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2화
“계속해서 하는 말이지만, 버틸 필요 없어요. 할 수 있다는 맹신에 빠져 도전하다가 부러지는 것보다 적당한 선에서 물러서는 게 나아요.”
민 교수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말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노력해봤자 거병 기사가 될 수 있는 건 많아야 두 명. 훈련 결과에 따라 여섯 명이 사이좋게 손잡고 성도로 돌아갈 수도 있어요.”
민 교수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져 간다.
왜 저렇게 작게 말씀하시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집중했다. 목소리가 작아진 게 아니었다. 반쯤 기절해서 음성을 놓친 것이다.
밀레나는 치솟는 갈증을 참아내며 민 교수를 바라보았다.
신체술을 사용하고 6분이 지났다.
세밀하게 느껴지던 마나는 굴속에 숨은 여우처럼 자취를 감췄고, 예리했던 감각들은 제멋대로 뒤엉켜 기능을 상실해 버렸다.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가 푸르게 변했다. 심장이 쿵쿵대는 소리가 발바닥에서 느껴지다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
아주 잠깐이지만 숨 쉬는 법이 떠오르지 않아 공포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얼마나 더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 포기란 단어가 눈앞에 아른거릴 때였다.
“그만.”
민 교수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듣자마자 신체술을 풀었다.
체내에 붙들어뒀던 마나가 외부로 흘러나갔다. 몸을 옥죄던 압박감이 풀리고 자기주장이 극에 달했던 감각들도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6분 동안 신체술을 유지해봤는데, 어때요? 해볼 만해요?”
차마 예, 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신체술을 6분 이상 지속하다니.
밀레나는 손등으로 턱을 닦아냈다. 식은땀이 계속 흘러내렸다.
“스콜라의 훈련방식이 바뀌지 않았다면 3분 지속을 목표로 훈련하고 있겠죠. 내 말이 맞나요?”
“예!”
“3분.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3분이란 시간은 어떤가요? 긴가요? 아니면 짧은가요?”
민 교수가 미엔을 지목했다. 미엔이 턱을 살짝 들며 말했다.
“대인전을 생각하면 적당한 시간입니다.”
“불리한 지형에서 치러지는 전투라면요?”
“턱없이 부족합니다. 퇴로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도 3분이 소요될 겁니다.”
“좋아요. 그렇다면 왜 교육 과정에서는 3분이란 시간을 목표로 삼았을까요.”
미엔이 죄송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민 교수의 시선이 옮겨졌다. 다들 입을 꾹 다문 채 앞만 봤다.
밀레나도 마찬가지였다.
인간 잡학사전인 미엔이 모르는데 내가 알 리가 있나.
“스콜라 교육방침이 조금 바뀌었나 봐요. 현역 교관이 아니라는 걸 이렇게 체감하네요.”
민 교수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3분이란 시간은 통계치예요. 대다수 생도가 3분 전후로 신체 이상을 호소했죠. 지금 여러분이 느끼고 있는 증상들.”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예를 드는 민 교수였다.
“극심한 어지럼증, 심각한 갈증, 사지에서 느껴지는 압통, 색각 이상, 호흡계통 마비, 전신 경련 혹은 국소 부위 경련.”
듣기만 해도 속이 답답해진다.
민 교수가 말한 것들을 불과 몇 분 전에 체험하고 있었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감각이었다.
“물론 이러한 증상을 겪는다고 해서 죽는 건 아니에요. 스콜라 기초훈련을 견뎌내고 신체술에 입문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수하다는 증거니까요. 우수한 종자는 이 정도의 채찍질에 쓰러지지 않죠.”
아주 간혹가다가 사망자가 나오기는 하지만, 민 교수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3분. 교관들은 이 시간을 철저히 지켰을 겁니다. 스콜라는 육성기관이니까요. 극한까지 몰아친다고 해도 그 선을 넘지는 않아요.”
민 교수 말대로 신체술 유지훈련을 3분 넘게 지속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안전범위 내에서 신체술을 유지하는 게 최선일까요? 당연히 아니죠. 그건 어디까지나 귀중한 생도들을 위한 안전장치일 뿐이에요.”
