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화
근육이 가닥가닥 끊겨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온몸을 질주해야 할 혈액은 종아리 부근에서 파업을 선언한 것 같고, 피를 쥐어짜야 할 심장 역시 느슨해져 버렸다.
오늘 며칠이었지? 밥은 먹었던가? 아니, 그보다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쓰러질 거면 앞으로 쓰러지자.”
귀를 때리는 민 교수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밀레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민 교수가 눈을 갸름하게 뜬 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다가온 걸까.
눈치채지도 못했다.
“밀레나.”
“예!”
“힘들지?”
“아닙니다.”
“힘들면 쉬어도 돼. 아무도 강요 안 해. 그리고 넌 충분히 잘하고 있어. 잠깐 쉰다고 해서 뒤처지거나 그러지 않아.”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동기들은 저 뒤에 있었다. 브리테도 뒤처진 상태고. 잠깐 쉰다고 해서 따라잡힐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잠깐만 쉴까?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갈 때였다. 문득 신화 속 한 구절이 떠올랐다.
-감미로운 목소리를 지닌 요괴를 조심해라. 그 목소리에 속아 깊은 늪에 빠진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아직 괜찮습니다.”
이 악물며 대답했다. 덕분에 정신이 들었다. 몸 상태는 여전히 최악이지만.
“눈빛은 좋네.”
민 교수가 뒤에 있는 브리테에게 걸어갔다. 밀레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도들에게 존대하던 민 교수가 말을 놓은 건 얼마 전이었다.
민 교수는 ‘어느 정도 봐줄만한 수준’에 올랐다며 우선 축하를 해줬고, 그다음에 차원이 다른 훈련 계획을 발표했다.
“느려진다. 속도 일정하게 유지해.”
녹아내릴 것 같은 몸을 다독이며 걸음을 교차했다.
신체술을 장시간 유지하는 것도 모자라, 유지한 채 움직이고 있었다.
스콜라 내에서 받았던 훈련과는 성격 자체가 달랐다.
확실한 순간에 한계치에 근사한 신체술을 사용하는 것.
스콜라에서 터득한 신체술 사용법이었다.
민 교수는 이와 정반대되는 방식을 요구했다.
마나의 여유분을 남긴 채 장시간 신체술을 유지하는 것.
윽, 하고 비틀린 입 사이로 신음이 나왔다. 발목에 감각이 무뎌졌다.
신체술의 부작용이 시작된 것이다.
예민해진 감각들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날뛰는 신경을 바로잡지 못하면 소리에서 맛을 느끼고, 빛에서 냄새를 맡는 기괴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처음 체임버에 들어갔을 때랑 비슷하지, 밀레나는 날 선 신경을 가다듬기 위해 천천히 호흡했다.
마나를 붙들어 둔다는 건 정말 추상적인 개념이었다. 그래서 요령도 전부 달랐다.
미엔은 눈썹 사이에 힘을 집중하는 느낌이라고 했고, 브리테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그러모으는 감각이라고 했다.
밀레나는 그 소리를 듣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나는 숨 참는 느낌으로 붙잡아 두는 거 아니었어?
“푸하!”
붙든다는 개념이 순간 엉클어지며 폐를 압박했다. 찌부러진 숨이 입을 박차고 나왔다.
붙들어둔 마나가 출렁거리는 걸 느꼈다. 여기서 놓아 버린다면 그대로 탈진, 더는 못 일어설 것이다.
안간힘을 쓰며 정신을 다잡았다.
마나는 체력과 정신, 두 개를 매개 삼아 빌려 써야 하는 힘이다. 밸런스가 깨지면 유지하는 게 어렵다.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하니까 밸런스는 일단 맞는 건가?
실없는 웃음이 나올 때였다.
아슬아슬하게 몸에 깃들었던 마나가 바람에 휩쓸린 민들레 씨처럼 흩어져 버렸다.
끝났다.
다리가 멈췄다. 석고상이 된 것처럼 그대로 굳어버렸다.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뒤죽박죽이던 감각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이제 더는 못 움직여.
밀레나는 뒤로 쓰러지며 주저앉았다. 메마른 숨을 내뱉으며 뒤를 바라봤다.
