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8화
세 번째.
브라인은 곁눈질로 꼬마를 살폈다. 벌써 세 번째 한숨이었다.
종족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데, 나이를 들먹이며 한소리 늘어놓는 건 정말 웃긴 일이지.
웃긴 일이야.
“고루하지만 이 상황과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 있지. 꼬마야, 땅 꺼지겠다.”
알면서도 핀잔을 줄 수밖에 없는 건 내가 늙은 탓인가. 브라인은 턱을 괴며 가하란을 바라보았다.
“브라인 님.”
“왜.”
“아저씨가 인사도 안 하고 그냥 갔어요.”
“아까도 들었어.”
“인사 정도는 해도 되지 않나요? 저랑 헤어지고 나서 바로 둔을 떠나셨대요. 섭섭해요.”
“아까도 말했지만, 걔는 원래 그런 애야.”
“원래 그런 건 없어요. 제가 버릇없게 굴었던 걸까요? 그래서 아저씨가 귀찮아서 인사도 없이 간 걸까요?”
칼리고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었나 보네, 브라인은 가볍게 손짓했다.
가하란의 몸이 둥실 떠 책상에 올랐다. 평소였다면 자지러지게 웃어야 할 꼬마가 별 감흥도 없다는 듯 바닥만 내려다본다.
“꼬마야.”
“네.”
“너한테는 모든 게 다 특별해 보일 거야. 눈을 뜨는 것도, 만나는 것도, 인사하는 것도. 하나하나가 정말 특별하고 소중하겠지.”
의수로 조심스럽게 가하란의 머리를 매만졌다. 어린 인간은 나약해서 잘못 건드리면 큰일이 난다.
“하지만 그 특별한 것들도 언젠가는 무뎌지는 법이야. 물론 무뎌졌다고 해서 소중하지 않은 건 아니고, 그냥 넘겨도 되는 정도로 변할 뿐이지.”
뚱한 표정을 짓는 아이였다. 칼리고 그놈이 인사만 하고 갔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하여간 마음에 안 드는 놈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거병을 볼 수 있다면 어떻게 할래?”
“당연히 보러 가야죠!”
거병 얘기에 금방 눈이 반짝거린다. 어처구니없어서 멀거니 바라보다가 픽 웃으며 말했다.
“조금만 늦어도 볼 수 없다면?”
“서둘러야죠.”
브라인은 거기서 대화를 끊었다. 가하란이라면 분명 이해했을 것이다.
뾰로통했던 얼굴에 가느다란 웃음이 걸렸다.
“세상에서 가장 큰 거병이라면 어쩔 수 없죠!”
“할 거 다 하고 나면 돌아와서 너한테 인사해줄 거다. 그리고 뭘 보고 왔는지도 자세히 설명해줄 거고. 그놈은 입 다물고 살 수 없는 인간이니까.”
브라인은 가하란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 이제 내려가, 라고 말하면서.
책상에서 내려간 가하란이 생긋 웃으며 물었다.
“근데 아저씨는 뭘 보러 간 걸까요?”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희한한 사건을 뒤쫓고 있겠지. 네가 거병에 미쳐 있듯, 그놈은 사건에 미쳐 있으니까.”
“전 안 미쳤어요.”
“미친 애들은 원래 자기가 안 미쳤다고 그래.”
빤히 쳐다보던 가하란이 작게 목소리를 냈다.
“브라인 님도 그런 게 있어요?”
“그런 거?”
“저한테는 거병, 칼리고 아저씨한테는 사건. 브라인 님은 어떤 걸 좋아하세요?”
“나?”
브라인은 허공에 손가락을 저었다. 뒤에 있는 캐비닛에서 푹신한 베개가 튀어나왔다.
“자는 거. 자, 할 일 끝났으니 나가봐. 노인네 자는 거 방해하지 말고.”
“너무 많이 자면 안 좋다고 아빠가 그랬어요. 그러니까 저랑 걸으러 가실래요?”
“산책이라면 오백 년 전에 질리도록 했어.”
베개에 파묻혀 눈을 감았다. 아늑한 침묵이 찾아온다.
“안녕히 주무세요.”
슬며시 눈을 떴다. 까치발을 들고 입구로 걸어가는 가하란이 보였다.
하는 짓이 귀엽기는 해.
다시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둔뿐만이 아니라 제국 곳곳에서 기이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각각 별개의 사건처럼 보이기도 하고, 하나의 끈으로 엮인 사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평화가 길긴 했지.”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잠을 불러왔다.
인생은 바닷가였다.
