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화
2년 전쯤에 체스 마스터 론켄의 다면기를 구경한 적이 있었다.
인근에서 체스깨나 둔다는 귀족 일곱이 모였고 대국이 진행됐다.
젊은 체스 마스터 론켄은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체스보드를 오가며 기물을 움직였고, 그럴 때마다 귀족들 사이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론켄은 강자였지만 겸손했다. 기물을 옮기는 손길은 투박했지만, 기보는 우아했다.
대국을 관람하며 이런 생각을 했다.
언젠가 다면기를 둘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갖추고 싶다고.
그리고 지금.
바람이 이루어졌다.
문제가 있다면 지도를 하는 쪽이 아니라, 지도를 받는 쪽에 있다는 거지만.
수가 막히자 잡념이 든다. 밀레나는 고개를 털고 보드를 응시했다.
폰을 쥔 손이 한동안 체스판 위를 방황했다. 가야 하는데, 갈 길이 마땅치 않았다.
밀레나는 결국 최선의 수를 뒀고, 최악의 경우를 맞이했다.
순식간에 기물을 움직인 가하란이 옆으로 한 발짝 이동했다.
그 짧은 사이에 이런 수를 떠올린 걸까, 아니면 이미 내다보고 있었던 걸까.
정답이 무엇이 됐든 간에 벽에 몰린 건 확실해졌다.
슬쩍 옆을 바라봤다. 이리엘데가 부랴부랴 말을 이동시키고 있었다. 성급한 수라는 게 표정에서 읽힌다.
“체크.”
간단히 외치고 옆으로 이동하는 가하란이었다. 이리엘데가 미간을 꾹 누르며 의자를 뒤로 뺐다. 항복 선언이었다.
미엔과 로운은 진즉에 패퇴했다.
이제 남은 건 나와 율, 브리테인가?
아니다. 어, 하는 사이 브리테도 백기를 들었다.
율 앞에서 잠시 고민하던 가하란이 수를 두고 이쪽으로 걸어온다.
밀레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체스보드를 들여다봤다. 시간이 없다. 가하란이 도착하면 말을 움직여야 했다.
고민 끝에 룩을 밀어 넣었다.
볼품없는 수였다. 상대방의 실수를 기도해야 하는 수였다. 이게 최선의 수라니, 헛웃음만 나온다.
밀레나는 힐긋 가하란을 보았다.
어쩌면 딱 한 번, 운 좋게 이 국면에서 수를 놓치지 않을까?
많이도 필요 없었다. 한 번의 기회면 전황을 뒤바꿀 수 있었다.
가하란의 퀸이 나섰다. 보병들이 날뛰고 있는 전장 한가운데 거병이 떨어진 꼴이었다.
기적, 요행, 실수.
그런 건 찾아오지 않았다.
“졌다!”
율도 나가떨어졌다.
이제 남은 건 밀레나 혼자였다.
눈동자를 바삐 굴리며 수를 찾아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단두대에 목이 걸려 있음을.
“졌어.”
체크 선언을 듣지 않은 건 일말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끝맺음이라도 내가 하겠다는 옹졸한 마음.
“더 할까요?”
가하란이 방긋 웃으면서 물었다.
동기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세 판째였다. 다면기를 휴식도 없이 연이어 세 판. 가하란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첫 번째 게임에서는 제법 고심하더니, 이어진 게임에서는 막힘없이 수를 뒀다.
상대방의 기풍을 모두 알아차렸다는 듯이.
“이젠 무너질 자존심도 없어.”
이리엘데가 맥없는 웃음을 내었다.
“최연소 그랜드마스터가 몇 살이었지?”
“대회가 몇 개 추가되고 나서는 좀 바뀌었지만, 스물한 살 정도라 보면 돼.”
“미래의 체스 마스터한테 진거라 생각하자. 그래야 속이 편하지.”
미엔과 로운이 주고받은 대화였다. 두 사람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가하란에게 다가갔다.
온갖 질문을 퍼붓는데 가하란은 싱글벙글 웃으며 전부 대답해 주었다.
말하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 거야.
미소 지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율이 시들시들한 얼굴로 옆에 앉았다.
“쟤들 태도 바뀌는 거 봐. 가하란이 골목 출신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미적지근한 눈으로 보더니, 이제는 아주 신나서 달라붙네.”
