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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133화 (106/558)

제133화

불꽃이 넘실대는 산과 둥둥 떠다니는 거대한 얼음. 뿌리가 하늘로 자라나는 숲과 색색들이 빛나는 하늘.

가하란은 익숙한 풍경을 눈에 담으며 머쓱하게 웃었다. 정령세계로 또다시 끌려온 것이다.

“이럴 거면 그냥 이사하지? 매번 오가는 것도 귀찮잖아.”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날개 달린 사슴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또 보네요.”

“그래. 또 보고 있지.”

가하란은 귀 뒤쪽을 긁적거리며 물었다.

“오늘은 같이 가자고 안 해요?”

“가자고 하면, 따라올 거야?”

“아니요.”

“나 놀리니?”

가하란은 대답 대신 배시시 웃었다.

“기억단절은 없는 것 같고, 저번보다 정신도 또렷하고. 형태를 잃지 않고 계속 유지하는 걸 보면……. 너, 눈이 곧 뜨이겠구나.”

눈이 뜨인다.

타챠와 산페르가 몇 번이나 반복해서 한 말이었다. 타챠에게는 물을 여유가 없었고, 산페르는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이 기회였다.

가하란은 날개를 펼치며 떠나려는 사슴을 붙잡았다. 어딜 잡아야 할지 몰라 일단 귀를 움켜쥐었다.

“뭐 하는 거야?”

“잠깐만요. 저 궁금한 게 있어요.”

“그거 잘됐네. 난 없거든.”

도리질 치며 물러서는 사슴이었다. 가하란은 재빨리 사슴 옆으로 갔다.

“눈이 뜨인다는 게 정확히 어떤 거예요?”

“내가 그걸 왜 너한테 알려줘야 하는데?”

“…그러게요.”

“층 너머 존재들은 뻔뻔해. 대가도 없이 요구하는 게 많아. 종종 ‘눈 뜨인 놈’들이 우릴 불러놓고는 도와달라고 하는데, 웃기지 않아? 우리가 왜?”

“돕고 살면 좋잖아요.”

“돕는 게 왜 좋은데?”

“어려운 일도 쉽게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안타깝게도 이곳에선 ‘어렵다’라는 개념이 확립돼있지 않아. 나야 층 너머에서 이것저것 들어서 배웠다지만, 나머지 애들은 아니지.”

이야기 도중 뒤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가하란은 목을 움츠렸다. 거대한 뱀이 머리 위로 지나갔다. 머리 위로 눈이 떨어졌는데, 뱀이 뿌리고 다니는 듯했다.

가하란은 굽이치며 사라지는 뱀을 쳐다보다가 서둘러 걸음을 뗐다. 사슴이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사슴님!”

“뭔 괴상한 호칭이야.”

“사슴을 닮았으니까요.”

“내가 사슴을 닮은 게 아니라, 층 너머에 있는 고깃덩이가 날 닮은 거겠지. 아무튼 쫓아오지 마. ‘가장 오래된 형태’한테 시달리고 싶지 않으니까.”

가장 오래된 형태?

“그건 산페르 아저씨를 말하는 건가요?”

“그것이 획득한 이름 따윈 내 알 바 아니야. 중요한 건 너한테 문제가 생기면 괜히 나까지 귀찮아진다는 거지. 오래된 형태들은 하나 같이 집요한 구석이 있거든.”

사슴이 머리로 가하란의 가슴을 들이받았다.

“저리 가라니까.”

“그러지 말고 저랑 얘기하면 안 돼요?”

“얘기가 아니라 궁금증을 풀어달라는 거겠지.”

사슴이 날개를 펼쳤다. 아담했던 날개가 점점 커지더니, 이내 독수리의 날개처럼 커다랗게 변했다.

“사슴님!”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발돋움하며 단번에 날아오르는 사슴이었다. 도저히 쫓아갈 수 없는 높이였다.

높이 올라간 사슴이 밑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고 있었다.

“넌 여기까지 올 수 없어. 그러니 얌전히 있다가 층 너머로 돌아가.”

가하란은 고개를 들었다. 사슴의 말은 옳았다. 브라인처럼 신체술을 쓰지 않는 한 저 높이까지 올라갈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날 수 없는 거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오래된 신발이 보였다. 입고 있는 옷도 살폈다. 자주 입는 옷이었다.

하지만 어젯밤에 입은 옷은 아니었다. 침대에 누울 때도 이 옷이 아닌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이 신발은 어디서 온 걸까?

이 옷은 또 어디서 왔고?

사슴의 날개는 왜 갑자기 커졌으며, 날개도 없는 커다란 뱀이 어떻게 하늘을 날까?

가하란은 펄럭이는 날개를 보며 상상해 봤다. 등에서 날개가 돋아나 하늘로 오르는 상상을.

하지만 변화는 없었다.

괜히 실웃음이 나왔다. 망상도 이런 망상이 없지. 없던 날개가 어떻게 생기고, 만약 생긴다고 해도 나는 법을 언제 배우겠어.

“난 너한테 아무 짓도 안 했다. 그러니 오래된 형태를 만나면 날 좀 내버려 두라고 전해.”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며 말하던 사슴이 방향을 꺾었다. 더는 할 얘기가 없다는 듯, 불이 이글거리는 땅으로 머리를 돌렸다.

“잠깐만요!”

쩨쩨하지만, 그래도 말을 걸어준 유일한 정령이 사슴이었다. 다른 정령들은 벌레 보듯 지나치거나,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사슴이 떠나고 나면 이 넓은 공간에 홀로 남겨질 것이다. 외톨이가 되는 건 싫었다. 아무나 좋으니 사슴이 있는 곳까지 올려다 줬으면.

불현듯 거병이 떠올랐다. 맞아, 축제 때 봤던 거병이라면 어렵지 않게….

