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화
“여기가 제1별관.”
셀베이아가 상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가하란은 턱을 살짝 들어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기록보관서가 있는 중앙부를 나와 짧은 가로수 길을 지나 도착한 곳.
저번에 봤던 제3별관보다 훨씬 오래돼 보였다. 아니, 중앙부보다도 옛날에 지어진 것 같았다.
“낡았지?”
“네.”
“나도 들은 건데, 이 건물이 원래 군부 중앙부였대. 도시건설 계획이 제 궤도에 올랐을 때 가장 먼저 지은 건물이라나.”
“금방 무너질 것 같아요.”
입구 왼쪽 벽에서 돌가루 같은 게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셀베이아가 상자를 들며 말했다.
“보기보다 튼튼해. 기록에 의하면 60년 전에 큰 지진이 왔을 때도 이 건물은 큰 균열 없이 버텨냈다고 하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바빠 보이는 사람들이 허둥대며 복도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가하란은 벽에 딱 붙어 사람들을 피했다.
“오늘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반기 결산.”
“그게 뭐예요?”
“책임을 남한테 미루는 날.”
셀베이아가 싱긋 웃으며 ‘재정처’라 쓰인 명패 앞에 섰다.
“문 좀 열어줄래?”
가하란은 손을 머리 위로 뻗어 문손잡이를 돌렸다. 처음에는 문고리를 돌려서 연다는 게 어색했지만, 셀베이아와 군부를 돌아다니다 보니 손에 익었다.
“결산서는 6월분까지라니까 왜 한 달분을 빼먹고 지금 와서 이럽니까?”
이건 오른편에 있는 남자가.
“누락된 건 정정 기간에 하시라고요. 지금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고요.”
이건 그 앞에 있는 사람이.
“당신 상관 들먹이지 말고! 정 억울하면 총사령님께 이 서류 들고 같이 가든가!”
이건 왼쪽에 앉아 있는 여자가.
와, 가하란은 입을 살짝 벌린 채 눈앞의 상황을 지켜봤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시끄러웠다. 책상마다 사람이 둘씩 붙어 있는데, 주판을 두드리는 사람은 침착했고 서류를 들이미는 사람은 목에 핏줄을 세웠다.
“이번 한 번만 해주세요. 이거 행정처랑 얘기된 거라 넘기면 된다니까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 얘기됐다는 행정처 관료를 제 앞으로 데려오시라고요. 그 사람을 보증 세우면 결재서 올린다니까요?”
“일정이 안 맞아서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합니까.”
“저도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해야 합니까?”
바로 옆 책상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금방이라도 멱살을 쥘 것처럼 노려보던 남자가 이내 간절한 어조로 사정했다.
“제발 이번 한 번만 넘어가 주세요. 이거 못 올리면 저 죽습니다.”
“예, 이거 올리면 그쪽은 살겠지만 제가 죽어요.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필요서류를 구비해서 다시 오든, 아니면 그 보증인을 데려오든 둘 중 하나를 하세요.”
연신 부탁하던 남자가 군모를 움켜쥐며 일어섰다. 씩씩거리며 문을 쾅 닫고 나가는데,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다들 왜 이러는 거예요?”
가하란은 화가 잔뜩 난 사람들을 보며 물었다. 셀베이아가 속삭이듯 말했다.
“말했지? 책임을 미루는 날이라고. 군부도 사람 사는 곳이고, 사람 사는 곳이면 돈이 들기 마련이잖아?”
“네.”
“돈이 필요하니 돈을 달라고 해야 하는데, 아무런 근거 없이 돈을 달라고 할 수는 없겠지?”
“맞아요. 아빠도 그랬어요. 돈을 빌려줄 때는 액수도 중요하지만 어디에 쓸 건지도 중요하다고.”
“바로 그거야. 우리가 이러이러한 이유로 이만큼의 돈이 필요하니 주세요, 라고 해마다 계획을 짜. 그리고 반기마다 그 계획대로 돈을 잘 쓰고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해. 이건 법으로 정해진 거라 군부에 속한 부처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고.”
가하란은 성질내는 군인들을 보며 말했다.
“그러면 저렇게 화내는 이유는….”
“사람 일이라는 게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거든. 무슨 말인지 이해해?”
“네. 형하고 놀러 나가기로 한 날에는 꼭 비가 와요. 그래서 계획은 그때그때 바뀌어요.”
