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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135화 (108/558)

제135화

방에서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식탁에 올려진 쪽지였다. 가하란은 눈을 비비며 쪽지를 들었다.

- 글씨를 읽을 줄 안다고 했으니 이것도 읽을 수 있겠지?

칼리고가 남긴 메모였다. 곁으로 다가온 툴을 쓰다듬으며 메모를 마저 읽었다.

자그마한 종이에 글씨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데,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는 글이었다.

즐거웠고, 다음에 또 보자.

가하란은 웃으면서 쪽지를 내려놓고 옆에 놓인 바구니를 보았다. 메모에 적힌 대로라면 룽네 아줌마가 준 음식이리라.

“알았어, 밥 줄게.”

바짓단을 물어 당기는 툴을 진정시키고 바구니 덮개를 열었다. 토마토수프와 길쭉한 빵. 이름 모를 저 빵은 제과점에서 남은 반죽으로 만든 것이리라.

툴의 밥을 챙긴 다음 빈 바구니를 들고 집 밖으로 나왔다. 오전 9시. 평소보다 두 시간이나 늦게 일어났다.

“아주머니!”

마당에 나와 빨래를 걷고 있는 룽네를 부르며 다가갔다. 룽네가 빈 바구니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다 먹은 거야?”

“아니요. 이제 먹으려고요. 늦게 일어났어요.”

“얼른 먹어. 수프는 데우기 힘들면 그냥 먹고.”

“네, 알겠어요.”

“먹고 모자라면 아줌마 집으로 와. 더 있으니까.”

꾸벅 인사하고 돌아서려 하는데, 룽네가 잠깐만, 하며 붙잡았다. 하실 말씀이 있는 건가?

“그 칼리고라고 했나, 아는 사람 맞지?”

“네. 아빠하고도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고 했어요.”

“그 사람도 그렇게 말하더라. 수상쩍어서 더 캐물으려는데, 오히려 반기더라? 그 뒤에 날 앉혀놓고 말을 꺼내는데… 어휴, 뭔 남자가 말이 그렇게 많은지.”

생각만 해도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이 고개를 터는 룽네였다.

“재미있으신 분이에요.”

“재미는 모르겠고, 귀는 아프더라.”

룽네가 가하란 머리에 손을 올렸다.

“다음에는 아줌마한테 먼저 말해줘. 올란트가 없는 동안 우리가 네 보호자란 건 알고 있지? 네가 아무리 영리하다 해도 아직은 어린애야. 누굴 집으로 초대할 땐 조심해야 할 필요성도 있고.”

“시간이 조금 늦어서 말 안 했어요. 귀찮아하실 것 같아서.”

“우리가 언제 귀찮아한 적 있니?”

가하란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음부터는 꼭 말할게요.”

“내가 없으면 주변 어른들한테 꼭 말해. 다들 널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들이니까.”

활기차게 웃으며 가하란의 머리를 사정없이 흔드는 룽네였다.

“얼른 가서 밥 먹어.”

“네!”

“참, 올란트는 이번 주 내내 집에 안 오는 거니?”

“일이 바쁘셔서 못 들어오실 거 같아요.”

“그 인간도 적당히란 걸 몰라. 아줌마가 혼내줄까?”

“아니에요. 제가 가서 아빠 보면 돼요.”

룽네가 다가오더니 가하란을 꽉 안으며 등허리를 토닥거렸다.

“동네 애들이 널 반만 빼닮았으면 좋겠는데.”

“저 은근히 사고 많이 치는 거 아시죠?”

“그 점은 닮으면 안 되지.”

룽네에게 인사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밥그릇을 다 비운 툴이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더는 안 돼.”

알아들었는지 시무룩해하며 돌아서는 툴이었다.

의자에 올라가 숟가락을 들었다. 온기가 살짝 남아있는 수프를 한술 떠 입으로 가져갈 때였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지? 숟가락을 입에 물고 현관으로 뛰어갔다.

“…갈 준비가 안 된 거 같은데?”

셀베이아가 갸름한 눈으로 쳐다봤다. 가하란은 손에 든 숟가락을 뒤로 숨겼다.

잊고 있었다.

오늘은 10시까지 기록보관서로 가야 한다는 걸.

“밥 먹는 중이야?”

“네.”

“보니까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네.”

“지, 지금 갈게요. 옷 금방 갈아입으면 돼요.”

