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138화 (111/558)

제138화

“숫자요? 더하고 빼는 건 할 줄 알아요.”

“그래? 그러면 아저씨 좀 도와주라.”

지켜보던 셀베이아가 한마디 했다.

“도움 같은 거 필요 없으시잖아요.”

“늙어서 그런지 머리가 잘 안 돌아가네요. 그나저나 셀베이아 씨.”

“네?”

“말 걸기가 편해졌어요.”

“그게 무슨….”

“지난 몇 년간 셀베이아 씨가 저한테 한 말이라고는 ‘안녕하세요’, ‘서류입니다’, ‘고생하세요’ 이게 끝이에요. 근데 오늘은 다른 말도 해주네요. 이런 말이 실례일 수도 있지만, 예전보다 보기 좋아요.”

가하란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누나가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 덕분에 낯가림이 조금은 사라졌거든요.”

“그전에도 낯을 가리는 성격은 아니셨는데. 절 어찌나 냉담하게 바라보시던지.”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원래 좀 무뚝뚝해서 그렇지.”

무슨 얘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누나가 기분 좋게 웃고 있으니 덩달아 좋아졌다.

“꼬마야. 일단 이것부터 봐볼래?”

가르고르가 가하란을 번쩍 들어 올려 의자에 앉혔다. 가하란은 기대에 찬 눈으로 눈앞에 놓인 종이 더미를 바라봤다.

빼곡히 들어찬 네모난 칸 안에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반듯하게 쓴 숫자를 살피면서 가르고르에게 물었다.

“여기 적힌 숫자들이 다 돈인가요?”

“그래. 다 돈이지.”

“동화인가요?”

“이쪽은 동화. 저쪽은 은화. 금화는 여기.”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해지는 금액이었다.

“이렇게 많은 돈을 다 어디다 써요?”

“이건 중앙부에서 쓴 식료품비다. 둔 주둔군뿐만 아니라 아웃라인 밖 주둔지에서 사용한 돈까지 모두 포함됐지.”

“밥 먹는데도 이렇게 많이 드네요.”

“밥만큼 중요한 게 없으니까.”

가르고르가 희한하게 생긴 물건을 책상에 올렸다. 네모난 판 안에 반들반들한 돌 같은 게 일렬로 놓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꼬챙이에 꿰어 있어 위아래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다.

“주산할 줄 아냐?”

“그게 뭔데요?”

“주판으로 계산하는 거. 주산을 모르니 주판도 처음 보겠네.”

“네. 이런 거 처음 봐요.”

가르고르가 엄지와 검지를 움직여 주판 안의 돌들을 움직였다. 가하란은 위아래로 움직이는 돌의 움직임을 자세히 살폈다.

“계산을 도와주는 도구야. 여기서 해야 할 일의 절반이 숫자를 더하고 빼는 거거든. 저쪽에 앉아 있는 친구들이 그걸 전담하고 있고.”

가르고르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퀭한 얼굴로 주판을 튕기고 펜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툭 건드리면 쓰러질 것 같다.

“저분들 괜찮은 거죠?”

“바쁠 땐 어쩔 수 없지.”

별일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웃어넘기는 가르고르였다. 이 아저씨, 왠지 무섭다.

“아무튼 이 아저씨가 하는 건 이런 재미없는 일이야. 자, 이거 받아라.”

가르고르가 사탕 한 알을 넘겨주었다. 가하란은 항상 들고 다니는 간식 주머니에 그것을 넣었다.

“셀베이아 씨. 확인서는 모레쯤 보낼 테니까 그만 가보셔도 됩니다.”

“예. 대령님께 그렇게 전할게요.”

잘 가라며 손을 흔드는 가르고르였다. 가하란은 주판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이거 어떻게 쓰는 건지 보고 가도 돼요?”

“그거야 상관없지만, 너 여기 있어도 괜찮은 거냐? 듣기론 특무대령님이 이것저것 시킨다고 하던데.”

가하란은 몸을 돌려 셀베이아에게 시선을 던졌다.

“누나. 오늘 바빠요? 저 이거 배우고 싶은데.”

“오늘은 이걸로 끝이야. 점심 전에는 돌아가야 하지만, 아직 시간이 있고.”

“그러면 더 있어도 되는 거죠?”

“그건 내가 아니라 사무처장님의 허락이 필요한데.”