민 교수가 진한 미소를 지었다. 웃는 얼굴이 이토록 불안해 보이는 건 오래간만이었다.
저 입에서 또 어떤 말이 쏟아질까.
“아까 말했죠? 여러분들은 내가 생각하는 기준에 맞춰야 한다고.”
민 교수가 손가락 두 개를 폈다.
2분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는 건….
“일단 20분 동안 유지하는 것. 아무런 행동 없이 단순히 유지만 하는 것이니 20분은 해야 해요. 이게 내가 말하는 기준이자, 기본 조건이니 기억해둬요.”
20분.
6분 지속하는 것만으로도 내장이 쥐어짜지는 고통을 맛봤다. 인간의 몸뚱이로 20분이 가당키나 한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불가능한 목표치가 아닐까?
좌절감에 치여 포기하는 생도가 나오길 바라는 게 아닐까? 어쩌면 신체술 훈련이 아니라 정신력 훈련이 아닐까?
“후.”
느닷없이 민 교수가 가뿐 호흡을 내쉬었다. 밀레나는 멀거니 민 교수를 바라봤다.
서서 말하고 있을 뿐인 민 교수의 목덜미에서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체온이 급격하게 올라간 것처럼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가, 금방 본래 색을 되찾았다.
“1시간 14분.”
민 교수가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그게 뭘 뜻하는 건지, 밀레나는 금방 알아차렸다.
경외심은커녕 놀라움조차 생기지 않았다. 무덤덤했다. 이해력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으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멀거니 눈만 깜빡거렸다. 옆에 있는 율도 비슷한 심정인 것 같았다.
몇 초간 이어진 침묵을 깬 건 이리엘데였다.
“교수님께선 신체술을 유지중이셨군요.”
“단순히 마나를 붙들어두는 거니 이 정도는 해야죠.”
“현역분들 사이에서 ‘신체술을 쓴다’는 건 그런 뜻인가요?”
“비슷해요. 차이는 약간씩 있겠지만.”
로안이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합니까?”
“질문이 잘못됐어요. 여러분들은 이미 방법론을 꿰고 있어요. 남은 건 시행해서 결과를 내는 것뿐이죠.”
20분도 까마득해 보이는데, 교수는 1시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기초단계에서는 이렇게 배웠을 거예요. 필요한 순간에 신체술을 끌어올려 대응한다. 틀린 말은 아니에요. 효용성을 따지면 그게 좋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좋다는 거지, 완벽한 건 아니에요.”
민 교수가 브리테를 바라봤다.
“상시 힘을 유지할 수 있는 게 베스트입니다.”
브리테가 답했다.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죠?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니까요.”
먼지를 머금은 바람이 서쪽에서 불어왔다. 밀레나는 눈을 찌푸리며 민 교수를 바라봤다.
교수가 제시한 기준점을 넘지 못하면 그대로 탈락. 짐 싸 들고 성도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2주 동안은 이 훈련을 반복할 거예요. 질문이 필요 없는 아주 간단한 훈련이죠. 여러분은 이제 결정하면 돼요. 조금씩 늘어나는 시간을 몸부림치며 견딜 건지, 아니면 편하게 숙소로 돌아가 잘 건지.”
민 교수가 회중시계를 들며 말했다.
물론 발걸음을 돌리는 동기는 없었다.
“그러면 다시 시작….”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트는 민 교수였다. 멀리 있는 무언갈 바라보는 눈치였는데, 눈매가 점점 사나워지고 있었다.
“아주 질 나쁜 인간이 오고 있네요. 생도 여러분, 잠깐 대기하세요.”
손짓하며 자리를 옮기는 민 교수였다.
밀레나는 민 교수가 걸어가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가하란?”
왼쪽에 있는 건 분명 가하란이었다. 그 옆에 있는 남자는……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감찰단장이었다.
저 둘이 왜?
* * *
“여기 있는 귀엽고 깜찍한 어린 친구는 가하란이라고 아마 교관님도 들어보셨을 겁니다.”
“교수.”
민은 힘주어 말했다.
“아, 네. 이제는 교수님이셨죠. 그래도 아직 우등교관이시니 교관도 틀린 말은 아니죠.”
