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5화
“그 둘은 별개의 것이 아니죠. 제 이름이 칼리고고 직함이 특수감찰단 단장이니.”
“당신이야 그렇게 생각하죠. 하지만 주변인들은 어떻게 여길까요?”
“반박하려면 할 수 있지만 길어질 것 같으니 일단은 접어두죠.”
칼리고는 민 교수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쩌자는 겁니까?”
“확실한 사람한테 먼저 가봐야겠어요.”
“확실한 사람?”
“혈육. 이것도 확실한 건 아니지만, 현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믿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스쳐 지나가는 민 교수를 칼리고가 붙들었다.
“근데 이걸 어쩌죠. 교수님이 절 못 믿는 것처럼, 저도 교수님을 신용하기 어려운데.”
민 크알데.
예전이야 잘 알고 있었다지만, 지금 이 사람이 어디에 발을 걸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조사하기 까다로운 인간이라 알아보는 것도 쉽지 않고.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르는 단장님보다야, 매월 업무 보고 올리는 제가 덜 의심스럽지 않나요?”
“일은 일이고, 정치는 정치죠.”
“내가 저 아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을 거란 확증이 필요한가요?”
“보여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칼리고가 빙긋 웃으며 말할 때였다. 민 교수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예나 지금이나 거침없는 건 여전했다.
“잔소리 말고 따라오기나 해요. 올란트 씨와 독대하게 해준다면 좋겠지만.”
“그럴 순 없죠. 근데 뭐 단거 먹었어요?”
“하나 줘요?”
민 교수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커피 맛 사탕. 칼리고는 씁쓸한 얼굴로 사탕을 입에 넣었다.
“잊고 있었는데 지금 막 생각났어요. 민 교수님 때문에 안 좋은 식습관이 하나 생겼다는 걸.”
“난 커피에 설탕을 한 스푼만 넣어요. 누구처럼 미친 듯이 넣지 않고.”
“커피 얘긴 꺼내지도 않았는데.”
민 교수가 턱짓했다.
“올 거면 빨리 와요. 랩 문 닫기 전에.”
“에스코트라도 할까요?”
“허약한 사람한테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요.”
“상대적인 겁니다. 민 교수님이나 절 허약하다고 하지, 다른 사람들은 안 그래요.”
“다른 사람이 중요한가.”
민 교수가 등을 돌리며 말했다. 칼리고는 허탈한 웃음을 내며 뒤를 따라갔다.
“은근슬쩍 또 말 놓네.”
“속 좁은 건 여전해.”
“나만큼 넓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오가던 대화가 한순간 끊겼다.
누군가는 침묵을 금이라고 하지만, 칼리고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욕망의 정수인 말을 밖으로 내뱉지 않고 안으로 삼키다니, 이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안쓰러운 일인가.
대화에 공백을 두는 건 죽은 뒤에나 생각해볼 일이었다.
분명 그런 신념으로 살아오고 있는데…….
하.
칼리고는 헛헛한 웃음을 아주 작게 흘려 내보냈다. 침묵의 빗장을 치워낼 수 없었다. 부끄럽게도 대화의 단절을 택했다.
10여 분간 아무런 말 없이 나란히 서서 걸었다. 훈련장을 벗어나, 연구단지로 가는 길목에 올랐을 때도 변화는 없었다.
“그러다 인중이 턱에 닿겠네요. 삐진 애처럼 입 내밀고 있으면 재미있어요?”
툭 던져진 말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칼리고는 인중을 문지르며 대꾸했다.
“누가 삐졌다고 그럽니까.”
“12분 41초. 당신이 입 다물고 있던 시간이에요.”
“정확히는 13분 3초죠.”
“그걸 또 재고 있었어요?”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죠.”
뒤쪽에서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일 위를 수레가 미끄러져 지나갔다.
멀어져 가는 수레를 바라보며 민 교수가 물었다.
“당신이 둔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죠?”
“한 달이 좀 넘었죠.”
“날 언제 찾아올 생각이었어요?”
“지금 왔잖아요.”
“떠나기 직전에 눈인사만 하고 가시겠다?”
“우리 사이에 그 이상 필요합니까. 그거면 됐지.”
민 교수는 코를 찡긋거리며 미소 지었다.
“얼굴만 삭았지, 속은 점점 더 어려지는 것 같네요. 예전에는 그래도 용기라는 게 있었는데.”
“지금도 많습니다. 그 용기라는 거. 단지… 만나서 뭔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미뤘을 뿐이죠.”
