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144화 (117/558)

제144화

“그때구나, 너하고 율이 수업에 늦은 날. 특무대령과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동안 입 닫고 있었다?”

이리엘데의 손가락이 눈앞을 오갔다. 밀레나는 이리엘데의 검지를 옆으로 치우며 대답했다.

“너한테 보고할 의무는 없으니까.”

“보고가 아니라 그냥 얘기. 동기끼리 그 정도는 알고 있어도 되잖아.”

“정신이 없었어. 그날 이후로 말할 틈도 없었고. 알잖아? 우리가 지난 몇 주간 뭘 했는지.”

“…그래. 말할 기운도 없었겠지. 우리 모두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방으로 흩어져서 기절했으니까. 하루도 빠짐없이.”

이리엘데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매만진 다음 가하란 앞에 섰다.

“안녕.”

“안녕하세요.”

“몇 살이야?”

“일곱 살이요.”

“밀레나를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나네. 너처럼 귀엽지는 않았지만.”

쓸데없는 소리를, 밀레나는 이리엘데를 팔꿈치로 툭 쳤다.

“가하란이라고 했지? 여긴 왜 온 거야?”

“누나 보려고요.”

“누나? 어떤 누나? 율? 밀레나?”

“밀레나 누나요. 아, 율 누나도 보고 싶었어요.”

이름이 나오자 싱긋 웃으며 좋아하는 율이었다.

“말하는 거 보면 사적으로도 아는 사이인 거 같은데.”

미엔이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특무대령님께 부탁받기 전에도 아는 사이였어.”

“언제부터 알고 지낸 거야?”

밀레나는 입을 다물며 미엔을 쏘아봤다. 미엔이 소리 낮춰 혀를 찼다.

“그래, 내가 알 바는 아니지.”

“알면 됐어.”

냉담한 눈빛을 하던 미엔이 가하란 앞으로 걸어갔다. 허리를 숙이며 눈높이를 맞추는데,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한 웃음을 짓고 있다.

“난 미엔이야.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도 돼.”

“그래도 되나요?”

“그럼. 앞으로 자주 놀러 와도 돼. 무슨 일 있으면 이 형이 해결해줄 테니까.”

속내가 훤히 보이는 말이라 오히려 밉지 않았다.

특무대령이 곁에 두고, 감찰단장과 같이 다니는 아이. 미엔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살갑게 굴 것이다.

로운과 브리테도 가하란과 인사를 나눴다.

적당히 거리를 두는 다른 동기들과 달리 브리테는 가하란을 번쩍 들어 올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g-4, 그쪽 골목에 빵집이 하나 있었는데. 노부부 두 분이 빵을 파셨지. 아직도 있나?”

“거기라면 얼마 전에 닫았어요.”

“그래? 어쩌다가.”

“가게 그만두시고 여행 가셨다고 해요.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지만.”

“하하, 그거 잘됐네.”

“형은 그 빵집을 어떻게 알아요?”

“나? 너처럼 여기서 태어났으니까. 난 옆에 있는 이 친구들처럼 으리으리한 집이 있는 게 아니거든. 골목이 내 집이었지.”

같은 시민이라 더욱 반가운 모양이었다.

브리테와 가하란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미엔의 표정이 심드렁해졌다.

동기들 기 싸움에 가하란이 휘말릴 것 같았다. 밀레나는 브리테에게 눈짓을 보냈다.

브리테가 피식 웃더니 가하란을 내려놓았다.

“가하란, 정말 날 보려고 여기 온 거야?”

가하란의 엉클어진 머리카락을 툭툭 치면서 질문했다.

“응. 누나 만나러 왔어.”

“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냥 보고 싶어서. 누나랑 놀고 싶기도 하고.”

가하란 뒤쪽에 있는 이리엘데가 풋 웃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이다.

“야, 너랑 놀고 싶다는데?”

“내가 워낙 잘 놀아 주잖아. 너처럼 재미없지도 않고.”

이리엘데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말 그것뿐이야?”

밀레나는 가하란의 눈을 보며 물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감찰단장과 같이 나타났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그러면 안 돼? 보고 싶어서 오면 안 되는 거야?”

둥글게 휘었던 눈매가 금세 시무룩해졌다. 밀레나는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말 한마디에 다시 얼굴이 폈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애인데.

밀레나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칼리고를 흘깃 보며 물었다.

“너, 저 아저씨가 어떤 분인지 알고 있어?”