“계속 냉랭하게 보는 것보다야 낫지. 쟤들도 브리테랑 어울리다 보니 좀 순해진 거 같아.”
“로운이야 생긴 것처럼 둥그스름하니 괜찮았지만, 미엔은 까칠했었지.”
밀레나는 살짝 웃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겉보기에는 미엔의 차별성이 도드라지는 것 같지만, 경험해 본 바에 의하면 로운이 좀 더 배타적이었다.
미엔이 겪은 불행한 사고는 시민을 멀리하는 근거가 됐다. 명확한 이유가 있으니 시민을 기피하는 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로운은 그런 게 없다. 시민과 거리를 두는 건 당연한 일. 로운의 행동 기저에 깔린 사고일 것이다.
미워하지도 증오하지도 않는다.
로운에 눈에 비친 시민은 그런 대상조차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교육받아 오고, 그렇게 살아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걸 잘못됐다고 지적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세상의 구조가 그러하니까.
옆에서 보고 있으면 유치하단 생각도 들지만, 저 애들한테는 지위를 유지하는 게 세상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중요시 여기는 가치가 다르니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아마 미엔과 로운, 저 두 친구도 날 보며 똑같이 생각할 것이다.
본토 귀족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않는 불량한 동기라고.
관점을 바꾸면 결국 모든 게 진실이 돼버린다.
“근데 민 교수님하고 단장님, 무슨 관계일까.”
이리엘데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애인일지도 모르지.”
“정말로 그렇고 그런 관계라면 사교계가 들썩이겠네.”
“우리한테 대놓고 보여준 걸 보면 그냥 친한 친구일 수도 있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이어나가는 율과 이리엘데였다.
지난 몇 주간 같이 훈련을 받아오며 두 사람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아니, 이 둘뿐만 아니라 둔에 남은 동기들은 더할 나위 없이 가까워졌다.
파벌 얘기가 나오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던 시절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물론 이 평화는 단기적인 것이다.
동기란 결속력은 각자가 속한 가문 앞에서 금방 초라해지니까.
언젠가는 끝날 평화지만 끝이 찾아올 때까지는 부디 잘 지내길.
“뭔 생각 중이야?”
이리엘레가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 애들이 제발 사이좋게 지내길 신께 빌었어.”
“안 이루어질 기도네.”
“내 말이.”
왁자지껄 떠들던 중 브리테가 검지를 들어 입술에 가져다 댔다.
방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오신다.”
주변을 정리하고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렸다.
민 교수가 문틀을 살짝 움켜쥐며 말했다.
“내일 훈련은 없어요. 푹 쉬고 모레 훈련장에서 보죠. 그리고 가하란, 아줌마랑 얘기 좀 할까?”
눈을 깜빡이던 가하란이 밀레나를 바라봤다. 밀레나는 살짝 미소를 짓고 인사의 의미를 담아 고갯짓을 했다.
민 교수 옆으로 간 가하란이 동기들을 훑으며 말했다.
“나중에 또 와도 되나요?”
율이 양옆으로 쭉 뻗으며 대답했다.
“언제든지 와. 체스 말고도 놀거리 많으니까.”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가하란이었다. 민 교수와 가하란이 방을 떠났다.
“우리도 그만 일어나자. 오늘은 술보단 침대가 더 그립네.”
“막상 체력이 남아도 술 생각이 안 나. 모레 있을 훈련 때문이겠지?”
“그렇겠지.”
이리엘데와 브리테가 잡담을 나누며 방을 나갔다. 로운과 율이 라운지에서 가볍게 뭐 좀 먹자며 일어섰다.
“밀레나, 너도 갈래?”
“아니. 난 괜찮아.”
로운과 율도 떠났다.
밀레나는 체스보드를 내려다보는 미엔에게 걸어갔다.
“야.”
“왜?”
“다른 건 다 괜찮은데, 그 애 이용할 생각은 하지 마. 지금처럼 잘 놀아주기만 해.”
“이용한다는 게 정확히 어떤 건데?”
“지금 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
미엔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경고를 받았으니 접어야겠네.”
“공격적인 말투라서 미안해. 네가 허튼짓하지 않을 거란 거 알아.”
“알면서 왜?”
“네 본심은 그럴지 몰라도, 위에 계신 어른들 생각은 다를 테니까. 넌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위치잖아?”
웃음기 가신 얼굴로 가만히 천장을 보는 미엔이었다.