“여기서는 교수라 불리고 있으니 단장님께서도 그리 불러주시면 고맙겠네요.”
“교관님이란 호칭이 입에 달라붙어 있어서….”
“그러면 그 달라붙은 호칭을 내가 직접 떼드릴까요? 마침 도끼도 가져왔겠다, 이리 와봐요. 금방 떼줄 테니.”
“…교수님, 농담도 참. 하핫!”
감찰단장이 멀건 웃음을 지었다.
몇 년 만에 봤건만,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가 아파진다. 상대하는 것 자체가 손해인 만큼 바로 본론을 꺼냈다.
“무슨 일로 온 거죠? 여긴 당신이 들쑤실만한 문젯거리가 없는데.”
“저라고 매번 그런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정말요?”
민은 칼리고를 노골적으로 노려봤다. 이 남자의 말은 도저히 신용할 수가 없다.
그때였다. 시야 아래쪽에서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고개를 살짝 내렸다.
썩어 문드러진 감찰단장의 탁한 눈과는 달리, 청아한 하늘색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민은 감찰단장을 옆으로 밀치고 가하란 앞에 섰다. 무릎을 굽힌 다음 눈높이를 맞췄다.
“그래, 안녕.”
수줍어하지도 않고 맑게 웃는 모습이 어여뻤다. 민은 가하란의 동글동글한 눈을 들여다가 보다가, 고개를 쓱 돌려 칼리고를 바라봤다.
극과 극이 여기에 있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착한 애 물들이지 말고 얼른 저리 가세요.”
“제국에서 저만큼 선량한 인간이 또 어디에 있다고.”
말 같지도 않은 말이었다. 민은 감찰단장을 무시하고 가하란을 바라봤다.
“너에 대한 얘긴 여기저기서 들었어.”
“정말요?”
“그럼. 봐봐, 아줌마가 너 주려고 이렇게 간식까지 준비했는걸? 언제 오나 내심 기다리기도 했고.”
민은 조끼 안쪽에서 쿠키를 꺼냈다. 부서지긴 했지만 먹는데 아무 문제 없었다.
“여긴 왜 온 거야? 구경하러 온 거야?”
“밀레나 누나 만나러 왔어요.”
“밀레나?”
민은 훈련장에 서 있는 밀레나를 봤다. 엔첸세의 딸과 친분이 있다니.
이 아이는 배경이 없는, 둔에서 태어난 평범한 시민이라고 하던데.
알게 된 경위가 궁금하긴 하지만 묻지는 않았다. 어린 친구라도 비밀로 하고 싶은 것들이 있을 테니까.
“근데 어쩌지. 지금 훈련 중이라.”
“그러면 옆에서 지켜봐도 돼요? 저 궁금했거든요.”
“뭐가 궁금했어?”
“싸우는 방법이요. 아빠가 알려줬어요. 스콜라 사람들은 제국에서 제일 싸움을 잘한다고.”
“제일은 모르겠지만, 전투에 능한 건 사실이지. 근데 봐도 재미가 없을 텐데, 괜찮겠어?”
“네!”
브라인 특무대령이 뒤를 봐주고 있는 애였다. 전술훈련도 아니고, 기초적인 신체술 훈련 정도는 참관시켜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보고 따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옆에서 보는 건 상관없지만, 얌전히 있어야 해. 지킬 수 있지?”
“가만히 있을게요.”
“그렇다고 너무 긴장해서 있을 건 없고. 물어보고 싶은 거 있으면 아줌마한테 물어봐도 돼. 알겠지?”
“네!”
귀엽고 붙임성도 좋았다.
이런 애를 보고 왜 ‘작은 악마’라 부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옆으로 그림자가 다가왔다. 억지로 웃는 칼리고를 올려다보며 왜요, 라고 물었다.
“저랑도 얘기를 좀….”
“이런 어쩌죠. 전 할 말이 없는데.”
머쓱한 얼굴로 바라보는 칼리고였다. 민은 단장에게 대충 손짓한 다음 가하란에게 말했다.
“아줌마랑 손잡고 갈까?”
방실방실 웃는 가하란과 함께 생도들 곁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쓸데없는 남자 하나가 구시렁거리며 따라왔지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