그 말에 가하란은 책상 끝자락을 붙들며 말했다.

“더 있어도 되나요?”

가르고르가 하하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봐도 별 재미는 없을 거다.”

“아니에요. 처음 보는 건 다 재미있어요.”

“네 나이 때가 호기심이 가장 왕성할 때지. 우리 딸도 너만 했을 때는 아빠, 아빠 하면서 그렇게 찾았는데 다 커서 결혼하고 난 뒤에는 연락도 없고….”

푸념한 뒤 입맛을 다시던 가르고르가 셀베이아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이것만 얼른 정리하고 기본적인 주산을 알려주마.”

가르고르가 주판을 앞으로 가져오며 말했다.

* * *

올해도 여지없이 정정 요청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게 미리미리 좀 정리해뒀어야지, 쯧.

가르고르는 주판알을 정리한 후 펜을 들었다. 결재란에 사인한 다음 서류철에 끼워 넣었다.

이걸로 급한 불은 껐다. 남은 건 얼굴에 철판 깔고 들이미는 각 부처의 실권자들을 상대하는 것뿐.

목을 살짝 꺾으며 옆을 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가하란과 셀베이아가 눈에 들어왔다.

숫자와 씨름하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입 닫고 있었니?”

“15분 정도요.”

가하란이 대답했다.

“미안하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건이라 아저씨가 너를 깜빡 잊고 있었네.”

“아니에요. 계산하는 거 보느라 저도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그래?”

저만한 나이 때는 가만히 앉아서 5분도 못 버티는데, 말없이 15분을 집중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요즘 애들은 조숙하다더니, 정말 그런가?

“그러면 주판 사용법을 간단하게 알려줄까?”

“아니요. 그건 저도 알아요.”

“알아? 아까는 배운 적 없다며.”

“아저씨가 하는 거 보면서 알게 됐어요.”

잘난 척하려고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고, 가르고르는 주판을 옆으로 밀었다.

“그러면 이거 한번 더해 볼래?”

종이에 숫자를 기입했다. 세 자리 숫자. 자리 올림까지 이해한 건지 보고 싶었다.

자그마한 손이 주판알을 튕겼다.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이 어색하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가하란이 계산을 금방 끝내고 또랑또랑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제대로 한 건가요?”

“…그래. 잘했네.”

주산은 단순하고 편리하다. 직관적인 돌의 움직임이 숫자를 대변하니까.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어깨 너머 곁눈질한 것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것도 한번 해볼래?”

네 자리 숫자를 다섯 개 늘어놓았다. 숫자를 본 가하란이 주판에 손가락을 올렸다. 손가락에 따라 주판알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거요.”

이번에도 정답이었다. 단순한 덧셈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깨달은 것 같았다.

“곱셈 한번 배워볼래?”

“네!”

“요건 조금 까다로워. 자릿수 계산이 좀 다르거든.”

가르치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작은 꼬맹이가 얼마나 빨리 습득할지는 궁금했다.

“아까처럼 일단 봐라. 이해할 수 있으면 설명은 불필요하니까.”

* * *

“여기요.”

가하란이 주판에서 손을 뗐다. 몰려든 사람들이 싱글벙글 웃으며 손뼉을 쳤다.

“제대로 하네.”

“그러게요.”

셀베이아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언제부터였더라? 재정처 관료들이 슬금슬금 가하란 곁으로 모여들더니, 펜을 놓고 구경을 시작했다.

들어올 때만 해도 시장통처럼 시끄러웠는데 지금은 다들 입을 닫고 가하란의 손가락만 보고 있었다.

웃긴 건 항의하러 온 다른 부처 군인들도 가하란을 구경 중이라는 점이다.

“처장님. 이거 한번 시켜보죠?”

종이 한 장을 가져와 내미는 남자였다. 셀베이아는 슬쩍 내용을 보았다.

숫자들이 일렬로 죽 늘어서 있었다. 십만 단위를 넘는 숫자들이었다.

“이걸 다 더하면 되는 건가요?”

가하란이 주판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주판에 손을 대지 않고 허공에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뭘 하는 걸까?

몇 초 지나지 않아 가하란이 숫자를 내놓았다. 셀베이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계산이 이렇게 빠르다고?

“정확한데요. 게다가 벌써 암산으로 하고.”

