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징그럽게 브라인 님은.”
“할멈이라 불러도 좋아하진 않잖아요.”
“브라인 ‘님’보단 낫지.”
브라인은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책상 구석에 놓아둔 그림을 보았다.
이름 모를 풀이 무성히 자란 숲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통나무집.
이 땅이 ‘둔’이란 이름을 갖기 전, 브라인은 저 집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적당히 심심하고, 적당히 시끄러운 그런 곳이었다. 지금이야 싹 다 밀리고 계획도시가 들어섰지만.
“전에 살던 곳이랬죠?”
“그래. 너희 인간들이 오기 전에 살던 곳이지.”
“그리우세요?”
“그립냐고? 아니. 얼마 되지도 않은 일을 그립다는 말로 표현하면 좀 그렇지.”
“족히 100년 전 일 아니에요?”
“그러니까 얼마 안 된 거지.”
칼리고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제국의 시작을 같이 봐오셨잖아요. 이번 사건, 너무 찝찝해요.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아요.”
브라인은 양쪽 귀를 잡아 밑으로 끌어당겼다. 귓구멍을 막으며 대답했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난 어디까지나 방관자이자 기록자일 뿐이야. 망하면 망하는 대로 기록을 남겨두면 될 뿐이지.”
“방관자라 하기엔 따로 하시는 일이 있잖아요. 저도 정확히 파악한 건 아닌데, 이상한 악마 같은 걸 할멈이 처리한다는 소문이 있어요.”
“바퀴벌레 잡는데 무슨 이유가 있나. 그냥 잡는 거지.”
브라인은 책상에 놓인 파일을 캐비닛에 던져넣었다.
“볼일 다 봤지? 그럼 좀 가. 내 황금 같은 낮잠을 방해하지 말고.”
“천년 넘게 살면서 수없이 잤을 텐데도 잠이 그렇게 좋으세요?”
“그러는 넌 허구한 날 사건 찾아다니는 게 안 질리고?”
“그렇게 말씀하시니 할 말이 없네요.”
가볼게요, 인사하며 돌아서는 칼리고였다. 브라인은 눈을 감으며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그놈’은 괜찮아 보이든?”
“모르겠어요. 총수께서 괜찮은 건지, 안 괜찮은 건지. 근데 좋아 보이진 않아요. 무슨 뉘앙스인지 아시죠?”
“둔 문제보다 그 아이나 챙겨라. 그게 네가 좋아하는 제국을 돌보는 길이니까.”
“글쎄요. 전 사람을 좋아하지 제국을 좋아하진 않아서.”
“마음대로 해라.”
브라인은 크게 하품한 다음 책상에 엎드렸다.
인간 일은 인간이 알아서 잘해야지. 망하든 말든, 자기들 손에 달린 거니까.
“다음에 올 땐 뭐라도 사 올게요.”
“안 오는 게 선물이야.”
멀어지던 발소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툭, 하고 책상에 무언가를 놓고 떠나는 칼리고였다.
한참 엎드려 있다가 슬그머니 그가 남기고 간 물건을 살폈다.
-이거 켜두고 자면 잠이 잘 온다고 하네요.
쪽지를 힐끗 보고 유리 안에 담긴 향초를 손에 쥐었다. 코를 대고 맡으니 제법 좋은 향이 올라온다.
“뭘 이딴 걸.”
브라인은 입구 쪽을 쓱 살핀 뒤 초에 불을 붙였다.
은은한 향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 * *
“브라인 님이 엄청나게 싫어하시던데요.”
“아니라니까. 날 좋아하는 거야. 그런데 티내는 게 부끄러워서 싫은 척하시는 거지.”
“정말 맞아요?”
가하란은 칼리고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곧잘 대답하던 칼리고가 답을 회피하고 시선을 돌렸다.
“근데 너, 나 따라와도 되는 거야?”
“오늘 할 일은 다 했어요. 빗질도 끝냈고.”
길 한가운데 멈춰선 칼리고가 주변을 둘러봤다.
“평소에도 너 혼자 군부를 돌아다니는 건 아니지?”
마주 오던 군인 둘이 방향을 틀어 왼쪽 별관으로 들어갔다.
가하란은 고개를 살짝 저은 뒤 대답했다.
“중앙부 안은 혼자 돌아다녀도 되는데, 건물 밖으로 나갈 땐 누나랑 같이 가요.”
“누나라면 셀베이아 씨?”
“네.”
“그 아가씨도 고생이 많네.”
