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3화
“눈발이 더 굵어지는 거 같아.”
덴스가 털모자에 내려앉는 눈을 털어냈다.
“이쯤에서 그치길 기도해야죠.”
올란트는 천막 입구를 여미며 말했다.
눈보라가 거셌다. 기세로 봐서는 내일까지 내릴 눈이었다. 추위도 추위지만 길 상태가 더 걱정된다.
“포장도로가 끝나자마자 이 꼴이네요.”
“그러게. 확실히 둔 주변이 좋긴 해. 어지간한 길은 다 닦여 있어서 이동이 쉽잖아.”
덴스가 모닥불 앞으로 다가왔다. 불그스름한 빛이 선배가 낀 안경알에 위를 미끄러졌다.
“눈, 쌓이겠죠?”
“그럴 것 같아.”
“눈 피해 보려고 최대한 일찍 출발한 건데 하늘이 안 도와주네요.”
후드득, 눈이 천막을 쉼 없이 때렸다. 귀가 얼얼할 정도로 소리가 크다.
“자다가 박아 놓은 정이 뽑히면 사이좋게 동사하겠어요.”
“어떻게 해서든 내가 너는 살리고 죽을 테니까 걱정 마.”
천막 바로 옆에서 말들의 투레질 소리가 들려왔다. 간이 마사를 세우고 건초를 두둑이 쌓아 둔 상태이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한 시간마다 체크하는 거죠?”
“어. 사람 목숨만큼이나 말의 컨디션도 중요하니까. 지금은 렐이 보고 있어. 콧물 줄줄 흘리고 있더라.”
“눈발 걷히면 볕 드는 곳에서 하루 정도는 체력 보충하죠. 시간이 촉박한 것도 아니니.”
“그래야지.”
모닥불 위에 걸어둔 솥에서 김이 올라왔다. 찌그러진 잔으로 물을 떠 선배에게 내밀었다.
“애들은 잘 있으려나.”
덴스가 물을 마시며 말했다.
“저도 걱정이네요. 보름 조금 넘게 떨어졌는데, 눈에 계속 아른거려요.”
“네가 그 정도면 난 어떻겠어. 가하란이야 애가 똑 부러져서 괜찮지만, 우리 딸은 나 없으면 엉엉 울거든.”
올란트는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거 착각일지도 몰라요.”
“저번에 봤잖아. 프레나가 얼마나 날 좋아하는지. 옹알이할 때 엄마보다 아빠를 먼저 했을 정도야.”
“애 옆에서 얼마나 ‘아빠’를 외치신 거예요?”
“태어나자마자 내가 자장가 불러주는 대신 애 귀에 대고 아빠, 아빠거렸다. 왜? 안 되냐?”
소리 죽여 웃던 덴스가 나지막이 숨을 내쉬었다.
“옷을 단단히 입고 다녀야 할 텐데. 감기에 잘 걸리거든.”
“전 조금 안심이에요. 그 녀석, 감기 한번 걸린 적 없거든요.”
“몸 튼튼한 건 축복이야.”
“맞아요. 건강한 게 제일가는 축복이죠.”
덴스가 잔을 슬쩍 들어올렸다.
“건강을 내려주신 신께 축복을.”
“무교시면서.”
“대외적으로는 유일신 베리타스의 성도야. 열렬한 신앙심은 없지만.”
“그러다 시기심 많은 신께서 벌을 내리면 어쩌시려고요.”
“그렇게 말하는 넌 신을 믿어?”
“저요? 믿죠. 믿어서 손해 볼 건 없으니까요.”
“에라이, 녀석아. 네가 더 나빠.”
“신은 자비로우시니, 용서해 주시겠죠.”
세상에 신은 많다.
성교회가 제국의 국교였을 때는 유일신 베리타스를 섬기는 게 국법이었으나, 그건 머나먼 과거의 이야기.
그러니 이름 모를 수많은 신께 기도드릴 것이다.
부디, 모두가 평안하길.
“내 딸이야 집에서 놀고 있을 테고, 네 아들은 뭐 하고 있으려나?”
올란트는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또 여기저기 빨빨거리고 있겠죠. 처음 보는 사람 붙잡고 반갑게 인사한 다음,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 겁니다.”
“조용할 날이 없는 입이었지.”
덴스가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선배도 가하란과 마주칠 때마다 시달렸으니 이해한다.
쏟아지는 ‘왜요?’의 향연을 무사히 넘겨낸 선배에게 박수를.
올란트는 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민 교수님에게 이것저것 물으면서 잘 지내고 있겠지?
조잘대는 아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 * *
“세상에, 세상에! 이런 날이 오다니.”
푸하하!
브라인은 영혼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거짓 한 톨 없는 진심을 담아 웃었다.