“주판이 작은 것 같아서 머릿속으로 그려봤어요. 돌을 금방금방 움직일 수 있어서 편해요.”

뭐가 그리 좋은지 해맑게 웃는 가하란이었다.

셀베이아는 요 몇 주 동안 가하란과 같이 다니면서 저 표정을 수도 없이 보았다.

가하란은 결과물보다 과정을 즐기는 애였다. 답이 안 나와도 실망하는 법이 없으며, 실수해도 토라지지 않고 문제와 다시 마주했다.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 부딪치고 보는 자세도 변함이 없었다.

저 순진해 보이는 눈동자 안에 가득 차 있는 건 끝을 모르는 도전욕구였다.

때문에 가하란을 기꺼이 반기는 관료가 있는가 하면, 마주치면 인사만 얼른 하고 돌아서는 관료도 많았다.

아니지. 특무대령이란 배경이 없었다면 열에 아홉은 가하란을 쫓아내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지금도 심심치 않게 이런 얘기가 들려왔다.

브라인 특무대령이 작은 브라인을 데려왔다고.

옆에서 지켜본바, 둘을 동일선상에 놓는 건 불합리했다. 대령님은 이유도 없이 생떼 부릴 때가 많았고, 가하란이 귀여운 집착을 보일 땐 이유가 분명했다.

‘……아!’

둘 다 귀찮다는 점에서는 동일한가?

셀베이아는 가하란에게 다가가 눈짓을 주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다음에 다시 와도 되나요?”

가하란이 눈을 별처럼 반짝이며 가르고르에게 물었다. 가르고르는 언제든 환영이라며, 다음에 올 땐 일거리를 주겠다고 말했다.

가하란이 손을 흔들며 재정처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시끄러워졌다.

셀베이아는 고개를 저으며 가하란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늦으면 대령님이 배고프다고 울지도 모르니까.”

“얼른 가요.”

방긋 웃는 가하란을 데리고 별관을 벗어났다.

* * *

“손실치는 어때?”

“48회 차와 비교하면 눈에 띄게 낮아졌습니다. 분당 소모량 3.8입니다.”

“…말도 안 되게 좋아졌어.”

덴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앞에 놓인 유사 정령을 보았다.

희미하게 빛나는 보랏빛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시계를 보며 기록판에 펜을 댔다.

15초, 16초, 17초, 18초.

“기록 경신입니다.”

“잔량은?”

“17입니다. 교수님!”

주변을 둘러싼 연구원들의 얼굴이 환희로 물들었다. 덴스도 연구복을 벗어 던지며 탄성을 내지르고 싶었지만, 아직 축배를 들 순 없었다.

“인지통합 시퀸스는?”

“3단계 유지 중입니다.”

마력선 얽힘이 없었다. 마나 이동도 순조로웠다. 감각 확장 역시 제동이 걸리지 않았다.

유사 정령은 완벽하게 기동 중이었다. 그것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마나로.

“교수님, 감각 확장 감도가 떨어집니다.”

인형을 살피며 수치를 점검하던 연구원이 아쉬운 목소리를 꺼냈다.

덴스는 인형 쪽으로 걸어갔다. 연구원의 시그니처로 가시화된 숫자들이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인형의 오른팔을 눌렀다.

그 순간 인지통합이 끊기며 인형과 유사 정령의 커넥트 라인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액상근육의 활성도가 떨어진 것이다.

“실험 종료.”

아쉽지만 실패는 아니었다. 되려 훌륭한 성과였다. 마지막 한고비를 넘지 못했으나, 어쨌든 정산 직전까지 간 것이다.

가시적인 성과였다.

“수고들 했어. 일단 정리하고….”

덴스는 연구원 틈에 서 있는 올란트를 보았다.

이 정도일 줄이야.

싹수는 보였다. 마력선을 잡아내는 센스에 기대를 걸고 치프로 영입했는데, 예상외의 결과물을 가져다주었다.

쇠를 주무르는 실력이야 제철소 내에서도 으뜸이었지만, 설마 이론공학인 마력선까지 재능을 보일 줄이야.

정말 다행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이 빛나는 천재는 다른 사람 손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즐거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왜 이리 답답한 것일까.

덴스는 그 이유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유치한 질투. 설마 교수직을 달고서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이야.

“선배.”

올란트가 다가왔다. 덴스는 웃으면서 휴게실 쪽으로 눈짓을 보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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