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화
2별관 왼편, 나뭇잎이 몇 개 떨어진 벤치에 앉았다.
“아침에 춥더라.”
옆에 앉은 올란트가 말했다.
“그러니까요. 툴도 추웠는지 침대로 올라오더라고요.”
“작년 겨울에 난리도 아니었지. 난로 옆에 계속 붙어 있다가 털이 타버리고.”
“자기 털 타는 줄도 모르고 마냥 웃고 있었잖아요. 툴도 가만 보면 둔한 구석이 있어요.”
가하란은 노랗게 익은 낙엽을 주웠다. 손바닥보다 조금 더 컸다. 부채처럼 휘휘 저으며 아빠를 바라보았다.
“가하란.”
“네.”
“민 교수님한테 어느 정도 얘기는 들었지?”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눈이 특별하다는 것도, 남들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교수님께서 이것저것 알아보고 계셔. 조만간 널 찾아올 거야.”
“말 잘 들을게요.”
올란트가 미소 지으며 가하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코가 점점 날렵해지네. 역시 내 아들이야.”
오도카니 바라보는 올란트의 눈에서 많은 걸 읽어낼 수 있었다. 가하란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아빠. 할 얘기 있다고 했죠?”
“음, 있지.”
“…꼭 들어야 하는 거죠?”
“들어줬으면 해.”
가하란은 낙엽을 손에서 놓았다. 빙빙 돌며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이 바람에 휩쓸려 저 멀리 날아갔다.
금세 시야에서 사라진다.
“아빠가 멀리 가야 할 일이 생겼어.”
“멀리요? 어느 정도요?”
“제국 끝자락. ‘볼로스’란 곳인데 국경지대야.”
“몇 밤 자야 갈 수 있는데요?”
“여건에 따라 다르겠지만 두 달은 걸릴 것 같아.”
두 달. 까마득한 시간이었다. 가는 데만 두 달이면 돌아오기까지…….
가하란은 덜컥 겁이 났다.
아빠가 집에 안 돌아오는 거야 늘 겪는 일이라 괜찮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집에 없을 뿐, 같은 도시 안에 있었다.
원하면 언제든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지금처럼.
하지만 아빠가 도시 밖으로 나간다면?
“…아빠.”
배 안쪽이 쿡쿡 쑤셨다. 배탈이 난 것처럼 아팠다. 울고 싶지 않은데 갑자기 눈물이 고였다.
“저도, 저도 갈래요.”
“아빠도 그러고 싶어. 널 데려가고 싶어. 하지만 널 데려갈 만한 상황이….”
얘기하던 도중 올란트가 가하란을 끌어안았다. 훌쩍이며 귀를 기울이는데, 아빠 역시 울먹거리고 있었다.
“아니다, 아니야. 내가 잠깐 잘못 생각했어. 아빠 여기 있을게. 미안해, 이상한 소리 해서.”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작게 기침이 나왔다. 눈물은 금방 그쳤다. 가지 않겠다는 아빠 말에 안심이 됐다.
가하란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손바닥으로 훔쳐내고 올란트를 보았다.
“진짜 안 가는 거예요?”
“어. 아빠가 잠깐 이상한 생각을 했어. 널 두고 가다니, 정말 안 될 일이지.”
아빠의 눈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눈가는 촉촉했다. 가하란은 주섬주섬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연구실로 놀러 갈까?”
“오늘은 가도 돼요?”
“되고말고. 가자. 가서 유단 형이랑 놀다가 점심 먹자. 유단이 널 많이 보고 싶어 하더라.”
얼른 가자고 말하려다가 셀베이아가 떠올랐다.
“누나한테 말하고 갈게요.”
“그래. 그래야 걱정을 안 하겠네. 나도 가서 인사하고.”
중앙부로 돌아가 셀베이아에게 사정을 말했다.
아빠와 누나가 서먹하게 웃으며 말하는 걸 지켜본 뒤 다시 밖으로 나왔다.
“가자.”
붙잡은 손을 앞뒤로 힘차게 흔들며 말하는 올란트였다.
* * *
“이해해. 당연하지. 부모 마음이란 게 그런 거지. 이해는 해… 이해는 한다고.”
