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유단은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펜을 좌우로 흔들었다.
시소처럼 흔들리는 펜이 꼭 사람 마음 같았다.
평행한 상태.
항상 평정심을 유지하며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통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자존감이 높아지는 말을, 추켜세우는 말을 넌지시 던지면 마음은 기울게 되어있다.
저기 보라.
부자가 부둥켜안고 우는 모습을.
가하란은 ‘아빠의 꿈’이란 말에 취해 올란트를 보낼 것이다. 올란트 역시 남겠다는 말을 취소하고 볼로스로 떠날 테고.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정말 눈물겨운 가족애가 아닐 수 없다.
아주 살짝, 시소 끝자락을 눌렀을 뿐인데 원하는 바가 이루어졌다.
유단은 자꾸만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기 위해 애를 썼다.
연구소 밖으로 나와 건물 뒤편으로 돌아갔다. 가득 쌓인 폐자재 앞에서 입을 가리고 풋, 하고 웃었다.
됐다. 이걸로 됐어.
올란트가 이곳에 남으면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덴스와 올란트는 결코 멈춰서는 안 됐다.
연구에 몰두하고 새로운 지식을 찾아내 하나의 공식으로 정립할 의무가 있었다.
기다리기만 하면 잘 다듬어진 정보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지식이 자연스럽게 굴러들어 올 것이다.
유단이란 무구한 아이는 덴스에게 신용을 얻었다. 스승이 제자에게 지식을 양도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이 얼마나 효율적인 방식인가!
유단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재능이 대단하지 않음을.
노력하면 덴스 정도는 발아래 둘 수 있지만, 올란트의 천재성을 따라갈 수 없으리라.
치프는 정말이지 놀라운 사람이었다. 천재가 왜 천재인지,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일반인이 발상의 전환이라며 관점을 비틀고 있을 때, 치프는 아예 새로운 지평에서 새로운 지식의 탑을 쌓고 있었다.
접근하는 방식이 아예 달랐다.
마음 같아선 두개골을 열고 그 안에 있는 뇌를 살펴보고 싶을 정도다.
어떻게 생겨먹었기에 이런 게 가능할까.
이상적인 존재.
닿을 수 없는 저 먼 하늘.
유단은 노력으로 갈 수 없는 길을 보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포기해야 하나?
성공으로 향하는 길을 접어야 하나?
아니다. 그럴 필요는 없다.
유능한 군주는 모든 일을 홀로 처리하는 자가 아니다. 유능한 군주는 재주 좋은 일꾼을 잘 부리는 자이다.
덴스와 올란트.
두 현명한 연구가들은 볼로스에서 경이로운 업적을 달성할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그들의 성공을 기도하면 될 뿐이다.
표정을 관리하며 연구실로 돌아왔다. 두리번거리던 덴스와 눈이 맞았다.
“유단. 예정대로 볼로스로 가게 됐다.”
“이제 시작이네요.”
“그래. 일정이 정해진 이상 최대한 빨리 떠날 거야.”
유단은 덴스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먼저 꺼냈다.
“‘프레나’를 잘 지켜볼게요. 사모님이 시키시는 일도 잘하고요. 이런다고 교수님의 빈자리가 채워지는 건 아니지만….”
덴스가 유단은 가볍게 안았다.
“그거면 충분해. 내가 없는 동안 가족을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너이기에 하는 부탁이다. 너 역시 우리 가족이니까.”
가족.
유대감을 불러일으키고, 구성원을 결속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저렴한 말.
유단은 비위가 살짝 상했지만 웃는 낯짝을 유지하며 교수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가족이 될 수 있나요?”
“우리 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넌 우리 가족이었어.”
“…….”
잠깐의 침묵, 그리고 회피.
이 정도면 기쁨과 슬픔을 절묘하게 섞어 제대로 연출한 것이다.
덴스의 얼굴을 보니 연기가 먹혀든 것 같다.
하면 할수록 느는 게 기술이라더니. 얼굴 근육이 뜻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좀 더 다듬으면 유렐 취조부장도 속일 수 있을까?
잠깐 고민했지만, 그건 힘들어 보였다. 취조부장은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인간 본성을 파괴하고 심층을 들여다보는 걸 업으로 삼은 사람.
달리 말하자면, 취조부장 역시 그쪽 방면에서는 천재일 지도 모른다.
범재가 어쭙잖게 천재에게 도전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적당히, 선을 타면서 필요한 것만 취하며 몸집을 키워야 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유렐과도 동등한 위치에서 거래를 할 수 있겠지.