“꼬마야. 왜 말이 없어? 응? 이 할머니가 뭐든 대답해 준다니까?”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가하란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십 년, 아니 족히 백 년은 된 듯한 체증이 시원하게 내려갔다.
가하란이 뚱한 표정을 지으며 손에 든 메모장을 들어 올렸다.
이미 몇 번을 본 안내 문구지만 재차 소리 내어 읽었다.
“뭐? 말하지 않기로 약속해서 말할 수 없다고? 저런저런, 우리 불쌍한 꼬마. 이 할머니가 너랑 얼마나 대화하고 싶었는데.”
가하란 정수리에 손바닥을 올리고, 다시금 빙글빙글 돌았다.
가하란이 왼손으로 브라인의 손을 툭툭 쳐냈다.
“그만하세요. 애 울겠어요.”
“얘가 이 정도에 울 애였으면 보관서는 옛적에 눈물바다가 됐겠지.”
단아한 침묵. 고상한 고요.
마침내 세상이 정적으로 물들었다.
귀를 덮지 않아도 조용하다는 건 이리도 좋은 일이었던가?
브라인은 흐뭇하게 웃으며 책상에 앉았다. 두 다리를 쭉 뻗고 푹신한 베개를 껴안으며 눈을 감았다.
“셀베이아.”
“네.”
“오늘 오후 예약자 다 돌려보내.”
“안 돼요. 세 분 정도는 만나 주세요. 급한 용무라 미룰 수 없어요.”
“좋아. 세 명 정도야 너그러이 받아줄 수 있지. 오늘 난 기분이 무척 좋으니까.”
두 사람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간만에 찾아온 정숙함을 마음껏 즐길 것이다.
* * *
“여기 오고 싶었던 거야?”
셀베이아는 연구실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람이 드나드는 문과 자재를 옮기는 큰 문, 둘 다 굳건히 잠겨 있었다.
손을 잡아끄는 가하란을 따라오긴 왔지만, 이렇게 닫혀 있으니 어쩌지?
열려 있다고 한들 멋대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연구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가하란이 문에 기대앉았다.
“여기 이러고 있을 거야?”
가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을 들을 때마다 입술이 꿈틀거린다.
말하는 걸 그렇게나 좋아하는 애가 종일 입을 닫고 있어야 한다니. 답답해서 울고 싶을 것이다.
셀베이아도 바짓단을 툭툭 치며 가하란 옆에 앉았다. 맞은편 연구실에서 군청색 재킷을 입은 사람들이 나왔다.
이쪽을 쓱 살피고는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다가 단체로 이동했다. 다른 연구실에서도 사람들이 나왔다.
아, 점심시간이구나.
“가하란. 밥 먹으러 갈까?”
대령님이 따로 말한 게 없으니 식사를 준비해 가져가야 한다. 그 후에는 오후 예약자들에게 줘야 할 문서를 정리해야 하고.
서둘러야 하는데, 가하란은 움직일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이렇게 침울한 가하란은 처음 본다. 날개를 빼앗긴 새 같고, 수염이 잘린 고양이 같다.
투정 부리듯 한마디 정도는 해도 될 텐데, 가하란은 입술을 떼지 않았다.
하고자 하는 의지가 대단했다.
민 교수도 이런 성격을 알아봤기에 숙제를 내준 거겠지?
가하란을 혼자 내버려 둘 수도 없고, 억지로 끌고 가고 싶지도 않았다.
이렇게 된 거 대령님 이름을 팔아서 일정을 조절해야 하나?
무릎을 끌어안은 채 좌우로 흔들거리는 가하란을 가만히 지켜볼 때였다.
바로 옆 연구실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차분해 보이는 다른 연구실과는 다르게, 옆 연구실 사람들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겨울이 성큼 다가온 날씨.
이런 기온에 땀을 비 오듯 흘린다는 건 희한한 일이었다.
“다들 고생했어. 오늘은 이만 들어가고 푹 잔 다음, 새벽에 또 보자.”
호쾌하게 웃으며 연구원들 등을 세게 치는 벨솔 교수였다. 기록보관서에 몇 번 온 사람이라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교수님은 안 들어가세요?”
“난 좀 더 보고.”
“쉬다 오시죠. 저희가 교대로 살피면 되니까.”
“너희들 퍼지면 어차피 실험 멈춰. 체력은 내가 더 좋으니까 가식 그만 떨고 얼른 가. 딱 10초 준다. 남아있는 놈들은 나랑 새벽까지 연구실에서 오붓하게 데이트하는 거야.”
교수의 말이 떨어지자 연구원들이 부리나케 뛰어갔다. 손을 탁탁 털며 돌아서던 벨솔이 이쪽을 바라봤다.