덴스가 안경을 올려 썼다. 흘러내리지도 않은 안경을 몇 번이고 다시 올린다.
올란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선배가 어떤 심정인지 훤히 보였다.
“죄송해요.”
“아니야, 네가 죄송할 게 뭐 있어.”
“가겠다고 선언했는데, 막상 가하란 얼굴 보니까 안 되겠더라고요.”
“그렇지. 같은 도시에 있는 거면 모를까. 아직 어린 애를 혼자 내버려 두고 떠나는 건 무리가 있지.”
덴스가 휴게실 밖을 바라본다. 올란트도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유단과 찰싹 붙어 이야기 중인 아들이 보였다. 까르르 웃고 있다. 꽤 즐거운 모양이다.
“제가 따라가지 않아도 문제 될 건 없겠죠?”
이기적인 질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안경을 매만지던 선배가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올란트.”
“예.”
“3중첩 마력선. 그거 미세조정은 네 도움이 반드시 필요해.”
“…저 없이도 괜찮을 겁니다. 선배도 확실하게 잡아낼 수 있고요.”
“아니. 난 못 해.”
덴스가 손을 말아 쥐었다. 초조한 손짓이었다.
“이런 말해서 정말 미안한데, 네가 여기서 빠지면 이번 원정은 아무 의미 없어.”
“선배.”
“필렌 경도 네가 정립한 연구성과를 기대하고 있을 거야. 지금 볼로스에는 오버홀해야 하는 실험기가 한 대 있어. 자잘한 구동계부터 오토마타까지, 우리가 전부 손대야 하는 놈이야.”
올란트는 눈썹을 매만졌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잠을 설칠 정도로 기대했었다. 기초 공정 단계를 막 끝낸 거병을 재조립할 수 있다니.
거병 기술자로서 이보다 설레는 일은 없을 것이다.
“비일은 성도에 일이 있어서 이번에 합류 못 해. 그렇기에 네 빈자리가 더욱 커져.”
“선배.”
덴스가 올란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무리한 부탁이란 거 알아. 하나뿐인 아들, 너의 유일한 혈육을 여기에 두고 가라는 말이 얼마나 잔인한지도 알고.”
반들거리는 유리알 너머로 집념이 가득 찬 선배의 눈이 보였다.
순수한 욕망.
올란트는 생각했다. 나 역시 선배와 똑같은 눈을 하고 있겠지, 라고.
“중요한 일정이야. 필렌 경도 계속 붙들어둘 수 없어. 그 사람은 흥미를 잃으면 곧바로 떠나버릴 거야.”
“압니다, 알아요. 저도 가고 싶어요. 하지만….”
아내가 살아 있었다면, 가족이란 울타리를 유지한 채 이곳을 떠날 수 있었다면 망설임 없이 짐을 쌌을 것이다.
“가하란을 데려갈 수 없을까요?”
“불가능하다는 거 알고 있잖아. 우린 겉으로 드러나선 안 될 연구를 진행 중이야. 알렝 국장을 통해 들어온 자금줄이 발각되면 단순한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거, 잘 알잖아.”
올란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연구로 황가와 의회를 속이고 있지만, 소형화 계획이 유출되면 우린 온갖 제지를 당할 거야. 정도가 심하면 죄인이 될 수도 있어. 볼로스로 간다는 건 더 이상 발을 빼지 않는다는 의미고,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죄가 될 수 있다는 뜻이지.”
쓰라린 한숨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거병과 정치는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국가사업이면서도 그 안에서 파벌이 갈려 있다.
정치적으로 얽혀 있는 만큼 문제가 될 시 가족도 위험했다.
“나도 마음 같아선 가족들 다 데리고 볼로스로 가고 싶어. 나도 딸하고 헤어지고 싶지 않아. 하지만, 같이 가는 것 자체가 위험할 수 있으니 이곳에 두는 거야. 만약 잘못됐을 때 그 아이한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덴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는 무서운 사람이야. 지난 십여 년간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온갖 짓을 저질렀어. 황가 반대편에 섰다가 학계에서 이름을 박탈당한 연구자들이 몇 명이나 될 거 같아? 의회는 또 어떻고.”
