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둘둘 만 신문을 펼쳤다. 볼품없는 머리기사를 훑은 후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실더령과 앙케령의 분쟁 이야기를 짤막하게 다루고 있었다.
흔해 빠진 영토 문제. 흥미를 끌 만한 사안은 아니었다.
첼은 커피잔에 손을 뻗었다. 둔에 와서 찾은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가 이 작은 카페의 커피였다.
커피콩을 어디서 조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성도의 유명한 카페와 견줘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였다.
향을 음미하고 한 모금 마셨다. 혀 위를 미끄러지는 커피는 오늘도 완벽했다.
가게 주인을 설득해 저택으로 데려가고 싶군, 그런 생각을 하며 잔을 내려놓을 때였다.
“여기 커피 맛이 아주 훌륭하죠.”
첼은 테이블 맞은편에 선 칼리고를 바라봤다.
“이곳만 한 곳이 없죠.”
신문을 접으며 자리를 권했다. 감찰단장이 고개를 짧게 숙이며 인사한 후 의자를 잡아당겼다.
“달이 바뀌었는데도 점심때가 돼가니까 조금 덥네요.”
“유독 올해 더위가 길게 가는 것 같습니다.”
작년 10월 1일은 꽤 쌀쌀했던 것 같은데, 첼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한번 쏟아져야 가을이 시작될 것 같았다.
“추천 커피 두 잔. 그리고 설탕을 많이 주세요.”
종업원에게 주문을 마친 칼리고가 앓는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켰다.
“잘 못 주무셨나 봅니다.”
첼이 넌지시 말했다.
“며칠 놀았더니 일거리가 잔뜩 쌓여 있더라고요.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제 몫이라면서 서류 더미를 계속 주던데, 어찌나 고맙던지.”
“좋은 부하를 두셨군요.”
“예. 너무 좋아서 알페시아에 가둬 버리고 싶을 정돕니다.”
종업원이 커피를 가져왔다. 설탕이 가득 든 통과 함께.
“저번에도 그렇게 드시더니.”
“머리가 안 돌아갈 때는 단걸 집어넣어야 그나마 낫더라고요.”
티스푼이 몇 번을 움직였는지 모른다. 저게 커피인지, 아니면 커피 향을 첨가한 설탕물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른 건 몰라도 식성은 참 안 맞는 거 같습니다.”
“그런 말 자주 듣습니다.”
단장이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보는 것만으로도 혀가 아려왔다. 첼은 고개를 슬며시 돌리며 식은 커피를 마셨다.
“모듈 탈취 건은 혐의 없음으로 종결됐고, 그 뒤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둔 군부와 관리국, 두 곳 모두 적당한 선에서 꼬리를 잘라버렸다. 정치계에서도 불만이 나오지 않을, 아주 무난한 판결이었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이 해결된 건 아니었다.
“노심초사하고 있을 황가와 의회를 위해 일단 성도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일단락됐으니 안심해도 된다는 소식을 곧 듣게 되겠죠.”
칼리고가 두 번째 커피잔을 몸 앞으로 가져왔다.
“정치권이 원하는 대답은 줬으니 이제 시간이 남아도는 저희가 뒤를 캐봐야죠.”
단장이 티스푼을 들어 올렸다.
“사교도로 의심되는 집단이 오래전부터 둔에 침투해 있었다는 가정하에 조사를 진행 중입니다.”
“뭔가 잡아낸 거라도….”
단장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감찰단 일을 해오면서 이번만큼 흥미로웠던 적이 없습니다. 너무나도, 정말 완벽하게 깨끗합니다. 군부 지하실에서 폭사한 용의자를 중심으로 주변을 수색하고 있는데, 아무것도 나오는 게 없어요.”
첼도 혀를 찼다.
“이쪽도 나름 조사를 진행 중인데, 건진 게 없습니다.”
“조사라면….”
칼리고의 시선이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하브와 루카에게 향했다.
“저 하브라는 친구가 맡았겠군요.”
“당장에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저 친구뿐이라서요. 감찰단원에 비하면 조금 모자라지만, 나름 괜찮은 친구입니다.”
“농담도 잘하십니다. 저 친구의 수완은 질리도록 들어왔습니다. 세나티아 의원께서 외부인을 총집사로 생각 중이라니, 이것만으로도 능력은 입증된 거죠.”
칼리고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얘기가 나온 김에 저 친구, 저 주시면 안 됩니까? 아시다시피 특수감찰단은 매번 인원 부족에 시달려서요.”
“염치없는 것도 병이라고 합니다.”
첼은 눈웃음 지으며 잔을 들었다.
