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0화
“다 됐어요.”
가하란은 의자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수고했어.”
등받이에 기대앉아 있던 브라인이 곧바로 책상에 엎어졌다. 가하란은 축 늘어진 브라인의 귀를 살짝 들어올렸다. 아직 치우지 못한 털이 책상에 수북했다.
“그래도 전보다는 덜 빠져요.”
“털갈이 시기도 거의 끝나가니까.”
“언제까지 털이 빠져요?”
“나도 몰라. 계절에 따라, 내 컨디션에 따라 금방 끝날 때도 있고 겨울 직전까지 계속 빠질 때도 있고.”
귀찮다면서 계속 투덜대는 브라인이었다. 털을 그러모아 자루에 담았다.
잠시 기다리니 초록색 캐비닛이 통통 뛰어왔다. 털을 보관해 놓는 캐비닛이었다. 털이 가득 차면 짐수레에 담아 보육원으로 보낸다.
“브라인 님, 브라인 님.”
“이름은 한 번만 불러. 왜?”
“오늘은 무슨 얘기 해주실 건가요?”
“…정말 미안한데 오늘은 넘어가면 안 될까? 나도 알아, 내가 약속했다는 걸. 근데 오늘은 이 할머니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 안 좋아도 이렇게 안 좋을 수가 없어.”
콜록거리며 고개를 트는 브라인이었다.
“거짓말이죠?”
“어른이 그렇다면 그런 거야.”
“어른은 약속을 잘 지킨다고 했어요.”
반들반들한 코가 위아래로 들썩거렸다. 어지간히 싫은 모양이다. 오늘은 얌전히 돌아가야 하나,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꼬마야.”
“네?”
“당장 밖으로 뛰어가서 지금 오는 놈 막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
몸이 붕 떠올랐다. 눈을 살짝 감았다 뜨니 기록보관서 입구 앞이었다.
저 뒤에 있는 브라인이 얼른 가라며 손짓하는 게 보였다.
일단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 있어? 이 시간에 나오고.”
셀베이아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봤다. 가하란은 안에서 들은 얘기를 그대로 전했다.
“막으라고 했다면, 설마….”
삐이익, 날카로운 울음이 복도 중앙에서 들려왔다. 가하란은 중앙계단 쪽을 바라보았다.
지나다니던 군인들이 움찔하며 벽으로 붙는 게 보였다. 희미하게 “미안합니다, 하하, 미안해요.”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하란.”
“네?”
“가서 막아.”
등을 툭 치는 셀베이아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중앙계단 쪽으로 뛰어갔다. 눈살 찌푸리는 군인들을 지나쳐 계단에 도착했다.
“안녕?”
“아저씨!”
칼리고였다. 그러나 반가움도 잠시, 뒤쪽에 있는 새에 시선을 빼앗겼다.
처음 보는 형태였다.
부리가 굵고 뭉툭했다. 머리에는 닭처럼 벼슬이 있는데 모양이 특이했다. 일렁이는 불꽃처럼 보이기도 하고, 바짝 마른 나뭇가지를 뭉쳐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새가 총총 뛸 때마다 회색 깃털이 바닥에 떨어졌다.
“뒤에 새가 있어요.”
“알아.”
“아저씨가 기르는 새예요?”
“아니. 기른다는 표현은 맞지 않아. 굳이 표현하면 말을 더럽게 안 듣는 친구?”
날개를 곱게 접은 채 계단을 뛰어오르는 회색 새였다.
가하란은 옆으로 비켜섰다. 새가 흘깃 바라보더니 기록보관서 앞으로 뛰어갔다.
“오, 오지 마!”
셀베이아가 소리치며 서류철을 흔드는 게 보였다. 회색 새는 아랑곳하지 않고 접수대에 내려앉아 삐엑삐엑 울기 시작했다.
“봤지? 내 말을 잘 안 들어.”
“저런 새는 처음 봐요. 혹시 랍파와 함께 하는….”
칼리고가 고개를 흔들었다.
“우선 난 랍파가 아니야. 쟤도 매가 아니고. 퍼밀리어라는 계약마법으로 엮인 사이지만, 그렇다고 주종관계는 아니야. 아까도 말했듯, 그냥 제멋대로 나타나서 가끔 도와주는 친구지.”
칼리고와 함께 걸었다. 기록보관서 앞에 도착하자 셀베이아가 칼리고를 노려봤다.
“알베르트는 출입 금지라고 했죠!”
“2년 만에 보는 건데 이름을 기억하네요. 알베르트가 좋아하겠어요.”
