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근사치는 나왔어. 소모효율은 다시 확인해 봐야겠지만, 일단은 성공이라 생각하자.”
덴스는 올란트에게 앉으라고 말한 후 주전자를 들었다. 열기를 머금은 백탄 위에 주전자를 올리고 찻잎이 담긴 병들을 살폈다.
“난 차 마실 건데, 넌 커피로 줄까?”
“저도 커피보단 차가 당기네요. 요 며칠 커피를 입에 달고 살았더니 당분간은 쳐다보기도 싫습니다.”
올란트가 눈 사이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며 답했다. 꽤 피곤해 보인다.
“집에 가서 잠 좀 자라니까. 가하란 혼자 두는 거 불안하지도 않아?”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요. 그리고 랩 전원이 매달리는 사안인데 혼자 빠질 순 없죠. 제 아들놈도 이해해 줄 겁니다.”
“일곱 살짜리 애한테 이해를 바란다라.”
“제가 좀 못난 아빠인가 봅니다.”
다른 놈이 이런 말을 했다면 무책임한 부모라고 한 소리 했겠지만, 올란트와 가하란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걔가 찾아와서 얼굴은 보니까요. 저 없어도 아주 빤질빤질 여기저기 잘 돌아다녀요.”
“소문이 자자해. 특무대령이 키우는 작은 악마가 군부를 들쑤시고 다닌다고.”
“그렇게 소문이 났어요?”
소리 내서 웃는 올란트였다.
덴스는 바글바글 끓는 물을 찻잔에 따르며 바깥을 살폈다. 연결선 정리를 끝낸 연구원들이 바닥에 누워 있었다. 앓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쟤들도 신경 써줘야 하는데.”
“몸은 힘들지만 기분은 날아다닐 겁니다. 합심해서 정립한 가설이 형태를 갖춰가고 있잖아요.”
“합심했다고 하기엔 한 명의 공로가 너무 큰데?”
덴스는 찻잔을 올란트에게 내밀었다. 말린 살구에 향을 가미한 것인데, 피곤할 때 마시기 좋은 차였다.
“잘 마실게요.”
올란트가 한 모금 마시더니 빙긋 웃었다.
“좋네요. 선배의 차 고르는 솜씨는 보통이 아니에요.”
“매일 골방에 박혀서 저거하고 씨름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취미가 생기지.”
저거, 덴스는 유사 정령을 바라 봤다.
“이론의 방향성을 찾았어. 네 덕분이다.”
“공치사는 다 끝난 다음에 해요. 그리고 방향성이라 할 것도 없어요. 선배의 사고실험에서 시작된 공식이 기저에 없었다면, 아무것도 못 했을 테니까요. 그러니 제 덕이란 말씀은 마세요.”
“말이라도 그렇게 해줘서 고맙다.”
덴스는 올란트 옆에 앉았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충족감인가. 공식에 매몰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마침내 빛을 발견했다.
첫걸음을 떼는 게 어려울 뿐, 움직이기 시작하면 남은 건 실험의 반복이었다.
연산하고 작동시키고 보완해서 재실험. 고된 작업이지만 수없이 해온 작업이기도 했다.
지루함을 절친한 벗 삼아 하루하루 반복하다 보면 완전무결한 공식에 도달할 것이다.
“결과치가 계속 좋게 나오면 격납고에 있는 실험기에 도입해볼 수 있겠죠?”
올란트가 질문했다.
“지금 이 상태로도 적용할 수 있어. 실험기는 그러라고 있는 거니까.”
“기체에 부담이 가지 않을까요? 특히나 마력선이요. 연산체계를 바꾸면 꼬임이 발생할 텐데요.”
“그걸 바로 잡고 고치는 게 우리 일이니까. 어쩔 수 없지. 시도하지 않으면 결과는 나오지 않아.”
올란트가 끙 소리를 내며 발을 쭉 폈다.
“탑승자한테 문제가 생기진 않겠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필렌 경이야. 우리가 걱정해야 할 건 그분의 안전이 아니라 시스템의 완성도지. 너도 곧 만나 보겠지만, 보통 까다로운 분이 아니거든.”
덴스는 기술자만큼이나 거병에 빠삭한 필렌을 떠올렸다.
“어정쩡한 물건을 가져가면 되레 잔소리를 들을 거다. 위험해도 좋으니 획기적인 걸 내놓으라면서.”
“그런 소리를 안 들으려면 좀 더 수정해야겠네요.”
“더 손댈 곳이 있을까?”
“몇 군데 생각해둔 곳이 있긴 해요.”