“괜찮은 사람을 데려와야 저도 은퇴라는 걸 할 텐데, 이것 참 어렵네요.”
“그 자리에 앉을 사람이 있을까요?”
“있겠죠. 어딘가에는.”
칼리고가 손을 들었다. 다가온 종업원에게 쿠키를 주문했다. 첼도 커피를 한 잔 더 달라고 했다.
“중앙 성당에 알릴 겁니까?”
첼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사교회라면 눈을 뒤집고 들고 일어서는 게 성교회였다.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황가와 의회, 두 곳은 탐탁지 않아 하겠지만 어쩌겠습니까? 일손이 부족한데.”
“저희한테 먼저 언질을 주셨다면, 의회 쪽에서 힘을 보탰을 텐데요. 아쉽군요.”
칼리고가 앞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의회가 움직여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편하겠지만, 총집사님도 아시다시피 의회가 적극적이진 않을 테니까요.”
역시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감찰단장이었다.
성교회가 이 소식을 접하게 되면 물밑으로 사람을 풀 것이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사교도를 적극 이용해야 할 테니.
“지금쯤 만세를 부르고 있겠죠? 그 누구보다 사교도를 증오하지만, 사교도가 없으면 세력이 축소되는 곳이니까요. 황가와 의회를 발아래 두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이번 일에 사력을 다할 겁니다. 성도 쪽 조사는 그 양반들에게 맡기면 되겠죠.”
황가와 의회, 성교회의 눈치 싸움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듯 상쾌하게 웃는 칼리고였다.
인정해야 했다. 강심장도 저런 강심장이 없다는 걸. 턱밑에 칼날이 수십 개는 드리워졌을 텐데, 싱글벙글 웃는 것도 재능이었다.
“전 살짝 걱정이 됩니다. 단장님께서 아주 조용히 사라지게 될까 봐.”
“솔직히 지난 15년간 내심 기대했습니다. 언제쯤 암살을 시도할까, 하고. 근데 다들 얌전히 있더라고요. 똥은 더러워서 피한다는 속담을 제가 체험 중입니다.”
하핫, 쾌활하게 웃으면서 커피를 마시는 칼리고였다.
더러운 게 아니라 무서워서 피하는 거겠지. 첼은 단장의 상의를 바라보았다.
저 안주머니에 들어 있는 수첩이야말로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마법일 것이다.
권력가들의 입지를 단숨에 뒤흔들 수 있는 정보. 마법이란 단어 외에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성명도 없고, 종교적 위업을 달성한 것도 아닙니다. 대체 뭐였을까요?”
배후에 사교도가 있다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표면으로 드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식상하리만치 조용히 끝나버렸다.
“‘비로소 할 일을 마쳤으니, 나는 기쁜 마음으로 죽고 기다릴 뿐이다’.”
칼리고가 티스푼으로 커피를 저으며 말했다.
“용의자가 자폭하기 전에 남긴 말이군요.”
첼은 공식 문서를 떠올리며 말했다. 같은 말만 되풀이하던 용의자가 최후에 남긴 유언.
“군부에 피해를 주고 싶었다면, 사령관이 심문할 때 자폭했으면 됩니다. 근데 그 양반은 지하실 벽만 날려버리고 가버렸어요.”
칼리고가 진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만족한 얼굴이었어요. 그놈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무언가를 성공시킨 겁니다.”
“알지 못하는 무언가….”
첼은 심드렁한 어투로 말했다.
둔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거병관리국이 농락당하고, 몸뚱이라 할 수 있는 군부 역시 흠집이 났다.
그놈들이 얻어낸 건 무엇일까.
이것은 경고일까, 아니면 조롱일까.
“폐하께서 근심이 짙겠군요.”
첼은 성도가 있는 방향을 보며 말했다.
“걱정하시는 것치고는 입술 끝이 올라가 있습니다.”
“그렇게 보인다면 그런 거겠죠.”
“튤립 전쟁으로 시끌시끌하던 성도가 이제야 겨우 잠잠해졌는데… 다시 소란스러워지겠군요.”
“예, 누구 덕분에 그렇게 되겠죠.”
첼은 칼리고를 진득하게 바라봤다. 단장은 부끄럽다는 듯이 웃었다.
“며칠 전에 증손자분을 만났습니다.”
“가하란을 만나셨군요.”
“아주 똑 부러지던데요? 올란트의 어린 시절을 쏙 빼닮았습니다. 머리 회전도 빠르고, 눈치도 좋고.”
첼은 희미하게 웃으며 운을 뗐다.
“체스에 지셨나 보군요.”