틀린 말이 없었다. 가하란을 볼로스로 데려가는 건 못 할 짓이었다.
정치적 문제뿐만 아니라 환경 여건도 문제였다.
두 달이라는 긴 여행.
게다가 겨울.
여행길에서 건강상 문제가 생기면 손쓸 방법도 없었다.
국경지대까지 가는 길에 시설을 갖춘 병원이 놓여 있는 것도 아니고.
무사히 도착해서도 문제는 산더미였다. 볼로스 시내에서 생활하는 게 아닌, 은밀히 건설된 격납고 근처에서 생활해야 했다.
한파가 불어 닥칠 그곳에서, 아이가 아무 탈 없이 버텨낼 수 있을까?
올란트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덴스가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올란트. 가족이 무엇보다 중요한 거 안다. 나 역시 내 딸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어. 하지만… 이번 일은 가하란의 아버지가 아닌, 올란트라는 한 명의 기술자로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순간이야.”
달콤한 말이었다.
기술자로서의 자아 실현.
세나티아 가를 뛰쳐나온 이유, 평생을 갈망했던 꿈.
그러나, 그 꿈마저 저기 있는 소중한 아들과 비교하면 보잘것없이 느껴진다.
“죄송합니다. 전 여기 남겠습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네가 손을 떼는 순간, 멧시언 소장님 역시 너한테서 손을 뗄 거다. 그분은 인자하지만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아.”
응어리진 가슴이 아려온다.
아쉬움이 극한에 달해 애처럼 울고 싶을 정도였다.
올란트는 창밖에 있는 가하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다시 대답했다.
“저 애는 지금까지 많이 참아왔어요. 또 참아달라고 하는 건 못 할 짓이죠. 전… 여기 남을게요.”
“…….”
덴스가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벽에 기댔다.
* * *
“안 가겠다고 했어? 치프님께서?”
유단의 질문에 가하란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어. 아빠가 안 간다고 했어.”
“그래?”
형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가하란은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내가 나쁜 걸까? 아빠는 분명 하고 싶은 일이 있었을 거야. 정말 중요한 일일 테고.”
유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하란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휴게실로 들어간 아빠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덴스 아저씨와 심각한 얘기를 하는 중이겠지?
“가하란.”
“응?”
“난 혼자야.”
가하란은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넣었다. 괜찮아,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유단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차마 말이 안 나왔다.
“힘들었어. 내가 너보다 조금 더 나이를 먹었지만, 그래도 이제 열 살이잖아? 뭐, 성인 취급 받을 수 있는 나이긴 하지만 보통은 애 취급 하잖아.”
가하란은 숨을 조용히 내쉬며 유단의 말을 들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 정말 안 좋아. 끔찍해. 근데, 이제는 괜찮아졌어. 왜냐하면 날 지탱해주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생겼으니까.”
유단이 휴게실 쪽을 바라봤다.
“이런 말하면 조금 부끄럽지만, 덴스 교수님은 아버지 같은 분이셔. 평생을 다 해도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지.”
그렇게 말하는 형의 표정은 정말 기뻐 보였다.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나도 교수님 옆에 있고 싶어. 옆에 안 계시면 불안하기도 하고. 하지만 난 여기서 교수님을 기다릴 거야.”
“덴스 아저씨가 멀리 가도 괜찮아? 형은 그래도 돼?”
“괜찮지는 않아. 하지만 나 때문에 교수님이 꿈을 포기한다면, 목표한 걸 이루지 못한다면 그건 더 괴로운 일일 거야.”
꿈과 목표.
가하란은 답답해지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알고 있다. 아빠가 떠나겠다는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고민했을지. 그만큼 힘든 말이었으니 울었던 것이고.
“가하란. 넌 어떻게 생각해?”
“나?”
“후회하지 않겠어? 언젠가 치프님이 널 보면서 이날을 떠올릴지도 몰라. 그때 떠났으면 어땠을까, 그런 미련이 계속 남아 있겠지.”
“싫어. 난 아빠가 후회하는 거 바라지 않아.”
“나도 그래.”
유단이 가하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보내드리자. 두 분의 꿈을 위해서.”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