“알아. 특수감찰단 단장. 근데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는 아직도 헷갈려. 나쁜 사람도 잡고, 좋은 사람도 잡고.”

“복잡한 직업이긴 해. 근데 저분하고는 어떻게 아는 사이가 된 거야?”

올란트를 통해 알게 된 걸까? 비밀이 많은 그 사람이라면 감찰단장하고도 친분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총집사?

그것도 아니면 브라인 특무대령이 소개해준 걸까?

하나하나 되짚다 보니 가하란 주변에 거물들이 너무 많았다. 감찰단장과 알고 지내는 게 당연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누나랑 여관에서 처음 보고 저번에 식당에서 또 만났어. 요정의 안뜰에서.”

“안뜰에서?”

가하란이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줬다. 손짓, 발짓 섞어가며 말하는데 꽤 신이 나 보였다.

“돌고 돌아 체스구나.”

밀레나는 약간의 기대감을 품고 물었다.

“나랑 단장님, 둘 중 누가 더 잘 두는 거 같아?”

“누나. 누나가 조금 더 까다로워.”

“그래?”

인간 심리를 꿰고 온갖 계책으로 성과를 올리는 단장보다 내가 체스를 잘 둔다라. 입가에 미소가 내려앉았다.

“얘한테 체스를 졌다고?”

“봐준 거지?”

“정말이야?”

동기들이 떼로 달려들어 질문했다.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인 건 이리엘데였다.

“말도 안 돼! 네가 졌다고? 나한테 몇 번이나 이긴 네가, 이 꼬마한테?”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처음에는 몇 번 이기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단 한 번도 승기를 잡은 적이 없어.”

사흘 만에 간파당하고, 한 주가 지나자 따라잡기 힘들 정도가 됐다.

근 한 달이 지난 지금 가하란의 체스 실력은 어느 정도가 됐을까?

“너! 오늘 바쁜 일 있어? 어디 갈거야?”

이리엘데가 가하란의 어깨를 붙잡았다.

“네, 네?”

“없지? 없으면 나랑 게임 한 판 하자.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정말 딱 한 판이면 돼.”

“저기, 저는….”

“싫어? 안 돼. 싫어도 어쩔 수 없어. 내가 널 이기면 자연스럽게 밀레나한테도 이기게 되는 거니까, 그러면….”

눈을 희번덕이는 이리엘데였다.

“애 겁먹어.”

밀레나는 이리엘데의 팔을 잡아당겼다. 다른 일들은 도도하게 웃어넘기면서 체스만큼은 광기 어린 집착을 보인다.

뭐, 나도 처음에 가하란한테 졌을 때 저런 식으로 붙들고 늘어졌지만.

취미라는 게 은근히 자존심을 건드린다.

가하란이 쪼르르 다가와 밀레나 뒤에 숨었다.

“가하란. 숨으려면 내 뒤로 피해야지. 밀레나랑 너랑은 키가 고만고만해서 잘 가려지지도 않아.”

율이 킥킥 웃으며 말했다.

한 대 쥐어박고 싶지만 일단 참았다.

“다들 자의식이 강해서 좀 불편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쁜 애들은 아니야.”

뒤에 있는 가하란에게 말했다. 가하란은 이리엘데를 힐긋 본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 계속 바쁜 거야?”

“아마도. 훈련이 금방 끝날 것 같지는 않아.”

“그러면 앞으로도 놀 수 없겠네?”

“그러게.”

브라인에게 가하란을 보호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훈련 일정이 빡빡해서 시간을 내기 힘들었다.

여력이 있었다면 찾아갔을 것이다. 소식을 전달하는 작은 새, ‘잭’이 날아왔어도 달려갔을 거고.

하지만 새가 날아온 적은 없었고, 훈련이 끝나고 나면 한 걸음 떼는 게 곤욕스러울 정도로 체력이 바닥났다.

남을 돌보기는커녕 자기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들 상황.

“군부 안에서 혼자 다니는 건 아니지?”

“셀베이아 누나랑 같이 다녀서 괜찮아.”

“그나마 다행이네.”

밀레나는 고개를 살짝 틀었다.

“네가 선물해준 거 잘 쓰고 있어.”

스카프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젠 머리끈 대신 이걸 쓰는 게 편할 정도였다.

“난….”

가하란이 자신의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누나가 준 신발은 못 신겠어.”

“왜?”

“아까워. 연극 보러 갔을 때 한 번 신고는 한 번도 안 신었어.”