올란트가 의자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철퍼덕 앉아 다리를 쭉 폈다.
덴스도 그 옆에 자리했다.
“의자에 앉아 계시지.”
“허리 아파서 싫어. 나도 좀 기대자.”
책장에 몸을 기댔다. 좀 살 것 같았다.
“이러다 형수님한테 제가 혼나는 거 아니에요? 선배 몸 망가트린다고.”
“잡아도 날 잡겠지. 팀원들 그만 괴롭히라고. 그나저나 집사람이 또 언제 오냐고 묻던데.”
“저번 주에 갔던 건 기억하시죠? 저녁도 배불리 얻어먹었고.”
“네가 마음에 들었나 봐. 우리 딸도 널 좋아하고.”
“그래요? 저녁 먹을 때 몇 번 말을 걸었는데, 계속 눈을 피해서 어려워하는 줄 알았는데.”
“부끄러웠나 봐. 유단한테는 금방 마음을 열었는데. 하긴, 나이가 비슷해야 편하긴 하지.”
“그렇죠.”
덴스는 올란트를 슬쩍 보며 물었다.
“그래서 어딜 손보면 될 것 같은데?”
“베이스는 어차피 저희가 못 건드리잖아요.”
덴스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모든 오토마타는 ‘최초의 오토마타’를 베이스로 제작되었다.
언제,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가공된 강철 뇌.
인간을 비롯한 다양한 종족이 최초의 오토마타를 분석하고 이해하려 했지만, 형태를 본떠 만든 아류작만 생산해냈을 뿐이다.
“근데 웃겨요. 정확한 작동 원리는 모르지만, 우린 그걸 이용해 거병을 움직이잖아요.”
“생명의 탄생 원리를 이해 못 하지만, 이해 못 한다고 해서 애를 못 낳는 건 아니니까. 이해와 이용은 별개의 문제지.”
“난해하네요.”
“시답잖은 얘기는 그만하고, 어딜 손봐야 할 것 같은지나 말해봐.”
“휴게실에서는 일 얘기 금지 아니었나요?”
“서두는 네가 뗐어. 문장을 시작했으면 마침표는 찍어야지.”
덴스는 차를 마시며 올란트의 말을 기다렸다. 후배의 색다른 관점은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번에도 놀랄 만한 단서를 찾아낸 게 아닐까?
“유사 정령의 C섹션 하부 파트요. 거기 3중첩 마력선을 손보는 거 어떨까요?”
“거기라면 액상근육의 순환을 담당하는 곳이잖아?”
“네.”
“거기 손대는 건 어려운데. 너도 이제는 알겠지만, 그 파트는 원형에 한없이 가까워. 함부로 손댔다가는 액상근육이 역류해 버리니 어쩔 수 없지.”
최초의 오토마타를 이해하진 못했지만, 지상의 지성체들도 손가락만 빨며 놀지는 않았다.
개량의 개량을 거쳐 현세대에 도달한 오토마타는 최초의 오토마타를 압도하는 연산 속도를 지니게 됐다.
눈부신 발전이었다.
그럼에도 몇몇 파트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손을 대기만 하면 수습할 수 없는 문제가 뒤따랐기 때문이다.
덴스는 못을 좌우로 꺾은 다음 말했다.
“미세 조정할 때도 정말 세밀하게 건드리는 곳이야. 아니면 아예 최초 공정 값을 유지하거나.”
“그렇기에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나요?”
“거기 잘못 만지면 기존 마력선도 죄다 꼬일 수 있다는 거 알지?”
“알죠.”
“그거 복구하려면 다시 일주일은 철야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그럼요.”
“그럼에도 하자는 거지?”
“이럴 땐 책임자가 따로 있다는 게 좋아요. 밑의 사람은 질러놓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니까.”
올란트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덴스는 주먹으로 후배의 팔뚝을 가볍게 쳤다.
“그래. 랩을 열었으면 책임을 지긴 해야지.”
C섹션 하부파트 3중섭 마력선.
내버려 두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파트라 생각조차 못 했다.
일손이 부족하면 노동력을 고용하는 게 일반적인 사고였다. 지금 올란트는 일손이 모자라니 어깨에 팔 한 짝씩을 더 달자고 말하는 거였다.
기괴한 논리였다.
그럼에도 해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3중첩 마력선을 어떻게 해보고 싶은데?”
“새로운 레이어를 덧대 마력선을 추가해 보려고요.”
“줄이는 게 아니라 증가시킨다고? 소모량이 늘 텐데.”
