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146화 (119/558)

제146화

“민 크알데 교수님, 맞으시죠?”

악수 직전에 올란트가 한 말이었다.

“절 알고 계셨네요.”

“제철소 선배들이 민 교수님 얘기를 많이 해줬습니다. 정비고에서 몇 번 얼굴도 뵀고요. 정식으로 인사드린 적은 없어서 기억 못 하실 겁니다.”

“그렇군요.”

칼리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창고와 창고 사이. 인기척은 없었다.

“통성명도 끝냈으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죠.”

칼리고는 민 교수와 눈빛을 교환한 후 가하란에 대한 것을 말했다.

이야기를 들은 올란트가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밖에서 이야기하자고 했을 때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앉아서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가볍거나, 지금처럼 다른 사람이 들어선 안 될 얘기거나.”

“지금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저희 셋뿐입니다.”

칼리고는 올란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났는지, 올란트가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 보시기에 제 아들이 지닌 능력은 어느 정도로 위험한 겁니까.”

그 질문에 답한 건 민 교수였다.

“황제와 의회, 그 외의 마나와 관련된 모든 곳이 탐낼 재능이죠. 아니, 이걸 재능이라 불러야 할지 아직은 모호하네요.”

“알려지는 순간 이리저리 불려 다니겠군요.”

“그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에요. 최고 수준의 지원을 받을 수도 있어요.”

“동시에 제 아들의 인생은 사라지겠죠. 저는 그게 무얼 의미하는 건지 잘 알고 있습니다.”

올란트의 목소리는 처음 대면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온화했지만, 눈동자는 차갑게 변해 있었다.

“정치적 균형을 이룬 상태라면 아들의 안전은 어느 정도 보장될 겁니다. 하지만 현 제국은, 성도는 그렇지 못해요. …아니지. 균형을 이뤘다고 한들 새로운 힘이 나타나는 순간 우호 관계마저 틀어버리며 쟁취에 나설 겁니다.”

올란트가 칼리고, 그리고 민 교수를 차례대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것이 제국의 생리 아닙니까?”

칼리고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사실에 입각한 진실에 사견은 불필요했다.

“이제 두 분께서 절 찾아오신 이유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칼리고는 머뭇거림 없이 말했다.

“올란트, 아니지, 올란트 씨의 아들한테 체스를 졌어요. 내기 체스에서 졌으니 갚아야 할 게 생긴 거고, 난 그 애를 보호하는 거로 갚을 생각이에요.”

“고맙습니다.”

“근데 내 말을 믿어요? 거짓말일 수도 있는데.”

“제가 아는 칼리고 씨라면 여기서 진실만을 얘기할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던 거죠.”

“예나 지금이나 사람 몰아붙이는 언변은 여전해. 아무튼 난 그 애한테 나쁜 놈이 되긴 싫으니까 이 일은 함구할 겁니다.”

이제 민 교수가 남았다. 바닥을 보며 엄지를 살짝 물던 민 교수가 고개를 들었다.

“답하기에 앞서, 두 사람은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예요?”

“엄청 친했던 건 아니지만 알고는 지냈죠. 올란트 씨, 대화를 부드럽게 진행하려면 집안 내력을 설명해야 할 것 같은데.”

올란트가 옅게 웃었다.

“그럴 생각입니다. 애초에 칼리고 씨도 그걸 전제로 말씀하신 거잖아요?”

세나티아 가의 이름이 나왔다.

배경을 들은 민 교수가 얼굴을 찡그리며 작게 숨을 토해냈다.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아 힘이 빠지네요. 뒤에 총집사님이 계시면 그 아이는 안전할 거예요.”

올란트가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께선 아직 가하란을 택하지 않으셨어요. 여전히 지켜보고 계실 뿐이죠. 저 역시 세나티아 의원님의 힘을 빌릴 생각은 없고요.”

“그 말은 즉 이대로 함구할 생각이군요. 가하란에 대해서.”

“제 아들에게 선택권을 주고 싶습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만약 제가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한다면, 올란트 씨는 어쩔 생각이죠?”

민 교수가 진중한 어투로 물었다.

칼리고는 속으로 웃었다. 이 여자,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있다.

“그걸 막을 방법은 제게 없습니다. 민 교수님을 힘으로 저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정치적으로 압박할 수도 없으니까요. 그러니 저는 감정에 호소할 생각입니다. 부디, 그 아이에게 선택권을 주셨으면 합니다.”

“감정이라니. 그런 게 통용되는 세상인가요?”

한쪽 눈을 찌푸리는 민 교수였다.

칼리고는 손을 들어 민 교수와 올란트 사이를 휘휘 저었다.

“떠보는 건 여기까지 합시다. 민 교수도 보면 알겠지만, 아들 팔아서 출세를 꿈꿀 인간은 아닙니다.”

