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134화 (107/558)

제134화

“샬롯?”

가하란은 방금 들은 단어를 되뇌었다.

“혹시 이름이야?”

여자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일단 말은 통하는 것 같았다. 말이 통한다면 그다음은 쉬웠다.

“난 가하란이야.”

“가하란?”

“응. 이쪽에 계신 분은 사슴님.”

사슴이 눈을 씰룩거렸다. 잔소리할 줄 알았는데 별다른 말이 없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모르겠어. 그냥… 여기에 있었어.”

“이름 말고 생각나는 건?”

잔뜩 경직됐던 아이 표정이 점차 부드러워졌다.

“집.”

“어떤 집?”

“우리 집. 할아버지가 있었고, 아빠도 있었고, 다른 아저씨들도 많았어.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언니들도….”

“그랬구나.”

이야기를 할수록 샬롯 얼굴에 생기가 감돌았다. 얼음장 같았던 손에도 온기가 깃들었다.

샬롯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긴 어디야?”

“여기? 정령들이 사는 곳이야.”

“나는 왜 여기에 있어?”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동그란 눈동자가 사슴에게 향한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에 사슴이 뒤로 물러섰다.

가하란은 사슴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사슴님.”

“왜?”

“잠깐만 와 봐요.”

“싫어.”

“그러지 말고 잠깐만요.”

몇 번을 부탁해도 눈 하나 깜짝 않는 사슴이었다. 어쩔 수 없나,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사슴이 날개를 살짝 펴며 샬롯 곁으로 날아갔다. 샬롯이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요즘 들어 이상한 것들만 굴러들어오네.”

샬롯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사슴이 말했다. 가하란은 겁먹은 샬롯에게 걸어가 괜찮다고 말해줬다.

“난 얘하고 말 섞기 싫어.”

사슴이 몸을 틀었다. 가하란은 사슴의 날개를 붙잡았다.

“왜요?”

“냄새가 배어 있어. 아주 신경질적인 냄새야. 이 질척거리는 냄새의 주인을 알고 있지. 엮이면 아주 피곤해져.”

“누군데요?”

“가장 오래된 형태 중 하나.”

대화하던 도중 뒤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샬롯이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사슴을 보고 있었다.

“뭐야?”

사슴이 질색하며 물러서려 했다. 가하란은 다시금 사슴의 날개를 붙들었다.

“샬롯이 만지고 싶어 하는 거 같아요.”

“뭘? 날? 왜?”

“잠깐만 눈 감고 있으면 안 돼요?”

질문이 끝나자마자, 사슴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너, 부탁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거 같아. 층 너머 존재들에게 약속과 부탁은 공허하지. 쓰레기통으로 가야 할 휴지처럼 말이야. 하지만 우린 달라. 부탁과 약속은 근원과 관련된 문제지.”

연녹색으로 빛나는 수평형 동공 안에서 기괴한 불꽃이 일렁거렸다.

보는 것만으로 몸이 얼어붙을 정도였다. 들춰선 안 될 것을 들춘 듯한, 열어선 안 될 상자를 반쯤 연 듯한 기분이었다.

“오래된 형태 때문에 널 잠깐 돌봐준 거야. 그게 덜 귀찮으니까. 하지만 쟤는 아니야. 내가 네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 이유는? 들어준다면 넌 나한테 뭘 해줄 수 있는데?”

지나가는 투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땅거미처럼 짙게 젖어 든 공포에 말문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릴 때였다.

소매를 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샬롯이 말갛게 웃고 있었다.

“아까 현신이라고 하셨죠? 그걸 도와드리면 될까요?”

사슴의 말은 타당했다.

부탁은 남발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샬롯을 돕고 싶고, 그 일에 사슴이 필요하다면 정당한 대가를 줘야 한다.

사슴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건 별 의미 없이 말한 거야. 현신은 까다로운 작업이거든. 눈이 반쯤 뜨인 놈이….”

“산페르 아저씨는 쉽게 하던데요?”

“뭐?”

사슴이 관심을 보였다.

“현신을 했다고? 가장 오래된 형태가?”

“네. 분명 그렇게 말했어요. 제 눈도 멋대로 빌려 갔고요.”

“눈을? 정말로 감각을 대여해줬다는 거야?”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에 거짓은 없었다.