“하아, 그래도… 이겼네.”
다른 애들도 나자빠진 상태였다.
누가 동기 아니랄까 봐, 동시에 한계를 맞이했다.
곧 떨어질 민 교수의 불호령이 걱정되지만, 일단은 눕기로 했다.
차가운 늦가을바람에 헤픈 웃음이 나온다.
“한 시간 휴식. 움직일 생각 말고 그대로 누워 있어.”
그럼요, 그래야죠. 밀레나는 힘겹게 두 손을 들어 올려 눈가를 가렸다.
손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볕이 적당히 따뜻해서 기분이 좋았다.
* * *
옅어진다.
가하란은 눈가에 대고 있던 모노클을 밑으로 내렸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밀레나도 쓰러졌다.
뚜렷했던 마나의 빛도 금세 흩어져 사라졌다.
마나를 붙잡아 둔다는 건 말도 안 되게 힘든 일 같았다.
“생각해 봤어?”
자리로 돌아온 민 교수가 물었다. 가하란은 ‘내가 나인 이유’를 조심스럽게 꺼내 봤다.
“이름은 같을 수 있어도 생김새는 달라요.”
“눈에 장난기가 가득해. 내 다음 질문이 뭘지, 알고 있지?”
“네. 이름도 같고 생김새도 같으면 그 사람도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제가 생각했을 땐 아니에요.”
“그렇다면 무엇이 널 너로 존재하게 할까?”
“민 교수님이요.”
“내가?”
재미있다는 듯이 지그시 바라보는 민 교수였다.
“계속해봐. 들어줄 테니까.”
가하란은 핀들론의 작은 텃밭을 떠올렸다. 오래전 그곳에서 나눴던 대화도 함께.
“옆집에 사는 할아버지가 계셨어요. 할아버지는 작은 텃밭을 가꾸셨고요. 어느 날 처음 보는 꽃이 거기에 피어났어요. 되게 예쁜 꽃이라 이름이 궁금했는데, 할아버지도 모른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이름을 모르니까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잖아요.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니까 할아버지가 말했어요. ‘가하란’이라고 지어보는 건 어떻겠냐고.”
민 교수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랬는데?”
“전 그게 마음에 들었어요. 내 이름을 딴 꽃이라니. 뭔가 신이 나서 주변 어른들한테 전부 다 말했어요. ‘이 꽃 이름은 가하란’이라고.”
이야기는 그게 끝이었다.
어른들은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꽃을 가하란이라 불러줬다.
물론 얼마 후 물초롱꽃이라는 제대로 된 이름이 있다는 걸 알게 됐지만.
“그 꽃을 가하란 꽃이라고 불러봤자 제대로 된 이름은 물초롱꽃이었어요. 근데 생각해 보면, 물초롱꽃도 누군가 붙여준 이름이잖아요?”
“그렇겠지. 식물이 입을 열고 자기 이름을 말했을 리 없으니까.”
“저도 마찬가지인 거 같아요. 제가 가하란인 이유는 교수님이 절 가하란이라 봐주기 때문이에요. 교수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절 가하란이라 불러줘요. 그러니까 전 가하란이 된 거예요.”
“얘기가 거기서 끝난 것 같지는 않은데.”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생각해 보니까 또 이상한 거예요.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람들이 날 ‘국수’라고 부르면 어쩌지? 그러면 바뀌는 건가? 근데 아닌 거 같아요. 전 저 자신을 가하란이라 믿고 생각하니까요.”
믿고 생각한다.
할아버지와 아빠는 믿음이 중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브라인과 칼리고는 눈에 보이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이름이 불리는 것과 이름을 내세우는 것.
정리되지 않은 말의 파도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단어가 있었다.
그것은 존재였다. 쓰임새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이 말 대신 마땅히 끌어다 쓸 단어도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불러주지 않으면 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물론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서 없어지는 건 아니에요. 저는 그대로 있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 없이 ‘가하란’은 존재할 수 없는 거 같아요. 나는 있을 수 있어도, 가하란은 있을 수 없어요.”
가하란은 귀 뒤쪽을 긁적거렸다.
말이 정리되지 않는다.