그 말에 민 교수가 표정을 풀었다.

“직접 봤고, 단장님도 보증했으니 믿겠어요. 나도 이번 건은 발설하지 않을게요.”

일단락된 것 같지만, 아직 올란트의 눈빛은 차가웠다.

그럴 것이다.

순수한 선의. 서글프게도 이 뜨뜻한 문장을 순진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다.

칼리고 역시 민 교수의 심리가 궁금했다.

민 교수는 향상심의 화신 같은 존재였다. 밑을 내려다보며 안도하는 법이 없고, 항상 위를 올려다보며 도전했다.

단련과 일에 미쳐 있다는 표현이 아주 잘 어울리는 여자. 올라갈 여지가 있다면, 그것이 지위든 자신의 능력 계발이든 간에 모든 수를 동원해 천장으로 손을 뻗었다.

더 높은 곳으로.

항상, 그렇게.

“일단 아이가 마음에 들어요. 전 살갑게 구는 애가 좋거든요. 우는 애는 질색이지만, 울음을 이겨내는 애는 반기죠.”

민 교수가 입을 열었다. 지금 내뱉는 말들은 가감 없는 속마음일 것이다.

“성격만큼이나 그 아이가 지닌 능력에도 관심이 있고요.”

“그 말씀은….”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을게요. 대신, 그 애를 저한테 빌려줘요. 올란트 씨가 걱정하는 위험한 실험 같은 건 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 능력을 계발하고 향상시키기 위한 훈련을 제가 맡을게요.”

그럼 그렇지. 이 여자가 쉽게 포기할 리가 없다.

칼리고는 빙긋 웃으며 올란트를 바라보았다.

“올란트 씨. 승냥이한테 고기를 맡기는 것보단 이쪽이 안전할 겁니다. 이쪽은 사자지만 아무거나 먹진 않아요.”

올란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선택지는 없는 것 같군요. 제 아들놈이 잘 따를지를 모르겠지만 교수님께 맡기겠습니다.”

“우려하는 일은 안 생기도록 할게요. 당분간은 지켜만 볼 거고.”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희 말고도 이 일을 알아야 할 분이 계십니다.”

칼리고는 손목을 가볍게 꺾으며 말했다.

“특무대령이라면 내가 찾아가 보죠. 가하란의 시간을 빼앗지 않는 선이라면, 그분도 문제 삼지 않을 겁니다. 애초에 인간 쪽 이해관계에 관심이 없으시니.”

대충 마무리 지어졌다.

칼리고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그만 일들 보러 가시죠.”

* * *

“무슨 일이었어?”

덴스는 올란트에게 넌지 물었다.

감찰단장과 민 교수. 방문한 손님들의 면면이 심상치가 않았다.

뭔가 문제가 생긴 걸까?

“가하란 일로 상담을 좀 했어요.”

“가하란? 왜?”

“제 아들놈이 워낙 똑똑하잖아요. 그래서 교수님이 따로 가르쳐 보겠다고 말씀하셨어요.”

머쓱하게 웃는 올란트였다.

진실과 거짓이 미묘하게 섞여 있는 기분이었다. 말하기 껄끄러운 일일 수도 있었다.

“안 좋은 일은 아니지?”

“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러면 됐어. 민 교수, 다른 건 몰라도 실력은 확실해. 민 교수가 지도해 준다면 가하란한테도 도움이 될 거야.”

올란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자식과 부모가 동시에 인정받고, 기분 좋겠어?”

“선배 덕이죠.”

내 덕. 덴스는 껄끄러운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 웃음을 머금었다.

두 시간 전 식사 자리가 떠오른다.

멧시언 소장의 부름을 받고 간 자리였다. 연구원들은 1층, 덴스와 올란트는 소장과 함께 2층 방.

연구 성과를 전해 들은 소장은 만족한 얼굴로 올란트를 바라봤다.

좀처럼 보기 힘든 눈빛이었다.

덴스는 몇 년이나 소장을 모셨지만, 그런 눈빛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질투심을 느끼는 나 자신이 못마땅했다. 성과를 냈으면 합당한 대우를 받는 건 당연한 건데, 선배란 놈이 쩨쩨하게 굴기나 하고.

차라리 올란트가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천재였다면 되레 속이 편했을 것이다.

범재의 한계를 명확히 깨닫고 경건한 마음으로 올란트의 뒤를 밀어줬을 테니까.

하지만 올란트는 딱 두 걸음 앞서있었다.

조금만 잘했다면, 발상은 약간만 비틀었다면 올란트가 낸 결과물은 내 것이 됐을 텐데.

“비일은 언제쯤 온다고 했지?”

“곧 올 거예요.”

“그래? 그러면 세팅해 놔야겠네.”

“제가 나가서 해놓을게요.”

