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잠깐만 여기서 기다릴래?”
민은 가하란의 손을 놓고 생도들 앞으로 걸어갔다. 다들 의아한 눈으로 아이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럴 만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거병관리국 연구단지와 인접한 훈련장이었다. 기밀구역으로 분류된 건 아니나 멋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이런 곳에 어린아이가, 그것도 기술자처럼 멜빵바지를 입은 아이가 찾아왔으니 궁금할 수밖에.
“참관인이 생겼어요. 여러분이 보고 있는 저 아이가 맞으니까 다른 사람 찾을 필요 없어요. 아이 옆에 있는 남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어차피 곧 갈 사람이니까.”
민은 생도들의 표정을 살폈다. 몇몇 눈동자가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누군데 훈련을 참관하냐, 그런 눈빛이 보이네요. 여러분들이 내 직속 부하였다면 군장을 채워 아웃라인 바깥으로 내던져 버렸겠지만, 스콜라 생도 신분이니 설명을 해줄게요.”
말이 끝나자마자 표정을 다잡는 생도들이었다.
“브라인 특무대령을 모르는 생도 있나요?”
“없습니다!”
“설명됐죠? 다들 소문을 들었을 테니 저 아이가 누구인지 깨달았을 거예요.”
민은 조끼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말을 이었다.
“뭣도 모르는 꼬마가 훈련을 참관하는 게 못마땅할 수 있어요. 그런 감정 충분히 이해해요. 그래서 말해두는 건데, 그런 같잖은 불만은 안으로 씹어 삼켜요.”
민은 미엔을 바라봤다. 은연중 어려 있던 불만의 기색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특무대령의 권리 행사가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여러분의 우수한 두뇌로 잘 판단한 뒤 행동해요. 아, 그리고….”
가하란 옆에 있는 감찰단장을 쓱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며 좋아한다.
금세 입 안이 텁텁해진다. 민은 떨떠름한 기분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생도들에게 말했다.
“아이 옆에 있는 저건 특수감찰단 단장이에요. 아까도 말했지만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이미 알고 있었는지 다들 태도에 변화가 없지만, 유독 한 생도가 긴장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로운.”
“예, 예!”
“뭐 죄지은 거 있어요?”
“없습니다!”
“저 인간하고 사적인 문제가 있나요? 채무라든가.”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런데 왜 긴장하죠?”
“조, 존경하는 분이라 긴장됩니다.”
“…로운.”
“예!”
“사람 보는 눈을 기르세요. 이건 교수가 아니라 인생 먼저 살아본 선배로서 하는 충고예요.”
존경이라니.
민은 다시금 칼리고를 바라봤다. 여전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런 놈한테 존경?
갑자기 두통이 찾아왔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여러분은 하던 대로 훈련하면 돼요. 아이는 내 옆에 붙어 있을 테니까.”
얘기가 끝났다.
민은 가하란에게 손짓했다. 잰걸음으로 다가온 가하란이 생도들 앞에 서자마자 고개를 푹 숙였다.
“안녕하세요. 형, 누나. 전 가하란이라고 해요.”
구김살 없는 게 귀엽네.
민은 가하란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형 누나들이 훈련 중이라 인사를 못 받아줘도 이해해 줄 수 있지?”
“네.”
쪼르르 옆으로 와 얌전히 서 있는 가하란이었다. 귀찮게 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오래 쉬었으니 바로 이어서 갈게요. 다시 6분간 지속, 이번에는 어떤 부작용이 먼저 찾아오는지 느끼면서 유지해 봐요.”
시간을 확인한 후 단안경을 눈에 얹었다. 생도들 몸 주변으로 분산되던 마나가 서서히 응집되는 게 보였다.
요령 피우지 않는 건 마음에 드네. 생도들을 관찰하다가 가하란을 슬쩍 봤다.
가하란이 민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이유야 금방 알아차렸다.
“이게 뭔지 궁금하구나?”
단안경을 매만지며 물었다.
“이름은 알고 있어요. 모노클이죠?”
“잘 아네. 누가 쓴 걸 본 적이 있구나?”
“네. 엔엔 님이 낀 걸 봤어요.”
“엔엔? 연구단지에 계신 그분?”