셀베이아가 문을 닫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밥은 먹고 가.”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강경한 턱짓에 가하란은 목을 움츠리며 식탁으로 돌아갔다.

“늦으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빵을 잘라서 셀베이아에게 내밀었다.

“예약자가 있는 건 아니니까 여유는 있어. 그러니까 천천히 먹어. 체하면 손해야.”

셀베이아가 집안을 살피며 말했다.

“부모님은?”

“아빠는 한동안 집에 안 들어오실 거예요. 엄마는 안 계시고요.”

“안 계신다는 건….”

“돌아가셨어요.”

“…그래. 내가 괜한 걸 물었네.”

“아니에요.”

가하란은 빙긋 웃었다.

수없이 들어본 질문이었다. 어른들이 걱정해서, 혹은 달리 할 말이 없을 때 으레 묻는 말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그러면 집에 혼자 있는 거야?”

“네.”

“무섭진 않고? 외롭거나.”

“아줌마, 아저씨들이 매일 찾아와줘요. 그래서 무섭지도, 외롭지도 않아요.”

“좋은 이웃들이네.”

셀베이아가 빵을 조금 뜯어 입에 넣었다.

“난 너만 했을 때 혼자 있는 게 무서웠어. 애들하고 같이 있어도, 주변에 선생님이 없으면 되게 불안했지.”

“선생님이요?”

“난 보육원에서 자랐거든. 저번에 말했지? 브라인 님이 관리하는 보육원. 나도 거기에 있었어.”

“그러면 누나의 아빠, 엄마는….”

“얼굴도 기억 안 나. 아주 어릴 때 헤어져서.”

“보고 싶겠다. 저도 엄마가 보고 싶거든요.”

셀베이아가 살며시 웃었다. 대신 지은 그 웃음이 긍정의 표시인지, 부정의 표현인지 가하란은 알아챌 수 없었다.

다만, 이 이야기를 그만두고 싶다는 분위기를 느꼈기에 가하란은 얼른 말을 바꿨다.

“저기, 누나. 수프 먹어볼래요? 진짜 맛있어요.”

가하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셀베이아가 풋 하고 웃었다.

“나 신경 써주는 거야?”

“네?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

셀베이아가 의자를 끌어와 식탁 옆에 앉았다.

“같이 먹어도 될까?”

“네!”

가하란은 안 쓴 숟가락을 하나 가져와 셀베이아 앞에 내려놓았다.

누나와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아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당분간 밀레나와 율, 두 사람 대신 내가 올 거야.”

“무슨 일 있는 거예요?”

“두 사람이 시간 내기가 조금 어려워졌어. 나쁜 일이 생긴 건 아니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고.”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사슴이 말했던 대로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있으니까.

“자, 잠깐만.”

셀베이아가 숟가락을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혹감이 잔뜩 어린 얼굴로 툴을 보고 있었다.

“쟤, 쟤 뭐야?”

“툴이요. 같이 살아요.”

“같이? 저만한 개를? 아니, 개가 맞긴 하고?”

“개 맞아요.”

툴이 헥헥거리며 다가왔다. 낯선 사람의 냄새가 궁금한 것 같았다.

“가하란. 쟤, 쟤 좀 잡아줄래?”

무서워하는 눈치였다. 가하란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툴을 붙잡았다.

“순해요. 잘 안 물고요.”

“그래 보이기는 하는데….”

윽박지르는 군인 앞에서도 차분함을 잃지 않던 셀베이아가 툴을 보며 바짝 얼었다.

툴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구나.

가하란은 코를 킁킁대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툴을 온몸으로 잡아끌었다.

“오늘은 안 돼! 방으로 들어가.”

툴을 작은 방에 밀어 넣은 후 잠깐만 기다려, 라고 말했다.

“이제 됐어요.”

몸에 잔뜩 묻은 털을 떼어내며 말했다. 셀베이아가 가슴께에 손을 올리며 숨을 골랐다.

“큰 개는 좀 무서워서. 어릴 때 쫓긴 적이 있거든.”

“다음에 누나 올 때는 툴 못 나오게 할게요.”

“아니야. 다음부터는 내가 밖에서 기다릴게. 너희 가족인데 그럴 순 없지.”

셀베이아가 곁눈질로 작은 방 문을 바라본다. 가하란은 재빨리 식사를 마쳤다. 손등으로 입가를 쓱 훔친 다음 일어섰다.

“가요, 누나.”

“벌써 다 먹었어?”