“흔들림이 없어. 속이는 게 아니네.”

“거짓말은 나쁜 거니까요. 물론 필요할 때도 있다고는 하지만, 지금 사슴님한테 한 말은 전부 사실이에요.”

“정말로 현신할 수 있다면, 네 감각을 잠깐이나마 빌릴 수 있다면 도와주지 못할 것도 없지.”

사슴이 샬롯에게 다가갔다. 앞다리를 굽히고 쓰다듬기 쉽게 몸을 낮췄다.

경계하던 샬롯이 살며시 손을 내밀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이내 흥겨워하며 사슴의 털을 훑었다.

표정이 밝아졌다. 까르르 웃으며 사슴을 껴안고 좋아했다. 두려움이 가신 것 같아 안심됐다.

가하란은 사슴 위에 올라탄 샬롯을 바라봤다.

“재미있어?”

“응!”

사슴이 주변을 한 바퀴 돌고 왔다.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샬롯이 땅으로 내려왔다. 살짝 지쳤는지 헤헤 웃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하란도 그 옆에 궁둥이를 붙였다.

“집 말고 생각나는 건 없어?”

“없어.”

이걸 어쩌지.

이곳은 생소한 세계였다. 들어오는 방법도, 돌아갈 방법도 알지 못했다.

여느 때처럼 잠에서 깨듯 정령세계를 떠나게 되면, 혼자 남을 이 애는 어떻게 되는 걸까?

“산페르 아저씨!”

하늘에 대고 소리쳐 봤다. 언제나처럼 나타나 주면 좋을 텐데, 산페르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산페르는 대체 무얼 알아보러 간 걸까. 헤어지기 직전 ‘저것’에 물어보러 간다고 했는데.

“제대로 설명 좀 해주지.”

작게 한숨이 나왔다.

한참을 생각하다 옆을 보았다. 샬롯은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어디 아픈 건 아닌가, 걱정돼 얼굴을 살폈다.

“조만간 흩어질 거다.”

사슴이 말했다.

“흩어져요?”

“넌 경험해 봐서 알잖아. 널 이루는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흩어져 사라져가는 걸 느껴봤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오싹해진다.

기억들이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 사라지고, 결국 텅 비어서 사라지게 되는 감각.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았다면, 바닷물 속에 던져진 작은 물방울처럼 모든 걸 잊어버렸을 것이다.

“샬롯. 샬롯!”

가하란은 샬롯을 흔들었다. 정신 차리라고, 뭐가 됐든 꽉 쥐고 있으라고 말해줘야 했다.

유단 형도 이 말이 도움됐다고 했으니, 샬롯도 기운을 얻을 것이다.

“샬롯이 눈을 안 떠요.”

사슴을 보며 말했다. 조급함이 몸을 휘감았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이 애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근원의 소멸은 타자가 개입할 여지가 없거든. 오롯이 본인의 책임이자 선택이야. 남고 싶다면 버티는 거고, 그게 아니면 모든 걸 상실하는 거지.”

“안 돼요. 그럴 순 없어요.”

“인간족 꼬마야. 모든 층을 꿰뚫는 진리를 하나 알려줄까?”

사슴이 작게 하품한 뒤에 말했다.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게 있다는 거지.”

“그렇다고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가하란은 샬롯을 격하게 흔들었다. 눈을 뜨게 해야 했다.

“물론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네? 그게 뭔데요?”

“그 아이한테서 나는 냄새. 만약 오래된 형태가 그 아이를 신경 쓰고 있다면….”

사슴이 말을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콧바람을 내뿜었다.

“왔네. 퀴퀴한 냄새의 주인이.”

살랑바람이 불어왔다. 기분 좋게 몸을 간질이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의 세기가 바뀌었다.

훈풍에서 삭풍으로, 뺨을 할퀴듯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뜨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지랄맞은 성격은 여전하지. 인간족 꼬마야, 이쪽으로 와.”

“잠깐만요! 샬롯도 데려갈게요.”

바람이 격해지고 있었다. 잠들어 있는 샬롯을 내버려 두면 둥실 떠올라 하늘 저편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손대지 말고 얌전히 와.”

날개를 펼치며 다가온 사슴이 가하란의 옷자락을 물었다. 어, 하는 사이에 뒤로 훌쩍 물러서게 됐다.