가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브라인에 이어 엔엔이라. 곁을 주지 않기로 유명한 양반들이 이 아이한테는 꽤 살갑게 구는 모양이다.
“발이 넓구나?”
“제 발은 작아요.”
“그게 아니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낸다는 뜻이야.”
아, 하면서 새로운 걸 배웠다고 좋아하는 가하란이었다.
대화가 끝났는데도 여전히 시선이 얼굴에 닿아 있었다. 민은 모노클을 벗었다.
“한번 써 볼래?”
“그래도 되나요?”
“닳는 것도 아니니 괜찮아.”
가하란이 두 손으로 단안경을 받았다. 이리저리 살피다가 눈 가까이 가져갔다.
민은 잠자코 지켜봤다.
모노클로 주변을 살핀다고 한들 달라진 점은 없을 것이다.
마나의 미세 흐름을 시각화해 주는 장치. 편리한 도구지만 사용자가 마나를 감각하지 못한 상태라면 평범한 유리 조각일 뿐이다.
“별거 없지?”
모노클을 넘겨받으려 할 때였다.
가하란이 작게 입을 벌리며 탄성을 냈다.
“색들이 꿈틀거려요.”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 민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색이 꿈틀거려? 어느 쪽이?”
“전부 다요. 이 안경 신기해요. 엔엔 님이 말한 대로 마나를 볼 수 있나 봐요.”
“전부 다 꿈틀거린다고? 정말로?”
“네.”
가하란이 하늘을 가리켰다.
“저쪽은 뿌옇게 보이지만 군데군데 땅으로 이어지는 선 같은 게 보여요. 아, 저기 있는 트레일러는 아무 색도 없어요.”
“저기 있는 나무는 어때?”
“땅 쪽은 색깔이 진하고 가지로 올라갈수록 옅어져요. 나뭇잎 주변은 색들이 벌의 날갯짓처럼 마구 흔들려요.”
벌의 날갯짓.
감각이 예민할수록, 마나와 친숙할수록 모노클의 분별력이 높아진다.
각 지형에 분포한 마나 농도를 알아보고, 차이점을 구술할 수 있다라. 놀라운 재능이었다.
“형 누나들이 어떤 상태인지 봐볼래?”
가하란이 생도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잠시 지켜본 뒤 입을 연다.
“이상해요.”
“그래? 나무랑 비교해서 설명해 줄래?”
“나무는 뿌리 쪽에서 줄기로 색이 이어지는데, 누나는 발하고 땅이 떨어져 있는 것처럼 색이 끊어져 있어요. 그리고 몸을 통해 색들이 날아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어요. 억지로 붙잡아 두는 것 같아요.”
누나라고 칭하는 걸 보면 밀레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이 아이는 제대로, 아니, 완벽하게 보고 있었다.
아마도 아주 어릴 때, 어쩌면 태어난 직후 마나를 감각했을 것이다.
민은 모노클을 돌려받으며 질문했다.
“마나를 언제부터 깨달은 거야? 훈련은 하고 있고? 아니지. 성장 단계인 만큼 지금은 내버려 두는 게 나으려나.”
재료가 좋았다. 뛰어난 관찰안은 어느 분야에서나 반기는 재능이니까.
마나 회로를 다루는 연구자들이라면 두 손 들고 환영할 거고, 범용스크롤 제작자들 역시 눈독을 들일 것이다.
누가 채갈지 모르겠지만, 속이 아플 정도로 부럽네. 민이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가하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 마나를 느낀 적이 없어요.”
엉뚱한 대답이었다. 마나를 감각하지 못한 신체로 모노클을 사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날개 없는 새는 날 수 없고, 말 없는 마차는 앞으로 갈 수 없다. 기본적인 동력원이 있어야 모노클이 반응하는 건데….
“마나라는 게 특별해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아. 느낀다고 해서 몸에 엄청난 변화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아.”
흔한 일이었다. 자각하지 못한 채 마나를 깨닫게 되는 건.
농도 짙은 마나를 몸으로 받아내며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는 예도 있지만, 대개는 별 증상 없이 지나간다.
“아줌마가 봐줄게.”
모노클을 끼고 가하란을 바라봤다. 눈꺼풀이 두어 번 닫히고 열렸다.
민은 슬며시 모노클을 벗었다.