공들여 모래성을 쌓고 온갖 조형물을 꾸며도, 바닷물이 밀려오면 모든 게 쓸려나간다.
브라인은 문화의 흥망성쇠를 수없이 관찰해왔다. 제도는 완벽할 수 없고, 지성체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인간 역시 불완전하다.
완벽을 꿈꾸지만, 그 누구도 도달한 적이 없다. 바닷물은 항상 밀려오며 여지없이 방파제를 부수고 쌓아놓은 걸 밀어버린다.
그런 거겠지.
셀베이아도, 가하란도 언젠가 찾아올 바닷물에 쓸려 사라질 것이다.
남는 건 텅 빈 곳을 전전하는 외로운 노인네뿐.
가하란에게 했던 말이 돌고 돌아 가슴을 쓸고 지나갔다.
특별한 것도 무뎌진다.
하지만 무뎌졌다고 해서 소중하지 않은 건 아니다.
이별에 무심해졌다고 한들 그 순간이 도래하면 분명…….
“이래서 정 주는 게 싫은 거야. 잠이나 자야지.”
잠은 불변하며 오롯했다.
브라인은 영원한 곳으로 잠시 도망쳤다. 바닷물이 스며들지 않는 아주 조용한 곳으로.
* * *
“기운이 난 것 같네.”
기록보관서 밖으로 나오자마자 셀베이아가 한 말이었다. 가하란은 힘차게 네, 라고 대답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잘 챙겨주신다니까.”
슬쩍 문을 바라보며 말하던 셀베이아가 가하란에게 손짓했다.
“심부름할 게 생겼는데. 2별관까지 혼자 갈 수 있겠어?”
“저번에 가봐서 할 수 있어요.”
셀베이아가 보자기에 싼 서류를 건넸다.
“‘재정처’에 이걸 가져다주면 돼. 가르고르 아저씨 기억하지?”
“네.”
보따리를 챙기고 계단을 내려갔다.
“어디 가니?”
“2별관이요.”
“그래, 조심히 다녀와라.”
중앙부 검문대 군인과 인사를 나눈 후 거리로 들어섰다. 이 길을 따라가면 2별관이 나온다.
낮게 깔리며 불어오는 바람이 꽤 차가웠다. 올해는 가을이 짧으려나.
마주 오는 군인들과 인사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2별관이었다.
“얼른 와.”
“가고 있어요.”
별관으로 들어서 재정처로 가는 모퉁이를 돌 때였다. 재정처 앞에 모여 있는 ‘트릿족’이 보였다.
1미터 남짓한 키에 펑퍼짐한 다람쥐를 닮은 얼굴. 등에 멘 원탁과 한 아름 품고 있는 돈 자루.
은행 근처에서 종종 봤던 그 트릿족이 확실했다.
“실수하지 말고. 계산 확실하게 해.”
“네. 확실하게 할게요.”
재정처에 볼일이 있는 것 같았다. 가하란은 슬그머니 트릿족 옆으로 다가갔다.
머리를 한 대 모아 열심히 떠들던 트릿족 세 명이 화들짝 놀라며 가하란을 바라봤다.
“뭐야?”
“안녕하세요.”
“뭐냐니까.”
“저도 여기 심부름 왔거든요.”
보따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대장으로 보이는 트릿족이 커다랗고 검은 눈을 위아래로 굴렸다.
“돈 뺏으려는 건 아니고?”
“그런 짓 안 해요.”
“그러면 됐어.”
트릿족이 문을 열었다. 저번과 달리 아주 조용한 재정처였다. 주판알 굴러가는 소리만 드문드문 날 뿐이었다.
“손님이 두 분이나 왔네.”
가르고르가 손을 들며 말했다. 가만히 서 있는 트릿족을 바라보다가 먼저 가르고르한테 갔다.
“심부름 왔어요.”
보따리를 책상에 올려뒀다. 가르고르가 안에든 서류를 확인했다.
“잘 받았다. 수고했어.”
“뭐 시키실 일 있나요?”
“아쉽게도 오늘은 한가해.”
가르고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트릿족에게 말을 걸었다.
“머니페니, 이쪽으로 와서 자리 펴면 됩니다.”
머니페니?
무슨 뜻일까.
트릿족이 잰걸음으로 다가와 바닥에 원탁을 펼쳤다. 자그마한 테이블 위에 자루가 올라갔다.
“환전업무 신청한 거 맞죠?”
트릿족이 물었다.
“네. 시간 맞춰 잘 오셨어요.”
“준비한 금액은 금화 200닢 정도 됩니다. 여기 말고도 다른 곳도 들러야 하니 100닢 정도만 환전해 드릴게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재정처 사람들이 묵직한 자루를 들고 왔다. 트릿족은 자루에 담긴 동전을 꺼내 저울에 올리고, 동그란 틀에 담았다.