“샬롯을….”

“잘 봐. 저 애는 위험하지 않아. 오히려 걱정해야 할 건 너야.”

앞을 가려준 거대한 날개 틈새로 얌전히 누워있는 샬롯이 보였다. 몰아치는 태풍이 샬롯만 비껴가는 것 같았다.

머리카락조차 흔들리지 않는 안락함이었다. 다른 곳은 뒤집히고 휩쓸리고 있는데. 신비한 현상이었다.

“왔네.”

고개를 쳐들며 말하는 사슴이었다. 가하란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총천연색 하늘을 밀어내는 거대한 날개가 보였다. 날개는 이윽고 하늘을 가렸고, 깊은 어둠을 만들어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날개.

가하란은 반쯤 넋을 놓으며 물었다.

“저게 대체 뭐죠?”

“가장 오래된 형태 중 하나. 근데 화가 좀 난 거 같네.”

“…위험할까요?”

“난 괜찮아. 여기서 도망치면 되니까.”

“저는요?”

“글쎄.”

한순간 바람이 멎었다.

강풍의 부재가 만들어낸 농밀한 적막감에 가하란은 숨을 잠시 멈췄다. 숨소리를 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지에 드리워졌던 그늘이 걷혔다. 거대한 날개가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가하란은 누워 있는 샬롯을 바라보았다. 작은 새 한 마리가 어깨에 내려앉아 있었다.

“우리가 하는 말 따윈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는 걸 알지만, 예의상 말해둘게. 그 인간족 꼬마한테 아무 짓 안 했어. 오히려 지켜줬지.”

사슴이 말했다. 작은 새에게 하는 것 같았다.

작은 새의 부리가 살며시 열렸다.

“알고 있어. 너희 잘못이 아니라는 걸.”

“그거 다행이네.”

“내 딸에게 몹쓸 짓을 했다면, 네가 입을 열기도 전에 찢어버렸을 테니까.”

“말 한번 참 무섭게 하네. 근데 찢을 수는 있고?”

“보여 달라는 거지?”

작은 새가 노려보자, 사슴이 날개를 접으며 대답했다.

“그냥 해본 소리야. 오래된 형태랑 숨바꼭질하고 싶지 않아. 너흰 너무 질기거든.”

사슴이 머리로 가하란의 등을 툭 쳤다.

“다 끝났으니까 가자. 저 녀석하고 같이 있어봤자 도움 될 거 없어.”

“알겠으니까 그만 밀어요. 넘어지겠어요.”

툭툭 치는 사슴에게 말한 후, 작은 새를 바라봤다. 샬롯을 살피던 새가 이쪽을 바라본다.

“저기, 샬롯은 괜찮은 거죠?”

“이 애가 너한테 이름을 말해준 거니?”

“네.”

“…내 딸은 괜찮을 거야.”

샬롯의 몸이 떠올랐다. 작은 새와 함께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가하란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다음에 또 보게 되면, 샬롯하고 같이 놀아도 될까요?”

“그럴 일은 없어. 어차피 이곳에서 본 것들은 모두 잊을 테니까. 그러니 너도 신경 쓰지 마.”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따가운 바람에 눈을 살짝 감았다가 떴다. 샬롯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작은 새가 데려간 것 같았다.

“여전히 뾰족하구만.”

사슴이 고개를 털며 말했다.

“오래된 형태들이 층 너머로 계속 가고 있어. 조만간 아주 재미난 일이 벌어질 거야.”

“재미난 일이요?”

“나한테는 신나는 일. 층 너머 존재들한테는 아주 끔찍한 일이겠지만.”

사슴 말에 가하란은 눈을 찌푸렸다.

“아, 그리고 나와 한 약속은 잊지 마.”

“현신이요?”

“그래. 네가 준비되는 날, 나는 널 통해 층 너머 세상을 감각할 거야.”

즐길 거리가 하나 더 생겼네, 즐겁게 웃으며 걸어가던 사슴이 고개를 홱 돌리며 가하란을 바라봤다.

“나중에 또 보자. 인간족 꼬마야.”

네? 라는 물음이 입 밖으로 나가기 직전이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몽롱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다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이불을 거둬내고 몸을 일으켰다.

“…정말 제멋대로네.”

인사할 시간도 주지 않고 본래 세계로 돌아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