믿을 수 없지만, 가하란의 말은 사실이었다.
마나를 깨닫는다는 건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지면 밑, 저 깊숙한 곳에 흐르는 뿌리와 잠깐이나마 연결되면 마나를 알게 되는 것이다.
지상의 모든 생명체는 이 과정을 한 번쯤 겪게 된다.
이르면 태어나는 순간에, 늦으면 사망하기 직전에 겪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
민은 다시금 단안경 너머로 가하란을 바라봤다.
바닥에 흐르는 옅은 마나들이 가하란 발치에서 맴돌 뿐, 몸을 타고 오르지 않았다.
단 한 번이라도 뿌리를 느꼈다면, 자연 상태의 마나들이 가하란 몸에 달라붙었을 것이다.
아직 마나를 감각하지 못한 상태.
이상했다.
현상을 분명히 목격했으나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마나를 깨닫지 못한 상태로 모노클을 사용했다.
날개 없는 새가 창공으로 날아오른 꼴이었다.
툭툭,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민은 고개를 돌렸다. 칼리고가 웃으면서 턱짓을 했다.
잠깐 뒤로 와서 얘기 좀 하죠, 낮은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그만. 6분이 됐네요.”
민은 진땀을 흘리며 비틀대는 생도들을 바라봤다.
“잠깐 쉬고 있어요. 쉬면서 이 애랑도 놀아주고.”
밀레나와 친분이 있으니 가하란도 불편해하지 않으리라. 밀레나가 가장 먼저 손짓해 가하란을 불렀다.
“잠깐만 놀고 있어.”
민은 조금 떨어져 있는 감찰단장에게 걸어갔다.
“설명해 봐요.”
앞에 서자마자 말을 꺼냈다.
들어야 했다. 저 아이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설명해 주고 싶지만 설명할 게 없어요.”
“…당신도 지금 알았군요.”
“그래서 서둘러 교수님을 뒤로 불렀죠.”
눈을 찌푸리며 엄지를 살짝 물었다.
상식의 범주 안에 있는 재능은 환영받기 마련이다. 이끌어줄 스승의 손을 붙잡고 재능을 개화시키면 된다.
하지만 상식을 벗어난 능력을 경계하기 마련이다. 재능의 개화보다 실험이 우선시될 것이며, 저 아이는…….
“가하란의 상태, 확실한 건가요?”
칼리고가 눈웃음 지으며 물었다. 민은 이 표정을 잘 알고 있다. 저건 웃음이 아니다. 잘 만든 포장지다.
“단장님. 그 전에 알아야 할 게 있는데.”
“뭔가요?”
“당신, 저 애한테 어떤 사람이지?”
“그걸 그쪽한테 말할 이유는 없는데.”
“말이 짧네.”
“그쪽이 먼저 짧게 했으니까.”
“해보자는 거야?”
침묵하던 칼리고가 다시금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저건, 사심 없는 웃음이었다. 저 인간한테서 정말 보기 드문 표현이기도 하다.
“난 저 애가 마음에 들어요. 내 마음속 영웅 중 한 사람과 만나게도 해줬고. 그러니 빚이 있는 거고, 빚이 있는 한 난 저 애를 보호해 줄 거예요. 뭐, 그것 말고도 여러 이유가 있지만.”
보호해 준다.
경박한 인간이지만, 저 표정으로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근데 교수님. 그거 알고 있나요?”
“뭐가요?”
경계심을 누그러트리며 대꾸했다.
단장의 눈웃음 형태가 다시 바뀌었다. 평상시에 짓고 다니는, 얄미운 표정이다.
“절 여전히 ‘당신’이라고 부른다는 걸.”
“그게 왜요?”
“……그러니까 그건.”
“난 당신을 싫어하지만 증오하는 건 아니에요. 바퀴벌레처럼 끔찍할 때도 있지만, 사랑스러울 때가 훨씬 많았어요.”
“…….”
“그거 알죠? 그 쉴 틈 없이 움직이는 입이 이럴 때면 조용해진다는 걸.”
민은 가하란 쪽을 보며 말했다.
“옛 얘기는 그만두고 애부터 생각해 봐요. 지금 우리가 목격한 건 황제께서 그토록 바라던 능력일지도 모르니.”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