“신호전달 명령체계의 부담을 덜어내는 거예요. 기동 후 얼마간은 괜찮지만, 장시간 기동 시 액상근육 순환 관리에 들어가는 마나가 많아지잖아요.”
“그렇지.”
“보조 연산식을 덧대서 탑승자의 사용패턴을 학습시키는 거예요. 단기간에는 별 성과가 없겠지만, 계속 반복하다 보면 일정한 패턴이 보이겠죠.”
“거병 기사들의 행동양식에는 어느 정도 일관성이 있으니까.”
덴스는 턱을 쓰다듬었다. 올란트가 뭘 말하고 싶은지 감이 왔다.
“보조 연산식 회로가 기본적인 순환 루트를 계속 담당하는 거예요. 복잡한 연산은 물론 못 하겠죠.”
“기체의 출력이 순간적으로 오르는 상황에서는 오토마타가 메인을 담당하다가….”
“다시 보조 연산식이 순환을 관리하는 거죠. 액상근육을 관리하는데 오토마타의 자원이 꽤 소모되잖아요? 그걸 도와준다면 마나 효율을 좀 더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올란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은 가설이에요. 아니, 가설이라 부르기조차 민망하죠. 덧댔는데 마나 효율이 높아지기는커녕, 선배의 말대로 소모값만 커질 수도 있어요.”
“아니야. 해볼 가치는 충분해. 단지, 그런 식으로 연산체계를 잡으면 탑승자에 따라 기체 효율이 달라지겠어.”
“연산식의 학습 속도에 따라서도 갈리겠죠.”
“이건 인형으로 실험해봤자 나오는 게 없겠네. 탑승자의 행동패턴이 필요하니까.”
찻잔 안에 든 살구를 어금니에 올려두고 씹었다. 맛과 향이 다 우러나 질겅거리기만 하지만, 나름 씹는 맛은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며 눈 사이를 누르고 있을 때였다. 휴게실 문이 열렸다.
“여기 무슨 언데드 소굴입니까? 다들 기어다니…… 아이구, 두 분 괜찮은 거 맞죠?”
비일이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
덴스는 올란트를 보며 미소 지었다. 올란트 역시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쟤가 있었지. 한동안 안 보여서 잊고 있었네.”
“그러게요. 우리한테 딱 알맞은 인재상이에요.”
덴스는 비일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비일이 떨떠름한 표정을 하며 입을 열었다.
“방금 제가 도매가로 팔린 듯한 기분이 드는데, 착각이겠죠?”
“우리가 널 얼마나 아끼는데. 그보다 생도들 훈련은?”
“잠깐 짬이 나서 빠져나왔죠. 사실 제가 할 일이 별로 없어요. 민 교수님께서 다 하시거든요.”
스콜라의 우등교관이자 동시에 둔 관리국의 교수인 여자.
사람은 참 좋은데, 본인의 능력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높았다.
민 교수 밑에서 일하다가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 수레로 몇 대는 되지.
“민 교수님이 사람은 좋지, 사람은.”
“예. 참 좋으신 분이죠. 부하가 아닌 동료로서 보면. 제가 그분 밑에서 배웠으면 사흘 만에 도망쳤을 겁니다.”
“사흘씩이나?”
비일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놀러왔는데 놀 분위기가 아니네요. 그러면 전 이만….”
덴스는 올란트에게 눈짓을 주었다. 올란트가 기어가서 비일의 발목을 붙잡았다.
“왜, 왜 이러세요. 형님.”
“동생. 좀 놀다가.”
“예?”
“인형 놀이 좀 하다가 가.”
비일이 고개를 슬며시 돌린다. 밖에 있는 유사 정령과 거기에 연결된 인형을 보고 있으리라.
“저거 재미없는데. 따끔거리고.”
“그러니까.”
“저 바쁩니다.”
“할 일 없다며.”
“형님, 아니, 치프님.”
덴스는 휴게실 창에 대고 소리쳤다.
“자 다들 일어나! 실험체 왔다! 인형 대신 연결하고 45회 차 수치로 조정한 다음 재실험할 거야.”
“예.”
나자빠져 있던 연구원들이 비틀비틀 일어나 유사 정령을 세팅했다.
덴스는 비일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어차피 내가 요청하면 이쪽으로 와야 하잖아. 공문 띄우게 하지 말고 잘 놀다 가자.”
“…이 랩은 참 삭막하네요.”
“괜찮아. 너도 곧 우리 소속이 될 거니까. 그러면 안 삭막할 거야.”
비일을 데리고 연구실 중앙으로 갔다.
쉴 만큼 쉬었으니, 다시 시작할 시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