘금적철’이란 광물이 그나마 마나를 잘 보관하고 흐르게 하는데 소름 끼치도록 비싸지.”
“금적철, 들어 봤어요.”
가하란은 연구실 중앙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유사 정령을 바라봤다.
“유사 정령에도 금적철이 쓰인다고 했어요.”
“맞아. 섬세한 마나 조작이 필요한 모든 마법공합품에는 금적철이 들어가. 유사 정령뿐만 아니라 거병 핵심모듈 기반은 전부 금적철이야. 탈로스 역시 배합에 따라 다르지만 금적철이 주류고.”
필요한 사람은 많지만 배급은 어렵다. 가격 역시 만만치 않다.
이 모든 게 해결된다면 세상은 어떤 형태가 되는 걸까?
“세 번째는요?”
“보안 때문이라고 설명은 하지만, 사실 다른 이유가 있지.”
벨솔은 한 호흡 쉰 뒤 어린애 같은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독점.”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아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마법등은 어디에 깔려 있지?”
“귀족 거주지요.”
“귀족 거주지 안 공중목욕탕은 항상 깨끗한 물과 적정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니?”
“가본 적 없어서 모르겠어요. 하지만 집 근처에 있는 공중목욕탕은 그다지 깨끗하진 않았어요. 온탕에 들어가려면 돈을 더 내야 했고요.”
일반 탕에도 미지근한 물이 흘러들어오긴 하지만, 거기엔 오물이 잔뜩 떠 있다.
온탕에서 사용하고 남은 물들이 흘러들어 오는 거니까.
“그런 거야.”
“그런 거요?”
“사실 시설확장에 힘을 쓰고 자본을 더 들인다면, 둔 전체는 힘들더라도 어느 정도는 커버할 수 있어.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
“모두가 편해지면 좋은 거 아닌가요? 어두워서 넘어지는 일 없고,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있으면….”
“언젠가는 그렇게 될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시설의 주인들은 아직 놓아줄 생각이 없거든. 이르다고 판단하고 있고.”
“너무해요.”
“네 말대로 너무한 일이면서도, 타당한 일일 수도 있어. 기억해둬. 모든 건 결국 분배의 문제야. 하나부터 열까지, 분배가 핵심이지.”
교수는 타당하다고 했으나, 어느 부분이 옳은지 전혀 모르겠다.
이것도 좀 더 크게 되면 알게 되는 걸까?
“나 잠깐 연구실 다녀올게. 봐야할 게 있거든.”
벨솔이 먼지를 털며 일어섰다.
“여기서 놀고 있어. 10분 내로 올 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아무거나 막 만져도 돼. 물론, 날붙이는 조심하고.”
벨솔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가하란은 두리번거리다가 유사 정령 곁으로 다가갔다.
매끈해 보이지만 만지면 까끌까끌한 쇠 표면을 손으로 훑었다.
“모두가 편해지면 좋을 텐데.”
반구형 쇠에 손을 댄 채 천천히 왼쪽으로 돌 때였다.
고개를 살짝 들었다. 슬그머니 재미난 생각이 든다.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고 했지?
가하란은 의자를 가져왔다. 의자에 올라가도 유사 정령의 윗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중심을 잘 잡은 뒤, 힘껏 뛰었다.
쿵, 소리와 함께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휴, 떨어지는 줄 알았네.”
어찌어찌 유사 정령 위에 걸터앉았다.
한번 꼭 해보고 싶었다.
언덕이 보이면 올라가야 속이 풀리고, 만만한 나무는 꼭대기까지 타봐야 미련이 없어진다.
미끄러지지 않게 자세를 잡았다.
위에서 내려다본 연구실은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어른들 키보다 높아진 시선.
나중에 키가 훌쩍 크면 이런 풍경을 매일 보게 되는 거겠지?
발장구를 살며시 치며 언젠가 꿈에서 들은 자장가를 흥얼거렸다. 아빠도 보고 싶고, 엄마도 보고 싶고.
눈을 감고 사진 속 엄마의 모습을 그려볼 때였다.
가하란은 움찔하며 발장구를 멈췄다.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