일어서서 휴게실을 벗어나는 올란트였다. 덴스는 문틀을 반쯤 넘어간 후배에게 말했다.

“3중첩 마력선 변화를 성공시킨 거 축하해. 아까 봐서 알겠지만, 소장님께서도 만족해하시더라.”

“제가 축하받을 일은 아니죠. 선배가 길을 닦아놓은 덕에 가능했던 거니까요.”

“아부는. 아무튼 크게 한 걸음 내디뎠다. 이번 연구 논문은 실험기 적용을 끝내고 내년쯤에 네 이름으로 내자. 길드와 클랜 쪽에서도 반응이 상당할 거야.”

“1저자는 선배 이름 하죠. 전 뒤로 빼도 상관없어요.”

“네가 다듬은 건데 어떻게 그래.”

“위대한 발상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해요. 이번 연구는 온전히 선배 것이에요. 전 그저 도왔을 뿐이고요.”

천천히 나오라며 문을 닫고 나가는 올란트였다.

덴스는 열심히 짓고 있던 미소를 단숨에 풀었다. 살짝 축축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덴스야, 너무나도 추잡하구나.

논문을 언급했을 때 올란트는 알아차렸을 것이다.

선배를 위하는 저 마음, 얼마나 갸륵한가.

그렇기에.

초라한 나 자신이 더욱 싫어진다.

질투라는 벌레가 가슴 깊숙한 곳까지 파고든 느낌이었다. 도저히 손쓸 수 없을 정도로 깊게, 깊게.

“정신 차리자. 못난 꼴 보이지 말고.”

산을 하나 넘었지만, 아직 산맥 초입이었다.

완벽한 소형화에 도달하려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직도 많았다.

사소한 감정에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란 뜻이다.

뺨을 툭툭 치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숨을 깊게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게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서 힘차게 말했다.

“자, 오늘도 힘내보자.”

다행히 떨떠름한 속마음은 목소리에 담겨 있지 않았다.

* * *

“그렇게 해.”

쉽게 허락할 줄은 알았으나, 이 정도로 쉬울지는 몰랐다.

칼리고는 브라인을 보며 말했다.

“나중에 딴소리하면 안 돼요.”

“심부름할 시간만 뺏지 않으면 돼. 그리고 눈에 관한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니까 놀랄 것도 없고.”

“알고 계셨어요?”

“거의 다 뜨인 눈이야. 완벽하게 뜨일지, 아니면 이 수준에서 멈출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무슨 뜻이죠?”

“안원에 드나들었어. 이건 그 꼬마가 말 안 해줬나 보네.”

안원. 정령세계.

칼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령사들과 몇 마디 나눈 적이 있어서 ‘눈이 뜨인다’는 개념은 알고 있다.

하지만 정령사들이 말하는 ‘눈’은 마나와 관련이 없을 텐데.

“조금 독특한 눈이야. 위대한 것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니까. 나도 정확히는 몰라. 그래서 내 옆에 두는 거고. 관찰하는 맛이 있거든.”

“흥미롭네요. 저도 시간이 남으면 좀 더 알아보고 싶지만, 이제 슬슬 떠나야 해서요.”

칼리고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드디어 가네.”

“네, 드디어 갑니다. 건강 잘 챙기시고요, 나중에 또 찾아올게요.”

“오지 마. 다음번엔 아예 문을 막아버릴 거니까.”

“열어주실 거면서.”

몸을 돌려 기록보관서를 나가려는데, 뒤쪽에서 종이 한 장이 날아들었다.

팔랑거리던 종이가 손바닥 위에 떨어졌다.

“이게 뭔가요?”

“버리는 종이. 가는 길에 버려.”

빈 종이가 아니었다.

종이에는 실더령에 관한 정보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실더령? 신문에서 얼핏 본 적이 있었다. 앙케령과 영역 분쟁이었지?

흔한 일이라 기억 저편으로 날려버린 정보였다.

“선물 잘 받아 갑니다.”

“그냥 버리는 거라니까.”

“네, 할멈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종이를 머리 위로 흔들며 걸어 나갔다. 종이에 담긴 정보가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쓸모가 있을 것이다.

밖으로 나왔다.

접수대에 있는 셀베이아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전 즐거운 휴가를 떠납니다. 잘 지내세요.”

“네. 오랫동안 즐기시고 다시는 돌아오지 마세요.”

“예, 반드시 돌아올게요.”

칼리고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가하란한테는 잘 놀고 있으라고 전해주세요.”

“직접 전하시죠. 그냥 가면 섭섭해할 텐데.”

대답 대신 미소 짓고 손을 흔들었다.

여흥도 좋지만, 이제 바삐 움직여야 할 때가 왔다. 정했으면 바로 실행에 옮겨야 하고.

“아프지 말라고도 전해줘요!”

칼리고는 웃음을 거두며 돌아섰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