“접수대 아가씨랑 꼬마잖아. 거기서 뭐 해요?”
“그러게요. 저도 뭐 하고 있는지 궁금해요.”
셀베이아는 곁눈질로 가하란을 바라봤다. 벨솔이 작게 하품하며 다가온다.
“아하. 민 교수가 또 이상한 걸 시켰네.”
벨솔이 가하란의 메모장을 살피며 말했다.
“꼬마야, 너 마땅히 놀 곳이 없구나?”
가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였어?
셀베이아는 턱을 괬다. 하루 정도는 업무를 뒤로 미루고 얘랑….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가하란이 옷깃을 잡으며 살짝 흔들었다.
“가도 된다고?”
턱을 당기며 끄덕. 눈빛만 교환했는데 얼추 뜻이 통했다.
“여기 있지 말고 누나랑 가자. 같이 있어 줄게.”
이번엔 도리질이었다. 고심하고 있을 때 벨솔이 입을 열었다.
“접수원 아가씨, 아니, 셀베이아였나? 일 있는 거 아니에요?”
“봐야 할 업무가 있긴 해요. 하지만….”
“그러면 애 여기다 두고 가봐요. 내가 데리고 있을 테니까.”
“네?”
“덴스 교수한테 부탁받은 게 있어요. 혹시라도 저 꼬마가 찾아오면 돌봐달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열쇠를 꺼내는 벨솔이었다.
“이렇게 연구실 열쇠도 받았고.”
가하란의 얼굴이 한순간 밝아졌다. 기뻐하는 걸 보면 연구실 안에 뭔가 재미있는 게 있는 모양이다.
“가하란. 그렇게 할래?”
의사를 물을 필요도 없었다.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셀베이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벨솔을 바라봤다.
“가하란을 부탁드릴게요. 업무 마치고 나서 제가 데리러 올게요.”
“천천히 와요. 어차피 새벽까지 여기 계속 있어야 하니.”
“감사합니다.”
“감사하면 나중에 예약 잡을 때 오전으로 좀 잡아줘요. 오후에는 시간 내기가 영 어려워서.”
“네, 기억해둘게요.”
벨솔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엄지를 세웠다.
“이따가 올게. 문제 일으킬… 리는 없나? 교수님 말 잘 듣고 혹시라도 문제 생기면 대령님이 준 펜던트 꼭 쓰고. 나나 밀레나 씨, 율 씨가 못 움직이는 상황이면 대령님 엉덩이를 차서라도 보낼 테니까. 알겠지?”
가하란이 눈웃음 지으며 펜던트를 손에 쥐었다.
“맞다. 근데 점심은 어쩌지?”
배가 고플 텐데.
옆에 있던 벨솔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며 연구실을 가리켰다.
“나랑 같이 먹으면 돼요.”
“바쁘신데 괜히 민폐 끼치는 건 아닌지….”
“아까도 말했지만 부탁받은 일이니 괜찮아요. 따로 받은 것도 있고.”
받은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꽤 좋은 물건인 것 같다. 상쾌하게 웃는 벨솔 교수의 얼굴을 보면 확실했다.
“그럼, 이따가 찾아뵙겠습니다.”
* * *
“주인 없을 때 열어보는 건 또 처음이네. 도둑질하는 기분이야.”
벨솔 교수가 열쇠를 집어넣으며 말했다.
“들어와. 여기 보고 싶어서 전투적으로 밥을 먹은 거잖아?”
가하란은 머쓱하게 웃었다. 전투적이란 말이 괜히 쑥스러웠다. 하긴, 10분도 안 돼서 밥을 다 먹었으니까.
18일.
아빠와 헤어지고 나서 18일 만에 다시 찾은 연구실이었다.
미세한 마나 진동음 때문에 귀가 항상 먹먹했는데, 오늘은 아무렇지 않았다.
조용한 연구실은 처음 발을 디딘 곳처럼 낯설었다.
원래대로라면 저기에 로쎕 형과 만란 누나, 로케도 아저씨와 코린디 아저씨가 있어야 하는데.
가하란은 연구실 우측 벽면을 봤다. 항상 아빠가 서 있던 자리였다.
시그니처로 가시화된 마나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아빠. 그 옆에서 깊게 생각하던 교수님.
늘 봐오던 모습을 이제는 볼 수 없다. 억지로 무시해왔던 쓸쓸함이 가느다란 빗물처럼 내려와 가슴에 스며들었다.
“꼬마야.”
울적함에 땅만 보고 있을 때였다.
옆으로 다가온 벨솔이 말을 걸어왔다.
“혼자가 된다는 건 엄청 신나는 일이야. 그렇게 풀 죽어 있을 시간이 없어.”
신나는 일?
벨솔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