찰랑거리는 나뭇잎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쓰륵쓰륵 잎이 쓸리며 그 사이로 햇볕이 바스러졌다.
절로 웃음이 지어지는 날씨였다. 칼리고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날씨 좋네. 이제야 가을답네.”
“아빠가 그러는데, 여름이 길어서 금방 추워질 거래요.”
“올해도 눈이 많이 오려나.”
“작년에는 엄청 와서 눈사람을 크게 만들었어요. 제 키보다 훨씬 크게.”
“잘했어. 하지만 난 2미터 넘는 눈사람을 만들었으니까, 내가 이긴 거야.”
“…전 사실 올해 3미터짜리 눈사람을 만들려고요.”
“내가 말 안 했구나. 난 4미터로 만들 예정인데.”
가하란은 코를 찡긋거리며 말했다.
“아저씨, 유치해요.”
“네가 할 소리는 아니야.”
둘은 풋 웃으면서 다리를 건넜다.
연녹색 깃발을 꽂은 이두 마차가 맞은편에서 달려왔다. 주변에 있던 군인들이 잠시 멈춰서 마차를 향해 군례를 올리고 걸음을 옮겼다.
자주 보던 광경이었다. 누나가 말하길, 군부에서 연녹색 깃발은 아주 높은 사람들을 뜻한다고 했다.
중앙부 앞에 선 마차에서 사람이 내렸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나이가 많아 보였다.
“어르신들, 바쁘기도 하지.”
“아저씨는 저분들이 누군지 알아요?”
“장성급들이야. 별을 단 군인들. 개중에는 책상 빼고 퇴역해야 할 인간이 수두룩한데….”
칼리고가 도중에 말을 멈췄다.
“이런 얘긴 들어봤자 좋을 게 없지.”
“왜요?”
“재미없거든. 구린내만 나고. 이런 건 더 크게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그때 가면 내 말을 이해하게 될 거고.”
가하란은 중앙부로 들어가는 장성급을 바라봤다.
“별은 달았다는 건 좋은 뜻이죠?”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는 거지.”
“그러면 훌륭한 사람 아닌가요?”
“글쎄다.”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대며 씩 웃는 칼리고였다.
“맞다, 아저씨. 여관에 계속 머물고 계시죠?”
“루드 여관을 말하는 거면, 계속 투숙하고 있지. 밥맛도 좋고 친절하고, 무엇보다 테리와 제니가 나랑 잘 놀아주거든.”
“…아저씬 친구 없어요?”
“너보다 훨씬 많거든?”
칼리고가 앞에 놓인 돌멩이를 툭 차며 되물었다.
“여관은 왜 물었어?”
“구치 아저씨요. 아직 거기 계신가 해서요.”
“구치 씨라면 한참 전에 떠났지.”
가하란은 눈을 끔뻑였다.
“정말요? 아직 계신 거 아니었어요?”
“꽤 됐어. 이 주는 넘었지? 그때 기동식 한 다음 날에 출발했을걸?”
“…요즘 여관에 못 가서 몰랐어요.”
물어볼 게 한가득이었는데, 결국 인사만 하고 끝났다. 가하란은 칼리고의 눈을 바라봤다.
“아저씨는 여기에 언제까지 있어요?”
“음, 나도 곧 떠날 거 같아. 랜더 씨와 구치 씨를 따라갈 생각이거든.”
“언제 돌아올 건데요?”
“왜? 내가 간다니까 섭섭해?”
가하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진심을 담아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저씨와 얘기하는 건 비 오는 날 밖에서 뛰어노는 것만큼이나 즐거웠다.
“그렇게 아쉬워할 필요 없어. 금방 또 만나게 될 거야. 아저씨가 할 일을 끝내고 나면, 구치 씨 데리고 같이 찾아올게.”
“랜더 아저씨도 같이 데리고 와요.”
“그래. 랜더 씨도 데려올게.”
아저씨가 떠난다. 단 한 번도 귀찮아하지 않고 대화에 어울려주던 아저씨가.
못 본다고 생각하니 금방 울적해졌다. 괜스레 코끝도 시큰하고.
“아저씨, 사탕 하나 드실래요?”
“좋지.”
간식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냈다.
“많이 있으니까 언제든 오세요.”
“입이 심심해질 때마다 찾아올게.”
사탕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러고 보니 요즘 밀레나도 만나지 못했다.
같이 체스 둔 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날 정도다. 훈련 때문에 바쁘다는 말은 들었는데, 대체 얼마나 바쁘기에 군부에서조차 얼굴 한번을 못 보는 걸까.