칼리고가 기침을 연발했다. 정말로 놀랐다는 얼굴이다.
“그런 기괴한 소문은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그 정도야 쉽게 유추할 수 있죠. 올란트와 견줄 정도였으면 당연히 탐났을 것이고, 그 애한테 수작을 걸었겠죠. 과거에 손주 놈에게 처참하게 지셨으니 그날의 치욕을 떨쳐내고자 체스를 제안하셨을 테고….”
첼은 기분 좋게 웃으며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만약 이겼다면 제일 먼저 자랑하셨겠지만, 서두를 다르게 떼셨으니 진 거겠죠.”
“총집사님 앞에서는 뭔 말을 못 하겠습니다.”
“체스도 못 두시는 분이 왜 자꾸 체스에 욕심을 내는지 모르겠군요.”
단장이 얼굴을 잔뜩 구겼다.
속이 다 시원했다. 감찰단장을 놀릴 기회는 흔치 않았으니까.
“우연입니다, 우연.”
“체스에 우연이란 게 있던가요?”
“준 공께서도 절 인정하셨습니다. 꽤 둔다고.”
“시간 날 때마다 찾아와서 체스 좀 두자고 종일 떠들어대니 넌지시 한마디 해준 거겠죠.”
“…다음에 세나티아 가에 찾아갈 일이 생기면 넥타이를 매고 가겠습니다.”
“허허, 농담입니다.”
눈을 씰룩이던 단장도 실없는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자라난 아이 같았습니다. 아이의 순박함을 갖고 있으면서도 어른스러웠죠. 아니, 어지간한 어른보다 나을 겁니다.”
“손주 놈이 잘 키웠죠. 좀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긴 하지만, 제 손을 떠난 일이니 어쩔 수 없죠.”
“총집사님의 관점에선 애가 좀 무르긴 하죠. 근데 그 나이 때에는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세나티아 가를 뒷받침하려면 그런 성정으론 안 됩니다. 재교육이 필요하죠.”
“가하란을 두고 조손 간의 신경전이 대단하겠군요. 근데 그 애가 정치권에 관심을 둘까요? 거병에 반쯤 눈이 돌아가 있던데요.”
첼은 칼리고 몫으로 나온 쿠키를 하나 집어 들었다.
“남의 머리 위에 올라가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또 있겠습니까. 사내놈이라면 살면서 한 번 정도는 권력에 눈이 돌아갈 겁니다. 그때 살며시 등만 밀어주면 될 뿐이죠.”
“전 그런 적이 없습니다만.”
“…단장님은 평범에서 한참 벗어나 있으니까요.”
“하핫, 칭찬 감사합니다.”
“예, 뭐. 칭찬이기도 하죠.”
쿠키를 입에 넣었다. 적당한 단맛이 좋았다. 음미하며 단장을 바라보는데, 쿠키 위에 설탕을 뿌리고 있었다.
“뭐든 과하면 안 좋은 법입니다.”
“새겨듣겠습니다.”
대꾸만 할 뿐 설탕이 수북이 쌓인 쿠키를 기어코 입에 넣는 칼리고였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둔을 떠나기 전에 사람들을 만나야 해서요.”
“누굴 보러 갑니까?”
“우선 올란트한테 인사나 할까 합니다. 슬쩍 가하란 얘기도 꺼내고요.”
“구애는 적당히 하시죠. 어차피 제 밑으로 올 아이이니.”
“설마요.”
칼리고가 가보겠다며 몸을 돌리다가 다시 첼을 바라봤다.
“근데 기록지에 관한 걸 왜 가하란에게 경고하지 않은 겁니까? 로안 경의 기록지라는 게 밝혀지면 시끄러워졌을 텐데요.”
“그래서 지금 시끄러워졌나요?”
“아… 일부러 말씀 안 하신 거군요. 그 애가 어떻게 행동할지 보려고.”
“그냥 깜빡했을 뿐입니다.”
“아직 어린앤데 적당히 해주세요. 그러다 증조할아버지가 밉다면서 도망칠지도 모릅니다.”
“작은 물통은 살 이유가 없죠. 받아내야 할 똥물이 워낙 많아서.”
그렇겠네요, 칼리고가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첼은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물에는 파리가 꼬이기 마련인데, 너무 큰 파리들이 몰려드는군.”
납치해서 돌아갈까, 라고 잠깐 생각했지만 이내 웃음 지으며 떨쳐버렸다.
물론 아예 배제한 건 아니었다. 선택지 중 하나로 남겨둘 생각이다.
“슬슬 성도로 돌아가야 하나.”
첼은 모자를 챙기며 작게 혼잣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