“네.”

셀베이아를 먼저 내보낸 후 작은 방 문을 살며시 열었다. 침대 옆에 누워 있던 툴이 금방 다가왔다.

“누나가 무서워해서, 미안해.”

툴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코를 비비며 월, 작게 짖었다.

“갔다 올게. 현관 열어둘 테니까 너도 밖에서 놀다가 와. 근데 너무 늦지는 마. 알겠지?”

볼살을 잔뜩 문지른 다음 밖으로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셀베이아가 웃으며 다가오다가 멈칫했다.

툴이 집 밖으로 나왔다.

꼬리를 슬렁슬렁 흔들며 담벼락 옆에 착 붙는다. 놀라게 할 생각이 없다는 듯이, 아주 천천히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내가 너무 예민했나.”

셀베이아가 툴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나중에 한번 쓰다듬어 주세요. 그러면 괜찮을 거예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셀베이아가 큰 다짐 하듯 말했다. 그 모습이 웃겨서 소리 죽여 웃고 있는데, 저만치 멀어진 툴이 두리번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셀베이아도 발견했는지 손가락을 들었다.

“뭐 찾는 중인가?”

“그러게요.”

갸우뚱거리고 있는 사이 툴이 움직였다. 순식간에 왼쪽 골목으로 뛰어들면서 모습을 감췄다.

“쥐라도 봤나.”

“툴은 쥐 싫어해요.”

“그래?”

셀베이아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가하란은 그 손을 붙잡은 뒤 걸음을 뗐다.

* * *

헌트는 옆에 선 여자를 바라봤다.

이름도, 나이도, 신분도 모른다. 아니, 알 필요가 없었다. 안내자의 역할은 목적지까지 인도하는 것이니까.

“여깁니다.”

후미진 골목이었다. 뭐하나 특별할 것 없는, 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골목.

여자가 조끼를 벗었다. 머리에 살포시 눌러썼던 모자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 골목만큼이나 여자의 인상은 흔해 빠졌다. 눈여겨보지 않는다면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잊힐 얼굴이었다.

“할 일을 다 하셨습니다. 이제 돌아가세요.”

“내가 해야 할 다음 일은 무엇입니까?”

“없습니다. 이제 기다리면 됩니다.”

“끝이란 겁니까?”

“예.”

여자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기도하듯 양손을 모은 여자가 떨리는 숨을 내뱉더니, 이내 미소를 그렸다.

“그날이 오면 기쁨의 재회를 해요.”

여자가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여자의 몸에 검푸른 핏줄이 솟아났다. 헌트는 뒤로 조금 물러섰다.

여자의 입이 비틀렸다. 누가 잡아끈 것처럼 기이한 각도로 삐뚤어지더니, 이내 찢어졌다.

헌트는 눈을 부릅떴다. 여자의 몸이 녹아들고 있었다. 살점이, 지방이, 피가 질척한 형태로 변해 땅으로 스며들었다.

전장을 오가며 끔찍한 몰골은 수도 없이 봤지만, 사람이 형태를 잃고 녹아내리는 모습은 난생 처음이었다.

희미한 비명이 지면을 타고 퍼져나갔다. 여자는 온몸이 녹아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에만 작게 소리 낸 것이다.

경이로운 정신력이었다.

헌트는 땅바닥을 보았다. 옆에 벗어둔 모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는 흔적은 전혀 없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믿음은 한층 더 강해졌다.

그래.

희생 없는 기적 따윈 개소리에 불과하지.

헌트가 모자를 들고 몸을 틀 때였다. 월, 하고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덩치 큰 개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헌트는 주변을 살폈다. 인기척은 없었다. 애초에 사람이 없는 시간대를 확인하고 왔으니 당연하다.

어디서 튀어나온 개일까.

상태를 보면 누군가 기르는 게 분명했다.

근처에 주인이 있는 걸까?

앞으로 달려온 개가 늦게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헌트는 개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다리 쪽에 찬 단검집을 매만졌다.

이것도 선견자의 뜻인가.

조용히 처리하고 떠나려는 그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툴! 이상한 거 먹으면 안 돼!”

개가 목소리에 반응했다. 헌트를 한 번 노려보다가 몸을 홱 돌려 사라졌다.

“다행이군.”

딸애가 끔찍이 아끼는 개가 잠깐 떠올랐다. 헌트는 단검집에서 손을 떼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이제, 남은 건 기다림 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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