“그러지 말고 신고 다녀. 아까워하지 말고.”

“나중에, 나중에 이거 밑창 떨어지면 그때 신을게.”

밑창이 떨어질 때까지 신발을 신는다는 말에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럴 필요가 있냐고.

하지만 여건이, 삶의 형식이 다르다는 걸 금방 떠올렸다. 격 없이 지내서 잠시 잊고 있었다.

“그래. 너 편한 대로 해. 선물 받은 사람 마음이니까.”

“나중에 신게 되면 누나한테 꼭 보여줄게.”

가하란이 폴짝 뛰며 말할 때였다.

동기들이 동시에 몸을 돌렸다. 민 교수와 감찰단장이 다가오고 있었다.

둘의 대화가 끝난 모양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컨디션 관리 잘하고 내일 봐요.”

꿀처럼 달콤한 말이었다. 이렇게 일찍 훈련이 끝나다니.

하지만 기쁨도 잠시, 슬며시 걱정이 들었다.

왜 일찍 끝낸 걸까? 이유야 뻔히 보인다. 민 교수가 가하란을 응시하고 있었다.

밀레나는 가하란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이 아이한테 뭔가 있는 것이다.

“가하란. 누나하고 같이 돌아갈까?”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민 교수와 감찰단장이 들을 수 있도록.

감찰단장이 입을 열기 직전, 민 교수가 앞으로 반걸음 내밀며 먼저 말했다.

“그렇게 해요. 가하란, 오늘 만나서 즐거웠어. 다음에 또 보자.”

민 교수가 감찰단장의 옷을 잡아끌었다. 거침없는 손길이었다.

잊으면 안 된다. 저 실없이 웃고 있는 남자가 1등 귀족이라는 걸.

황가와 의회를 동시에 상대하는 남자와 그 남자를 아무렇지 않게 끌고 가는 민 교수.

보통 사이가 아닐 것이다.

예전부터 친분이 두터웠던 걸까?

“들은 얘기 있어?”

“아니. 단장님 쪽에 전해진 혼담이야 수도 없이 많지만, 이어진 건은 없다고 들었는데.”

“대놓고 보여주는 걸 보면 별 관계없는 것 같기도 하고. 로운, 좀 알아볼 수 있어?”

“한번 알아볼게.”

동기들 사이에서 재빠르게 말이 오갔다. 권력 구도를 파악하고 이권을 따지는 게 몸에 밴 친구들이었다.

이런 성향을 알면서도 민 교수가 당당하게 행동한 걸 보면…….

“캐봤자 별로 나오는 건 없겠지만.”

미엔이 한마디했다. 다들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멀어지는 민 교수와 칼리고를 지켜보다가 기지개를 켰다. 어쨌든 오늘은 해방이다.

“갈까?”

가하란을 보며 말했다. 가벼운 걸음으로 훈련장을 벗어나려 하는데, 이리엘데가 붙들었다.

“가하란. 누나가 재미난 거 보여줄까? 응?”

다른 동기들도 눈을 반짝이며 가하란을 보고 있었다.

쉽게 보내줄 마음이 전혀 없다는 듯이.

“재미있는 거요?”

호기심 덩어리가 고개를 홱 틀었다. 아차 싶었지만 한 발 늦었다.

발동이 걸렸으니 막을 수 없다.

밀레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얘네들이랑 놀다 갈래?”

혹시나 해서 질문했지만.

“응, 그럴래.”

돌아온 건 순진한 대답이었다.

가하란이 이리엘데 곁으로 다가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율이 옆에서 속삭였다.

“이리 떼 앞에 양을 던져놓은 기분이 이런 걸까?”

“이리 떼면 그나마 낫지. 때려잡을 수 있으니까.”

밀레나는 눈을 씰룩이며 가하란 옆으로 갔다.

* * *

“저쪽에 내버려 둬도 되겠어요?”

칼리고는 점점 멀어지는 가하란을 보며 말했다.

“그쪽하고 같이 있는 것보다야 안전할 테니까요.”

“아까는 날 싫어할 뿐, 증오하는 건 아니라고 했죠? 거기엔 믿음이 약간 담겨 있다는 뜻이고.”

슬며시 웃으며 물었다.

“칼리고는 괜찮아요. 믿을 수 있어요. 하지만 특수감찰단 단장은 아니죠.”

민 교수가 걸음을 멈추며 이어 말했다. 눈동자 안에 의심의 불길이 일고 있었다.

“그렇지 않나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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