“바로 그거야. 근데 이곳에는 정해진 틀이 있어서 멋대로 바꿀 수가 없어. 그래서 서로 된다, 안 된다 화를 내며 싸우는 거고. 돈 문제가 얼마나 무서운 문제인지 잘 알고 있지?”
“네. 엄청 잘 알아요.”
셀베이아가 상자를 들고 창가 쪽 책상으로 걸어갔다.
쉰 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있는데, 이 방에서 유일하게 여유를 만끽 중이었다.
의자에 기댄 몸과 활짝 펼친 신문, 그리고 고풍스러운 찻잔.
가하란은 뒤쪽을 보았다. 왼팔에 흰 띠를 차고 주판을 두드리는 사람들과 그 앞에 앉아 연신 설명하는 사람들.
앞에 있는 남자 역시 왼팔에 힌 띠를 차고 있었다. 왜 이 아저씨만 한가로운 거지? 일을 다 한 건가?
“저 왔….”
셀베이아가 창가에 있는 남자에게 말을 걸 때였다.
뒤에서 급하게 달려온 여자가 서류를 던지다시피 책상에 내려놓았다.
여자에게 치인 셀베이아가 뒤로 밀려났다.
가하란은 걱정이 돼 바라봤지만, 셀베이아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차분한 얼굴로 옷에 잡힌 주름을 털어낼 뿐이었다.
“가르고르 씨! 이거, 이거 왜 반려된 겁니까?”
여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어찌나 큰지 방 안 사람들이 일시에 침묵하고 이쪽을 바라볼 정도였다.
신문을 훑던 남자가 입을 씰룩거렸다.
“왜 반려됐겠어요? 안 되는 거니까 돌려보낸 거지. 그리고 목소리 낮춰주세요. 여기 혼자 쓰는 곳 아닙니다.”
탁한 목소리를 느긋하게 내놓는 가르고르였다. 하지만 여자는 크고 날카로운 음성을 뽑아냈다.
“작년에 올린 예산안하고 다를 게 없어요.”
“다를 게 없으면 그 서류가 위로 올라갔겠죠.”
가르고르가 서류를 들어 올린 다음 손가락으로 몇 군데를 가리켰다.
“이거하고 이거 보이시죠? 예산이 집행된 건 이 항목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멋대로 변경안을 끼워 넣고 결산을 진행합니까?”
“비용 처리는 같았어요. 물자도 잘 들어왔고요.”
“성격이 바뀌었잖아요. 거래의 성격이.”
“이 정도는 넘어가 줘야죠. 결산서에 숫자 동화 단위까지 모두 맞춰서 올리라는 것과 뭐가 달라요. 어느 정도는 감안해 주셔야 해요.”
여자가 책상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런 행정 처리는 성도 군부에서나 통하던 거죠. 오신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시겠지만, 여긴 액수 맞추는 것보다 의도를 더 중요시합니다. 둔은 그런 곳이에요.”
“저기요.”
가르고르가 눈웃음 지으며 고개를 살짝 털었다.
“‘저기요’가 아니라 가르고르. 아니면 사무처장. 님이나 씨는 바라지도 않아요.”
“…사무처장님. 이거 다른 곳도 아니고 수석부관실 예산안이에요.”
“알죠.”
“저랑 입씨름해 봤자 처장님만 귀찮아지잖아요. 안 그래요?”
“제가 왜 귀찮아집니까?”
“당연히 총사령관님께서….”
여자는 말을 끝맺지 않고 눈짓을 주었다. 가르고르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서류를 쥐었다.
“그 뜻 잘 알겠습니다.”
서류가 반으로 접혀 책상 옆 휴지통으로 들어갔다. 여자가 기가 찬다는 얼굴로 한마디 하려 할 때였다.
“그리고 먼저 오신 분이 계셔서요. 용무 끝났으면 비켜주시죠?”
가르고르가 셀베이아를 가리키며 웃었다. 여자가 휴지통에서 서류를 꺼내 다시 책상에 올려놨다.
“농담할 기분 아니에요. 이거 결재 안 나면 처장님도 고생하실 거예요.”
“말로 설명해 드렸는데도 이해를 못 하시네. 수석부관님의 안목이 이렇게 안 좋아지셨다니, 참 안타깝군요.”
가르고르가 서류를 반으로 찢어서 휴지통에 넣었다. 그러고는 발로 꾹꾹 밟은 뒤 그 위에 다른 쓰레기를 버렸다.
“이봐요!”