개인적으로 유렐은 참 마음에 들었다. 검디검은 속내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정말 강인한 인간이니까.
남을 위하는 척, 배려하는 척, 정의로운 척하는 눈앞의 인간들보다야 훨씬 순수하다고 볼 수 있다.
덴스가 연구원들을 불러 모았다.
원정준비를 시작하는 모양이다.
올란트 옆에 찰싹 붙어 있던 가하란이 쪼르르 다가와 옆에 섰다.
“형. 나 아빠한테 말했어. 무섭지만 참아 보겠다고. 그러니까 나 때문에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유단은 환하게 웃으며 주먹 쥔 손을 가하란 앞으로 내밀었다.
“잘했어.”
가하란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먹을 바라본다.
“가위바위보?”
“아니. 너도 주먹 쥐고 내 손을 가볍게 쳐. 뜻이 맞았다는 의미이자, 서로를 격려하는 의미야.”
“그래?”
가하란이 주먹을 부딪쳐왔다.
찢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안 드는 애새끼지만, 오늘만큼은 사랑스러웠다.
덕분에 많은 걸 얻을 수 있게 됐으니까.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이해하면서 어른이 돼가는 거야.”
“어른. 나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그래서 아빠랑 같이 여행을 다닐 거야.”
“그래. 더 크게 되면 그렇게 해.”
내가 언제 널 죽일지는 모르겠지만, 여행 한번 정도는 보내줄게.
유단은 웃으면서 가하란의 볼을 꼬집었다.
먼 훗날, 손 대신 칼로 목을 긋는 상상을 하면서.
* * *
“이걸로 끝.”
민 크알데는 손을 턴 다음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살풍경이던 방에 가구가 들어찼다.
감회가 새롭다. 집안 에 가구를 들이고 같이 사는 사람이 생기다니.
아니지. 같이 사는 사람에, 같이 사는 개 한 마리.
“여기가 네 방이야.”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상자를 든 가하란이 방으로 들어왔다.
“여기가 제 방이에요? 이렇게 넓은데요?”
“특무대령님이 마련해준 곳이야. 덕분에 나도 이런 곳에서 살게 됐네.”
귀족 거주지와 인접한 블록.
둔에서 힘깨나 쓴다는 시민들이 이 주변에 살고 있다. 덴스 교수 집도 이 근처일 것이다.
민은 창문 밖 풍경을 내다보았다.
도로는 깨끗하고 사람들 표정에는 여유가 있으며 무엇보다 조용하다.
마음에 드는 곳이다.
진즉에 여기로 올 걸 그랬나?
“화장실은 옆에 있고 세탁물은 모아서 문 앞에 내놓으면 돼.”
“빨랫감을요? 왜요?”
“네가 빨래할 필요 없어. 대신해주는 사람들이 수거해갈 거야. 급하게 입어야 할 옷이나, 수선이 필요한 옷, 혹은 조심히 다뤄야 할 옷은 따로 신청해야 하지만.”
민은 입고 있던 조끼를 벗어 바구니에 던졌다. 가하란이 바구니를 바라보며 작게 말했다.
“좀 이상해요.”
“뭐가?”
“남이 빨래를 해주는 거요. 부끄럽기도 하고.”
“정 불편하면 직접 빨래해도 돼. 하지만 네가 일거리를 내놓지 않으면 이 저택에 고용된 사람들이 일을 그만두게 될지도 몰라.”
“정말요? 일을 못 하게 돼요?”
반쯤 농담으로 한 말인데, 가하란이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어린애가 노동과 돈에 대해 빠삭한 것 같다.
아니지. 둔에서 일곱 살이면 알건 다 알게 되는 나이였던가?
삶이 팍팍할수록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연령층이 낮아진다고 하는데, 일곱 살이면 어느 정도인 걸까.
적당한 나이인가? 아니면 어른들의 과한 욕심이 불러온 제도의 오류인가?
잠깐 고민하던 민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이런 걸 따지는 것도 둔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시설이 갖춰지지 못한, 이름 모를 마을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세상과 접촉한 순간부터 문제와 맞닥뜨리니까.
한 살도 채우지 못하고 죽어가는 아이들이 많다는 걸, 민은 직접 봐서 알고 있었다.
경제활동 이전에 생존부터 걱정해야 하는 것이다.
가하란이 주섬주섬 빨랫감을 모으더니, 명찰이 달린 바구니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이러면 여기서 일하는 분들이 계속 일할 수 있겠죠?”