민 교수가 빤히 쳐다본다. 주름이 짙어진 눈가는, 예전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왜 그렇게 봐요?”
“솔직하게 대답할 줄은 몰랐거든요.”
“내가 언제 뭐 거짓말했었나. 교수님 앞에서는 언제나 정직했어요.”
“바로 거짓말하는 걸 보면 내가 아는 그 칼리고가 맞네요. 됐으니까 얼른 오기나 해요. 남자가 그렇게 비실비실해서 어떡해요?”
“내 보폭은 표준에서 벗어나질 않아요. 그쪽이 워낙 넓고 빠른 거지.”
앞으로 쑥쑥 치고 나가는 민 교수를 따라 열심히 발을 움직였다. 신체술을 쓰는 것 같지도 않은데, 걸음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분풀이하는 건가.
겨우겨우 뒤를 쫓아갔다.
“여기 맞죠?”
민 교수가 연구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칼리고는 숨을 잠깐 고른 뒤 말했다.
“여기 맞아요. 근데 가하란 부친에 관한 건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최연소 치프를 덴스 교수가 영입했어요. 당연히 소문이 돌죠. 개인적으로 알아보기도 했고.”
연구실 문을 열기 직전이었다.
2미터 정도 간격을 두고 건설된 옆 연구실에서 사람이 나왔다.
아는 얼굴이었다.
칼리고는 손을 들어 벨솔에게 인사했다. 벨솔이 귀에 얹은 펜을 손에 들며 다가왔다.
“두 사람이 여긴 어쩐 일로?”
말을 편하게 하는 걸 보면 민 교수와도 친분이 있는 것 같다.
민 교수가 턱짓으로 연구실 문을 가리켰다.
“이쪽에 볼일이 있어서.”
“그 랩 사람들이라면 지금 없을걸?”
“어디 갔는지 알아?”
“글쎄. 옆 동을 쓰고 있지만 교류가 많은 건 아니라. 20분 전쯤에 이쪽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는 걸 봤을 뿐이야.”
벨솔이 연구실 문을 쿵쿵 두드린 다음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철커덕거리는 소리만 날 뿐 문이 열리지는 않았다.
“봤지?”
민 교수가 눈을 살짝 찡그렸다.
“퇴근한 건가?”
“그건 아닐걸. 이쪽 라인에서 여기만큼 오랫동안 불 켜놓는 곳도 없거든.”
길이 엇갈린 건가.
다음 행선지를 고심하던 칼리고의 눈에 뛰어오는 남자가 걸려들었다.
군청색 재킷에 연구원들이 애용하는 신발. 앞에 선 남자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저희 연구실에 무슨 문제라도….”
민 교수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 이곳에 있는 치프를 만나러 왔어요.”
“치프님이라면 곧 돌아오실 겁니다. 소장님과 식사 중이거든요.”
연구원이 문을 열었다. 따라 들어가려 하자 연구원이 저지했다.
“죄송합니다. 책임자가 없을 때는 이 안에 손님을 들일 수가 없어요.”
보안과 관련된 일이니 무시할 수도 없었다. 칼리고는 벨솔을 바라보았다.
“교수님. 차 한잔 얻어 마실 수 있을까요?”
“차? 난 단장하고 차 마시고 싶지 않은데. 민 교수라면 모를까.”
“얹혀 가는 느낌으로 저도 끼워주시죠. 얌전히 있을 테니.”
“그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칼리고는 입술을 바짝 오므린 다음 벨솔을 바라봤다.
“단장님이 입 열면 내가 쫓아낼게.”
“민 교수가 그렇다면야. 따라와. 좋은 차는 없지만.”
걸음을 떼던 벨솔이 멈칫하며 이쪽을 바라본다.
“근데 두 사람 꽤 친해 보이네?”
여느 때 같았으면 주저함 없이 먼저 입을 열었겠지만, 지금은 민한테 대답을 맡기기로 했다.
민 교수가 말했다.
“어쩌다 보니.”
심심한 대답이었고, 벨솔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벨솔 교수를 따라 옆 연구실로 들어갔다. 창고 형태의 연구실 안에는 길쭉한 관들이 바닥에 잔뜩 깔려 있었다.
“개발은 어때?”
민 교수가 물었다. 벨솔은 어깨를 으쓱였다.
“연구비 삭감당하지 않을 정도? 액상 근육의 최소 유지량을 계속 줄여보는 중인데, 쉽지가 않네.”