소리치는 여자 옆으로 셀베이아가 걸어갔다. 셀베이아는 어깨로 여자를 슬쩍 밀어내며 상자를 책상에 올렸다.
“오랜만이에요, 처장님.”
“자주 안 보는 게 좋죠. 우리 처에 자주 오면 뭔가 잘못됐다는 거니까.”
“그렇네요.”
가하란은 째려보는 여자를 흘깃 바라본 후 화기애애한 두 사람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괜찮은 거겠지?
금방이라도 싸움이 날 것 같았다.
여자가 셀베이아의 어깨를 잡아챘다.
“뭐 하는 거죠? 얘기 중인 거 안보여요?”
셀베이아가 여자 손을 떼어냈다.
“제가 먼저 왔어요.”
“그래요? 그렇다면 일단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새치기해서. 하지만 일에는 경중이라는 게 있잖아요? 내가 처리해야 하는 건 수석부관실 안건이에요. 그러니 잠깐만 기다려줄래요? 네?”
“그런가요?”
셀베이아가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섰다.
“그러면 마저 용무 보세요. 대신 제 상관께 일 처리가 늦어진 사유에 대해 전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요. 어느 부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록보관서요.”
“……어디요?”
“잘 들으셨잖아요. 기록보관서. 전 기다릴 테니 마저 일 보세요.”
셀베이아가 입을 꾹 닫으며 뒤로 다시 한 걸음 물러섰다.
기다렸다는 듯이 가르고르가 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어쩔 수 없이 부관실 걸 먼저 처리해 보죠. 결과야 달라질 게 없지만 삼십 분 정도 떠들어 봅시다. 아, 그동안 여기서 기다려야 하는데.”
가르고르의 눈짓을 받은 셀베이아가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어쩔 수 없죠. 대기할게요. 근데 대령님 식사가 조금 늦어지는 게 걱정되네요.”
“특무대령님께서 밥 좀 늦게 먹는다고 크게 문제 될 게 있나. 안 그래요?”
“그럼요. 점심이 조금 늦어진다고 해서 관계부처를 뒤엎겠어요, 아니면 관련자들을 싹 다 묶어다가 하늘로 던지겠어요? 아무리 막 나가는 분이라도 그 정도는 안 하겠죠.”
“그러고 보니 작년에 몇 미터까지 올라갔었죠?”
“관측 2과장님이 중앙부 옥상까지 던져졌으니, 꽤 높겠죠?”
가하란은 두 사람의 얘기를 들으며 작게 웃었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방 안 사람들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이따가 다시 올게요.”
여자가 휴지통을 들어 가슴에 품었다.
“어디 가십니까? 말씀 더 나누시지.”
가르고르가 붙들었지만, 여자는 뒤도 안 돌아보고 재정처를 빠져나갔다.
“성도 센터라인에서 삐끗하고 이쪽으로 온 사람인데, 아직 물이 덜 빠졌네.”
“저런 분도 있어야 군부가 덜 심심하죠.”
“맞는 말입니다.”
가르고르가 상자를 받아 책상 아래 두었다. 셀베이아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내용물 확인 안 하세요?”
“브라인 님이 틀렸다면 오히려 기쁠 겁니다. 살아생전 그분의 실수를 보게 되는 거니까.”
“숫자 계산은 워낙 철저하신 분이죠.”
가르고르의 눈동자가 가하란을 훑었다.
“옆에 있는 꼬마가 소문이 자자한 그 애입니까?”
“네.”
셀베이아의 눈짓에 가하란은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안녕하세요. 가하란이에요.”
“그래. 얘기 많이 들었다.”
가르고르가 내민 손을 두 손으로 맞잡았다.
손바닥은 매끈했으나, 검지 측면에 굳은살이 잔뜩 박여 있었다.
제철소에서 만난 아저씨들과는 또 다른 느낌의 손이다. 연구원 아저씨들과도 다르고.
“인수인계하는 겁니까?”
“처음에는 그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물류창고에 있는 친구가 이 아이 칭찬을 침이 마르도록 하더군요. 창고 정리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됐다고.”
가르고르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가까이 오라는 뜻 같았다. 가하란은 잰걸음으로 책상 곁으로 갔다.
빈 잉크병이 줄지어 있었다.
구부러지고 벌어진 펜촉과 옆면 칠이 다 벗겨진 만년필. 잉크 특유의 눅눅한 향이 진하게 풍겨왔다.
“너, 숫자 갖고 놀 줄 아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