우물쭈물 묻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아줌마가 살짝 농담한 거야. 그 정도 빨랫감이 없다고 해서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쫓겨나진 않아. 여기만 관리하는 것도 아니고.”
가하란이 금세 뚱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바구니에서 자기 옷을 꺼내 들었다.
“그러면 제가 빨게요.”
“뭐가 그렇게 부끄러워.”
“그냥요.”
어린애 감수성을 괜히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편한 대로 하라고 말한 뒤 맞은편 방문을 가리켰다.
“아줌마 방은 여기.”
“네.”
“그리고 이 똥강아지 말인데….”
헥헥거리며 사방팔방 날뛰는 개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이름이 툴이라고 했던가?
가볍게 들어 올려 시선을 마주했다. 개는 주인을 닮아간다고, 이 녀석 눈동자에도 호기심이 가득하다.
“밤에 짖거나 그러진 않지?”
“네. 잘 안 짖어요.”
“그거면 됐어. 위아래 사는 사람들이 주택 관리자한테 민원 넣으면 골치 아프거든.”
하나의 건물 안에 층을 나누고 일면식 없는 구성원들이 모여 사는 방식.
참으로 낯선 주거 환경이지만, 이 블록에서는 흔한 형태인 것 같았다.
숙박시설 같아서 웃기긴 하다.
더불어 주거 안전문제를 이웃의 도덕성에 맡겨버렸다는 것도 재미있고.
물론 침입자가 나타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때려잡으면 그만이니까.
툴을 살짝 놓았다. 바닥에 내려앉은 툴이 민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교수님.”
“왜?”
“어떻게 하면 그렇게 힘이 세져요? 신체술인가요?”
“아니. 이건 신체술이 아니야.”
“그러면요?”
“타고난 힘. 단련된 힘.”
“…….”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꼬마였다.
“대충 정리했으니 이만 가보자.”
“네!”
문을 열고 나서는데, 개가 낑낑거리며 따라 나왔다. 가하란이 들어가라고 밀어붙여도 말을 안 듣는다.
“데려가. 훈련장에 풀어놓으면 되니까.”
가하란이 방긋 웃으며 툴에게 목줄을 채웠다. 거리에선 반드시 목줄을 해야 한다는 관리인의 말이 귀에 맴돌았다.
거리로 나왔다.
솜옷을 입은 사람들이 제법 보였다. 하긴, 이제 11월이니. 피부로 느껴지는 온도만큼이나 숫자가 주는 온도감도 중요했다.
“안 추워?”
가하란을 보며 물었다. 얇은 티에 군청색 멜빵바지. 위에 걸칠 걸 가져왔어야 했나?
“아직은 괜찮아요.”
“조금 춥다는 뜻이네. 두꺼운 옷 있어?”
“집에 두 벌 정도 있어요. 아빠가 떠나기 전에 사 주고 가셨어요.”
“그러면 됐네.”
민은 슬쩍 가하란을 바라보았다.
어찌어찌 이곳으로 이사 오게 됐어.
“근데 정말 괜찮은 거야?”
“네? 뭐가요?”
“그 골목 사람들. 내가 널 맡는 걸 못마땅해하던데.”
가하란이 옅게 웃었다.
“다들 교수님을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걱정돼서 그런 거예요.”
“내 눈에는 그렇게 안 보이던데. 그건 증오에 가까웠어.”
“아니에요.”
작게 웃는 가하란이었다.
“왜 나하고 지내는 걸 선택한 거야?”
“저도 아빠처럼 꿈을 이루고 싶거든요.”
“꿈?”
가하란이 멈춰 서며 말했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이 눈은 특별하다고. 멋있다고. 그리고 아빠가 말해줬어요. 이 눈이 제 꿈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라고요.”
민은 팔짱을 끼며 걸어갔다. 멈춰있던 가하란이 종종걸음으로 따라왔다.
“전 교수님한테 빨리 배우고 싶어요. 그러려면 교수님 곁에 있는 게 좋잖아요.”
“나도 널 옆에 두고 관찰하고 싶었으니까 상관없지만, 정말 괜찮겠어? 난 그 골목 어른들처럼 마냥 상냥하지 않아.”
“그런가요? 제 눈에는 룽네 아줌마만큼이나 다정해 보이는데.”
“그건 차차 겪어보면 알겠지.”
민은 미소 지으며 턱짓했다.
“좀 서두르자. 애들 기다리겠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