“지금 농담할 기분….”
셀베이아가 파일로 앞을 막았다. 회색 새가 날개를 퍼드득거리며 셀베이아를 괴롭혔다.
“잠깐만, 잠깐만!”
가하란은 날뛰는 새의 몸통을 잡았다. 큰 닭이라고 생각하니 어렵지는 않았다.
붙잡힌 새가 두리번거리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가하란은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가까이서 보니 되게 무섭게 생겼네.
새가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러더니 한쪽 날개를 펴며 가볍게 뛰었다. 가하란은 억 소리와 함께 끌려갔다.
툴보다 덩치는 작지만, 힘은 더 센 거 같았다. 날뛰는 새의 발목을 붙잡고 겨우 진정시킬 때였다.
“네가 마음에 든 것 같은데?”
칼리고가 말했다.
“아닌 거 같은데요.”
가하란은 몸 위에 내려앉은 새를 바라봤다. 왠지 비웃는 것처럼 보인다.
“안에 할멈, 아니, 대령님 계시죠?”
“있다는 걸 알고 오신 거잖아요.”
“그렇긴 하죠.”
칼리고가 문으로 손을 뻗었다. 가하란은 새를 옆으로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안 돼요, 아저씨.”
“뭐가?”
“누나가 안내해줘야 들어갈 수 있어요. 멋대로 열면 위험해요.”
“날 걱정해주는 거야? 어린애가 날 걱정해주다니.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감격스럽기까지 하네.”
칼리고가 웃으면서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문턱을 넘었다.
“아저씨!”
서둘러 따라가야 했다. 안에서 미아가 돼버리면 큰일이었다.
“누나, 얼른 가요.”
셀베이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어질러진 접수대를 정리했다. 느긋한 행동에 가하란은 조바심이 났다.
그 사이 칼리고는 멀어져 있었다.
“가하란. 저 사람은 괜찮아. 안내하지 않아도 돼.”
“네?”
“저 인간은 대령님이 작정하고 막으려 해도 기어코 뚫고 들어가거든.”
그때였다. 회색 새가 날개를 활짝 펴더니 단 한 번의 날갯짓으로 날아올랐다.
바닥을 스치듯 낮게 날며 복도를 한 바퀴 돈 새가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무심하게 서류 정리 중인 셀베이아와 문 안쪽을 번갈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따라갈게요.”
안에서 하면 안 되는 것들을 알려주기 위해 문으로 뛰어들었다. 복도와 연결된 문이 닫히며 캐비닛 세상으로 진입했다.
“아저씨!”
열심히 뛰어서 칼리고를 따라잡았다.
“심장 터지겠다. 천천히 뛰어.”
“그게… 그게….”
헐떡이는 숨을 안으로 삼킬 때였다. 칼리고가 푸른 실선 바깥으로 발을 내밀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칼리고의 다리를 붙잡았다.
“이 선 바깥으로 나가면 안 돼요!”
“왜?”
“브라인 님이 찾기 전까지 못 돌아오게 돼요.”
“그래?”
뒤로 물러설 것처럼 굴던 칼리고가 기어이 선 밖으로 나갔다. 다리를 붙들고 있던 가하란도 같이 끌려 나갔다.
끝없이 펼쳐진 캐비닛 산이 보였다. 저번에 튕겨 나갔을 때와는 또 다른 풍경이었다.
“…아저씨. 제 말 들어주세요. 정말 위험해요.”
칼리고는 말없이 미소 짓기만 했다. 가하란은 눈에 힘을 주고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떨어트렸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선을 찾으면 여기서 나갈 수 있어요.”
푸른 선을 찾아야 했다. 바깥으로 인도해줄 안내선을.
“안내선이 보여?”
“다른 사람은 안 보인다고 하는데, 저는 잘 보여요. 여기 어디쯤 있을 거예요.”
브라인은 정색하며 못 오게 막으라고 했다. 그 말투로 미루어보건대, 여기 갇혔다고 해서 금방 도와주진 않을 것이다.
낮잠을 푹 자고 일어나서 간식을 먹을 때쯤 여기서 꺼내주지 않을까?
“재주가 많네. 하지만 괜찮아. 나한텐 불친절한 안내자가 있으니까.”
불친절한 안내자?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 때였다.
회색 새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머리 위에서 세 바퀴를 돌더니 따라오라는 듯 앞으로 나아갔다.
“저 친구만 쫓아가면 돼.”
“정말요?”
“여기 한두 번 와본 게 아니거든.”
칼리고가 몸을 낮췄다.