휴게실 문을 열며 손짓하는 벨솔이었다. 칼리고는 안으로 들어가 문 가까이 있는 의자에 앉았다.
“주문은 받지 않을 거야. 주는 대로 마셔.”
휴게실 내부를 둘러보며 잠시 기다렸다. 민 교수와 벨솔은 가까이 붙어 무언가 얘기 중인데, 잘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귀가 간지럽네.
“자.”
벨솔이 찻잔을 내밀었다. 웃으면서 잔을 받았다.
“저번에는 딱딱한 면담이라 동생 근황도 못 물었네. 내 동생 잘 지내고 있지?”
칼리고는 맞물린 입술을 가리킨 다음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벨솔이 헛웃음을 짓는다.
“내가 이래서 무슨 말을 못 한다니까. 입 열어도 되니까 질문이나 답해줘.”
“허락받기 전에 입을 열면 쫓아낼 거라는 말을 들어서요. 어쩔 수 없이 입 닫고 있었죠.”
“되게 유치한 거 알지?”
“그런가요?”
칼리고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벨루나’ 씨라면 잘 있습니다. 케아의 붙박이로 여전히 음침한 연구를 진행 중이죠.”
“내 동생이 그렇게까지 음침하지는 않아. 단지, 몰두를 잘할 뿐이지.”
벨솔이 민 교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누굴 찾아왔는지는 들었고, 왜 찾아왔는지 물어도 되나?”
“미안해. 지금은 답해줄 수가 없네.”
“민 교수와 단장이라. 보통 일은 아닌 거 같은데.”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야. 그리고 이분하고는 어쩌다가 같이 오게 된 거고.”
이분이라 말하며 힐긋 쳐다보는 민 교수였다. 칼리고는 모른 척하며 차를 홀짝였다.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한 거면 말해. 민 교수한테는 빚진 게 있으니까.”
“실험 몇 번 도와준 것뿐이야. 그걸 빚이라 여길 생각도 없고.”
“훌륭한 자원을 이용했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그게 옳은 계산법이고. 그렇지 않아, 단장?”
칼리고는 그렇죠, 라고 대답했다.
벨솔은 연구단지 내에서도 독특한 교수였다. 덴스가 멧시언 쪽 라인을 탄 것처럼, 다른 교수들도 제철소장이나 관리국장 쪽에 연줄을 대는 게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벨솔은 정치에는 관심 없다는 듯이 홀로서기 중이었다. 그래서 연구비가 빠듯한 거고.
“민 교수. 그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기?”
“훼손되지 않은 마수 사체가 성도로 옮겨졌다고 해. 어디로 간 건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황제 쪽 싱크탱크인 거 같아.”
“마수 사체라.”
칼리고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벨솔을 바라보았다. 물론 이미 알고 있는 정보지만.
“마수 사체라면 종종 옮겨지잖아.”
“그렇긴 하지만, 이번 건은 좀 찝찝해. 심도 3인 마수가 마을 주변에 나타났어. 미개척지와 꽤 떨어진 곳에 말이야.”
“드물긴 해도 자연 발생하긴 하니까.”
“네 마리. 내가 최근 들은 것만 해도 네 마리야.”
칼리고는 차를 마시며 눈을 찌푸렸다. 이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네 마리라.
“출현 빈도가 이상하긴 하네.”
“민간에 큰 피해가 있진 않아서 잘 수습된 거 같은데, 그래도 신경은 쓰여.”
“정보의 출처가 어디야?”
“내가 아는 사람들이라고 해둘게. 알다시피 마수에 관한 건 떠벌리고 다닐 수 없으니까.”
벨솔이 민 교수를 응시했다.
“그래서 말인데, 민 교수는 뭐 들은 거 없어?”
“나한테 토벌 요청이 들어온 적은 없어.”
“그래? 자잘한 게 계속 출몰하는 걸 보면 뭔가 있는 거 같은데. 잔뿌리일까?”
“그 학설은 입증되지 않았어. 잔뿌리에 노출되면 형태 변화가 온다, 이건 믿을 만한 게 못 돼.”
“하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지.”
칼리고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잔뿌리라면 폐하께서 눈을 뒤집고 찾아다니겠네요. 의회도 마찬가지고.”
“그렇겠지. 현시점에서 마나응축로를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바깥을 바라보던 벨솔이 손가락을 튕겼다.
“저기, 옆방 친구들 왔네.”
칼리고는 뒤를 돌아봤다. 연구실 문밖으로 올란트와 덴스의 모습이 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