어려워서 울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집중해서 끝맺음했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 내가 나인 이유, 나로 존재하는 이유는 너무 많다는 거예요. 교수님도 이유 중 하나고, 밀레나 누나도 이유 중 하나가 될 수 있어요. 반대로 제가 교수님의 이유가 될 수도 있고요.”
제대로 대답한 걸까.
쏟아내고 난 뒤에도 정리가 되질 않으니 부끄러워진다. 할아버지였다면 더 멋지게 말을 다듬었을 텐데.
“상호관계를 통해 존재한다. 그게 네 성향이구나. 나쁘지 않아.”
“대답이 된 건가요?”
굳은 얼굴로 보던 민 교수가 활짝 웃었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었다.
“대답이랄 것도 없어. 명쾌한 답이 있지 않은 질문이니까. 왜 이런 질문이 나왔는지 기억하지?”
“네. 심상세계에 대해 말하다가 이 질문이 나왔어요.”
“심상세계는 방금 네가 말한 모든 것들의 총체야. 심상세계는 너를 이루는 모든 것이야. 마법의 종류가 마법사의 수만큼 존재하는 이유. 각각의 심상세계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지.”
가하란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되물었다.
“제 심상세계는 똑바른 건가요?”
“그건 알 수 없어. 타인의 심상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거든. 근데 다른 사람한테 질문할 필요 없어. 네 세계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누구겠어?”
고민할 것도 없는 질문이었다.
방긋 웃으면서 답했다.
“저요.”
“그래. 너야. 네 세계의 완벽한 이해자는 너일 수밖에 없어.”
가하란은 기절한 것처럼 바닥에 누워있는 밀레나를 바라봤다.
“마나를 오랫동안 붙잡고 있으면 심상세계가 아프게 되나요?”
“아프다는 표현이 재미있네. 맞아, 아픈 게 맞지. 마나는 이 세계의 근간이 되는 힘이야. 머물러 있지 않고 뻗어 나가지. 반면 심상세계는 네가 구축한 세계야. 움직이지 않고 네 안에 자리 잡고 있지.”
민 교수가 손을 들어 올려 크게 휘저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움켜쥐듯 손을 말아 쥐면서.
“그 방대한 힘을 인간의 자그마한 세계에 붙잡아 두는 거야. 얼마나 힘이 들겠어?”
“그러면 제 안에 있는 세계가 크면, 세상의 마나도 쉽게 붙잡아 둘 수 있나요?”
“원론적으론 그래. 만약 네 심상세계가 이 세계보다 크다면, 뿌리에서 올라오는 힘을 영구히 붙잡아 둘 수 있겠지. 하지만 아까 내가 말했지? 마나를 붙잡아 둘 땐 정신력과 뭐가 필요하다고?”
“체력!”
“그래. 무쇠 같은 마음을 지녔다고 해도 몸이 허약하면 마나를 잡아둘 수 없어. 그러니 단련은 필수지.”
민 교수가 다시금 펜을 꺼내 분주히 필기했다.
내용이 궁금했다. 기다리면 알려주시려나?
“대충 정해졌네.”
“뭔데요?”
“네가 해야 할 일.”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모험을 떠나기에 앞서 전설의 검을 찾아 나서는 용사가 된 기분이었다.
교수님이 시키는 일을 끝내면 뭔가 달라져 있으려나?
혹시 마나를 바로 깨닫게 되는 거 아닐까? 브라인 님처럼 하늘 높이 뛰게 되고?
흥분 섞인 웃음이 자꾸만 흘러나올 때였다.
“재차 말해두지만 이걸 한다고 해서 마나를 깨닫지는 못할 거야. 대부분이 실패했으니까.”
“그래도 좋아요. 과정이 중요하다고 했어요.”
“자세 좋네. 그러면 일단….”
가하란은 기대감을 담아 민 교수의 입을 바라봤다.
신비한 책 읽기? 미지의 약초를 찾아 나서기? 아니면 생도들과 함께 엄청난 훈련 받기?
“하루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기. 성공하면 이틀. 상황을 봐서 일주일까지 늘려볼 거야.”
“…네?”
가하란은 눈을 꿈벅거렸다.
어?
이건 아닌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