“업혀.”
“전 괜찮아요.”
“저걸 쫓아가야 하는데, 따라올 수 있어?”
말하는 사이, 회색 새는 엄지손톱만큼 작아져 있었다. 내가 뛰어서 저 새를 따라갈 수 있을까? 답은 명확했다.
“아저씨는 따라갈 수 있어요?”
“피곤하긴 하지만, 못 할 건 없지.”
고개를 끄덕인 다음 칼리고 등에 업혔다.
“꽉 잡아.”
칼리고가 발을 굴렀다.
목이 순간적으로 뒤로 젖혀졌다. 브라인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엄청난 속도였다.
“아저씨!”
오른쪽에서 캐비닛이 튀어나왔다.
방해하려는 게 분명했다.
“우리 할멈께서 화가 좀 나셨나 보네.”
칼리고가 가볍게 뛰어올랐다. 발밑으로 온 캐비닛을 밟으며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곳에서도 캐비닛이 불쑥 솟아올랐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캐비닛으로 이루어진 벽이 세워졌다.
“거참!”
가하란은 목을 휘감은 팔에 힘을 꽉 줬다. 칼리고가 벽을 차면서 달렸다. 아주 잠깐이지만 몸이 수평으로 누웠다.
세상이 핑그르르 돌았다.
한 바퀴 회전하며 바닥으로 내려온 칼리고가 다시 발을 움직였다.
쿵, 쿵, 쿵!
비죽 솟은 캐비닛을 밟을 때마다 경쾌한 소리가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색 새의 울음이 들려왔다.
“저기네.”
칼리고가 몸을 날렸다. 문을 활짝 열며 뒤따라오는 캐비닛을 피하며, 회색 새가 맴돌고 있는 지면에 발을 댔다.
그와 동시에, 풍경이 바뀌었다.
검은 캐비닛과 책상, 휘날리는 털. 그리고 의자에 앉아 구시렁대는 브라인.
푸른 실선 안쪽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할멈. 격한 환영 인사 고마워요.”
“신은 대체 뭘하고 있는 걸까? 저 망할 주둥이를 안 잡아가고.”
“또 그러신다.”
가하란은 바닥으로 내려왔다.
얼떨떨했다. 이런 식으로도 도착할 수 있구나. 하늘을 휘젓던 회색 새가 입구 쪽으로 날아가더니, 이내 자취를 감췄다.
“저 망할 흉조를 잡아다가 닭장에 가뒀어야 했는데.”
“알베르트가 할멈 손에 잡히겠어요? 눈치가 몇 단인데.”
칼리고가 의자를 질질 끌어 브라인 옆에 두고 앉았다.
“가하란! 내가 이놈 막으라고 했지?”
브라인이 귀를 바짝 세우며 말했다. 가하란은 시선을 살며시 피했다.
“죄없는 애한테 왜 그래요. 가하란, 이 할머니는 내가 잘 달랠테니까 넌 나가봐.”
“여기 있으면 안 돼요?”
“어른들끼리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아저씨 말 들어줄 거지?”
가하란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브라인을 바라봤다. 대령이 돌아가라는 손짓을 했다.
“금방 끝나니까 밖에서 기다려. 아저씨랑 또 놀자.”
“네, 그럴게요.”
방해해선 안 될 분위기였다. 가하란은 책상을 끼고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을 잠시 지켜보다가 몸을 돌렸다.
* * *
“둔에 이상한 것들이 들어온 거 같아요.”
“이상한 게 한둘이어야지.”
“좀 알려줄 수 없어요? 할멈이라면 알고 있을 거 같은데.”
브라인은 길게 뻗은 수염을 매만졌다.
“그 대가는 네 녀석의 눈알인데, 어때? 들어볼 거야?”
“알겠어요. 농담도 못 하겠네.”
브라인은 손가락을 튕겼다. 녀석이 요구한 정보는 최근 목격된 사교도 목록이었다.
“이게 전부예요?”
“근래에 뭐가 없었으니까.”
파일 한 개를 열심히 들추던 칼리고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건질 만한 게 없네요.”
“다 봤지? 봤으면 얼른 가.”
“올 때마다 가라고 보채면 서운해요.”
칼리고가 시선을 내리깔고 팔짱을 꼈다. 몸을 앞뒤로 움직이며 잠깐 침묵하던 녀석이 머뭇거리며 바라본다.
머뭇거림. 이 녀석하고 정말 안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브라인은 귀를 열었다.
“브라인 님. 정말로 개입할 생각이 없으신가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