“이쪽 상단은 사라진 지 오래라 시세의 8할. 훼손된 것들은 급에 따라 6할, 7할, 8할입니다. 이전 왕조 건 골동품 규격에 따라 분류가 다르니 그건 나중에 하고.”
“조금 더 쳐달라고 해도 안 되겠죠?”
가르고르가 묻자 트릿족 대장이 수염을 파르르 떨었다.
“탁자 뺄까요?”
“농담 한번 해봤습니다. 시세대로 처리해 주세요.”
트릿족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손을 움직였다.
동전을 세고 분류하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가하란은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자. 끝났어요.”
그 많던 동전이 순식간에 분류돼 자루 속으로 들어갔다.
“확인해 보고 문제 생기면 은행으로 연락줘요.”
“머니페니의 업무에 실수란 게 있을까요. 고생했습니다.”
서류를 주고받은 뒤 곧바로 몸을 돌리는 트릿족이었다.
자그마한 몸에 큼지막한 돈 자루를 이고 있는데, 힘이 대단한지 걸음이 가뿐했다.
“아저씨. 저분들 트릿족 맞죠?”
가하란은 닫힌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맞아. 은행에서 일하는 자들. 이 세상 모든 재물을 관리하고 있지.”
“근데 왜 머니페니라 불러요? 이름인가요?”
“애칭이라고 보면 돼. 저들은 그 호칭을 좋아하거든.”
오늘도 하나 배웠다.
가하란은 재청처 사람들을 둘러봤다. 다들 바쁜 모양인지 눈을 마주치는 사람이 없다.
“저 가볼게요.”
일하는 걸 방해하면 안 된다고 했으니까. 가르고르에게 인사하고 재청처 밖으로 나올 때였다.
“자루 관리 똑바로 하라고 했지!”
“죄송합니다.”
떠난 줄 알았던 트릿족 셋이 복도에 서 있었다. 바닥에 잔뜩 깔린 동전. 아무래도 사고가 난 것 같다.
가하란이 다가서려 하자 트릿족 대장이 손을 들어 올렸다.
“너! 오지 마.”
“도와드릴게요.”
“됐어. 가던 길 가. 이건 우리가 처리할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돈을 자루에 담는데, 튕겨 나간 동전 하나가 가하란 앞까지 굴러왔다.
윤이 나는 금화였다. 제국중앙은행에서 발행한 금화. 이건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아빠가 갖고 있던 주머니에 이런 게 가득했지.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해진다. 잘 해결돼서 정말 다행이야.
가하란은 금화를 쥔 채 트릿족에게 걸어갔다.
“오지 말라니까!”
성내는 트릿족 대장을 얌전히 바라보며 금화를 내밀었다.
“이거요. 떨어트리셨어요.”
“…….”
“얼른 받으세요.”
“…고맙다.”
가하란은 미소 지으며 다시 물었다.
“도와드릴까요?”
“…마음만 받을게. 이건 우리가 담당한 일이야. 인간 손 타게 할 수는 없어.”
트릿족 대장이 손으로 뺨을 긁었다.
“소리쳐서 미안하다. 근데 우리 일이란 게 욕심을 다루는 것이라 조심해야 하거든.”
“무슨 뜻인지 알아요.”
가하란은 간식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세 개를 꺼내 트릿족에게 하나씩 주었다.
“화날 땐 단걸 먹는 게 좋대요.”
말을 마치고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짧게 인사하고 돌아서려는데, 트릿족 대장이 불러세웠다.
포물선을 그리며 반짝이는 게 날아왔다. 트릿족 얼굴이 박혀 있는 구리동전이었다.
“우린 공짜는 받지 않아. 모든 것에 대금을 치르지.”
수많은 구리 동전을 봐왔지만, 이렇게 생긴 건 처음이었다. 기념품 같은 건가?
가하란은 주머니에 동전을 넣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인사하고 돌아서는데, 복도 끝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아빠!”
가하란은 올란트를 보자마자 소리를 내며 달려갔다. 올란트가 가하란을 안아 들며 말했다.
“안 본 사이에 이렇게 컸어?”
“아빠. 우리 이틀 전에도 봤어요.”
“이틀이면 엄청 긴 시간이야.”
가하란은 수염이 돋아난 아빠 얼굴을 보며 물었다.
“별관에 일이 있어서 오신 거예요?”
“아니. 너 만나러 왔어. 할 얘기도 있고.”
“얘기요?”
올란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