“맛있는 사탕 먹으면서 표정이 왜 그래.”
칼리고가 물었다. 가하란은 속에 든 말을 꺼냈다. 밀레나를 못 만나서 아쉽다고.
“밀레나 양이라면 지금쯤 훈련장에 있겠네.”
“어디 있는지 아세요?”
“알지. 말 나온 김에 보러 갈까? 마침 나도 그쪽에 볼일이 있고.”
“제가 가도 될까요?”
칼리고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네 뒤에 특무대령님이 계셔. 거기에 나랑 동행하면 군부에서 못 갈 곳이 없고. 어때, 가고 싶어?”
“네! 누나랑 만나고 싶어요.”
칼리고가 눈을 갸름하게 떴다.
“너, 누나를 좋아하는구나?”
“네! 좋아해요.”
“……그 순진무구한 눈을 보고 있으니 내가 다 부끄러울 정도다. 네가 아직 애라는 걸 잠깐 잊고 있었다.”
“좋아하는 게 왜요?”
“그런 게 있어. 크면 알게 될 거야. 아무튼 네가 좋아하는 그 누나 보러 가자.”
왼발을 뒤로 빼 앞꿈치로 땅을 콕 찍은 칼리고가 그대로 뒤로 돌았다.
군부에서 자주 보던 동작이었다. 줄을 맞춰 이동할 때, 군인들은 저런 식으로 뒤로 돌았다.
가하란은 동작을 따라 해봤다. 엉성하지만 어쨌든 뒤로 돌 수 있었다.
“가하란 훈련병, 날 따라오도록.”
“네, 대장님!”
축제 때처럼 신나게 대답했다.
* * *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흉측하게 생긴 악마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모든 악마는 인간의 탈을 쓰고 나타난다고.
백 번 천 번 공감하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그 인간의 탈을 쓴 악마가 지금 눈앞에 있으니까.
삑, 하는 호루라기 소리에 밀레나는 신체술을 풀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반발 작용이 온몸을 때리고 있었다. 목구멍을 비집고 올라오는 신물을 겨우 참아내며 고개를 들었다.
여기서 허리를 꺾고 숨을 껄떡댄다면, 민 교수는 가차 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짐은 내가 정리해서 성도로 보낼 테니, 그만 쉬세요.’
그 말을 들을 순 없지.
순간적으로 시야가 검게 변했지만, 허벅지에 힘을 바짝 주며 버텨냈다.
“좋아요. 10분 쉬죠.”
쉬자는 말에 동기들이 동시에 뒤로 나자빠졌다. 차라리 군장을 메고 뛰던 때가 나았다. 그건 체력 분배만 잘하면 버틸 만했으니까.
신체술을 강제로 유지하는 건 정말 인간이 할 짓이 못 됐다.
민 교수 밑에서 훈련을 받은 지 3주째.
밀레나에게 남은 건 오기뿐이었다.
민 교수가 의자를 가져와 앞에 앉았다.
“어때요? 스콜라에서 받던 신체술 훈련과 비교하면 조금 힘들죠?”
조금?
눈가에 살짝 경련이 일었다. 하마터면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아닙니다.”
“스콜라가 제국의 무력 집단을 대표한다곤 하지만, 글쎄요. 생도 중 몇이나 자랑스럽게 그 말을 꺼낼 수 있을까요? ‘대표’란 말은 참 무거운데.”
울렁거리던 속이 가라앉았다. 밀레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민 교수의 말을 들었다.
“여러분들은 다들 마나를 깨닫고, 신체술을 배웠을 거예요. 그게 불가능했다면 애초에 생도가 되지 못했겠죠. 그렇죠?”
“예!”
“그렇기에 여러분들은 이런 말을 할 거예요. ‘신체술을 쓴다’ 혹은 ‘신체술을 사용한다’.”
민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데 이 말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어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애들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달렸다’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들겠어요?”
뒤에 나올 얘기가 무엇인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본격적인 훈련은 아직 시작조차 안 했다는 점도.
“여러분들은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쓴다’의 기준을 맞춰줘야 해요. 그게 안 되면 거병을 움직일 수 없으니까요.”
악마가 호루라기를 가볍게 불었다.
“말하는 사이 10분 지났네요.”
물론 10분은커녕 3분도 안 지났을 것이다. 하지만 토를 달 수는 없었다.
밀레나는 이를 악물며 다시 일어섰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