“뒤에 특무대령님이 버티고 있는 애야. 내가 뭘 어쩌겠어.”
“그럼에도 넌 필요하다면 해낼 테니까. 그게 무엇이 됐든.”
“날 그렇게 고평가해 줄 줄이야. 기뻐서 눈물이 나오려 하네.”
메말랐던 얼굴에 다시 미소가 깃들었다. 미엔이 일어섰다.
“그거 알아?”
“뭘?”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거 너밖에 없다는걸. 보통은 예의 차리느라 말 안 하잖아.”
“동기니까. 그리고 엔첸세는 원래 이런 성향이잖아.”
“그래,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이다.”
미엔이 머리를 긁적이며 문으로 걸어갔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내 편이 돼달라고 하면 들어줄 거야?”
“아니. 난 휘둘리는 거 싫어.”
“매정하네.”
“그렇지만… 도움은 줄 수 있어. 가문의 사정이나 권위 같은 게 아닌, 그냥 친구로서 말이야.”
문고리를 잡은 미엔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술 한잔할래?”
대답하기 직전에 미엔이 다시 말했다.
“아니다. 넌 너무 어리다.”
“나이 언급은….”
“그냥 해본 소리야. 친구니까.”
미엔이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았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작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나 자신이 마냥 좋은 건 아니야. 본토 귀족이고 뭐고 가끔은 다 놓아버리고 그냥 살고 싶기도 해. 근데 내 욕심이 모든 걸 포기하기엔 너무 커.”
딸깍, 문이 닫혔다.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가 좁은 문틈 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러니까 내가 도를 넘는 거 같으면 네가 막아줘. 팔이라도 하나 자르면 정신이 번쩍 들지 않을까? 그걸 핑계 삼아 도망칠 수도 있고. 그래, 그거 좋겠네.”
* * *
“여기 앉아.”
가하란은 두리번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와 책상, 그리고 옷장으로 보이는 가구. 그게 전부였다.
“아줌마가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거든. 그래서 그런지 집에 물건을 들여놓는 게 불편해.”
코코아 마실래, 라고 물으며 화구로 걸어가는 민 교수였다.
의자에 앉아 잠자코 기다렸다. 민 교수가 김이 올라오는 잔을 내밀었다.
“궁금한 게 많을 텐데 아무것도 안 묻네.”
“뭘 물어봐야 할지 몰라서요. 이럴 땐 기다리면 어른들이 답해 주시더라고요.”
민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 맞은편에 앉았다.
“너희 아버지를 만나고 오는 길이야.”
“아빠를요?”
“어. 가서 확답을 받고 왔어.”
가하란은 민 교수의 입을 바라봤다.
“나한테 이것저것 배우게 될 거야.”
“제가요?”
“그래, 너.”
민 교수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네 눈은 아주 특별해.”
특별하다는 말에 살며시 눈가를 만졌다.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다른 어른들은 이런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눈이 특별하다니?
“정확한 건 좀 더 알아봐야 해.”
“좋은 건가요?”
“그것 역시 아직은 몰라. 지금 알 수 있는 건 네 눈이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는 거야.”
다르다.
입 안이 깔깔해지는 어감이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 나를 비롯해 여러 사람이 널 도와줄 거야.”
도움이 필요한 일이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에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반응일까?
가하란은 다시금 눈가를 매만질 때였다.
“멋있는 거야.”
“네?”
“그 눈, 정말 멋있는 거라고.”
민 교수가 눈웃음 지었다.
멋지다.
걱정을 단숨에 밀어내는 말이었다. 가하란은 배시시 웃었다.
“저 멋있는 거 좋아해요.”
“그래. 아줌마가 그 눈의 멋진 쓰임새를 찾아줄게. 그러니까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할 필요 없어.”
그때였다.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민 교수가 잠깐만, 하면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밖에 있는 사람과 몇 마디 나누던 민 교수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칼리고 그 인간 정말….”
“아저씨가 왜요?”
“음, 그러니까… 그 아저씨가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겨서 둔을 떠났다고 하네.”
“정말요? 저 인사도 못 했는데.”
“내 말이. 정말 얄미운 인간이야. 눈앞에 재미난 사건이 터지면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리는 못된 인간이지.”
민 교수가 손을 내밀었다.
“오늘은 일단 돌아가자. 집에 데려다줄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