파삭 소리와 함께 땅이 꺼졌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가하란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섬뜩한 부유감에 휩싸였다. 몸이 밑으로 떨어진다.

“어?”

한참 떨어질 것 같았는데, 낙하가 길지 않았다.

“이건….”

탄탄한 바닥에 발이 닿았다. 가하란은 휘청거리다가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었다.

푹신한 들판이 아니라 단단한 쇠였다.

이게 뭐지?

의아함도 잠시, 주변 풍경이 변하고 있었다. 아니, 변한 건 바닥의 위치였다.

가하란은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들었다.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다섯 개의 손가락이 보였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거병의 손가락이었다.

그렇다는 건…….

가하란은 조심스럽게 걸음을 뗐다. 엄지 쪽으로 걸어가 밑을 내려다봤다.

“우와!”

땅이 저 밑에 있었다. 고개를 홱 돌렸다. 바로 옆에 사슴이 보였다.

“사슴님! 이거 제가 한 건가요? 제가 거병의 팔을 만들어낸 건가요?”

“너 아니면 누가 그랬겠어.”

“와. 여긴 상상하면 다 되는 곳이네요!”

“아니. 그건 상상이 아니라 네 근원의 발현이야.”

“제 근원이요?”

“오래된 형태한테 들은 게 아무것도 없구나. 꽤 신경 쓰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버려둘 거면 그때 왜 참견한 거야, 참내.”

순간 심한 어지럼증이 몸을 덮쳤다. 바닥을 뚫고 솟아난 거병의 팔이 먼지로 변해 흩어졌다.

또다시 추락이 찾아왔다.

으악, 하고 비명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잡아.”

사슴이 밑에서 떠받쳐줬다. 가하란은 양팔로 사슴의 목을 껴안았다.

“가, 감사합니다.”

“그렇게 놀라지 마. 떨어진다고 해서 층 너머에 있는 네가 소멸하는 건 아니야.”

“그래요? 그러면 다쳐도 괜찮은 거예요?”

“소멸은 안 하고 단지 가만히 누워있게 될 뿐이야. 아주 오랫동안.”

그 말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팔이 힘을 꽉 줬다. 절대 떨어지지 말아야지.

“왜 절 구해주신 거예요?”

“오래된 형태한테 시달리기 싫어서. 내가 네 옆에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 또 찾아와서 물을 들이붓겠지. 난 그런 거 싫어.”

“…얌전히 있을게요.”

“제발 부탁이다. 난 다른 놈들처럼 무료한 삶에 지쳐 소멸을 택할 생각은 없거든. 난 층 너머를 지켜보는 게 즐거워. 변하는 게 없다고 하지만, 그건 자세히 살피지 않아서 그래. 들여다보면 미세하지만 분명 바뀌고 있어.”

가하란은 저 멀리 있는 얼음덩어리를 보며 물었다.

“사슴님은 얼마나 오래 살았어요?”

“너희들만 공유하는 시간이란 개념을 묻는 거라면 답하기 어려워. 나는 변화를 감상할 뿐, 거기에 수치를 매기진 않으니까.”

“하지만 산페르 아저씨한테는 오래된 형태라고 했잖아요. 정령세계에서 쓰는 시간 계산법이 따로 있는 거 아니에요?”

“그것들은 특별해. 아니, 특이하지. 최초의 기억이 시작됐을 때부터 그것들은 존재했어. 그래서 우리끼린 가장 오래된 형태라고 부르는 거고.”

“산페르 아저씨는 정말 오래 살았나 보네요.”

“알 게 뭐야. 애초에 너희들이 말하는 ‘살았다’의 정의부터 모호하지만.”

내려갈 테니 꽉 잡아, 사슴이 날개를 접으며 고도를 낮출 때였다.

지면을 훑던 가하란 눈에 특이한 것이 걸려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다.

이곳이 정령세계가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당연하고도 마땅한 것.

여자아이였다.

“사슴님, 저기요!”

“또 왜?”

“저기 여자애가 있어요.”

“있겠지. 너도 있는데.”

“위험해 보이지 않아요?”

걸음걸이가 이상했다. 멀어서 표정이 어떤지 보이지는 않지만, 좌우로 기우뚱거리는 몸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자각하지 못하고 휩쓸려왔나 보지. 눈이 뜨이는 놈들은 많아. 정말로 많지. 단지 제대로 뜨는 놈이 없을 뿐이야.”

여자아이가 비틀거렸다. 넘어지는 것까지는 괜찮다고 해도, 걸어가는 방향이 문제였다.

바위가 제멋대로 굴러다니는 곳이었다. 저곳으로 걸어 들어가면 치이는 게 아니라 깔리게 될 것이다.

상상하는 것도 싫었다.

가하란은 사슴의 목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저쪽으로 가요!”

“내가 그 부탁을 들어주면 넌 뭘 해줄 건데?”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볼게요. 우선 저 애를….”

끙, 힘을 주며 목을 당겼다.

“제발요!”

“저게 소멸한다고 해서 너한테 문제 될 건 없잖아.”

“왜 없어요! 사람이 죽잖아요!”

“그러니까. 너와 단절된 개체의 소멸이 너한테 어떤 영향을 끼치냐고. 나는 너희들을 수없이 들여다봤지만, 아직도 이건 이해하지 못하겠어.”

“이해할 필요 없어요! 지금은 그냥 좀 가주세요. 아니면….”

가하란은 손을 풀었다. 사슴이 고개를 홱 돌렸다.

“너 뭐해.”

“저쪽으로 뛸 거예요.”

“그러다 네가 소멸해. 저 형태한테 휩쓸리면 잠드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아.”

“그래도 할 거예요.”

거병의 팔을 상상했다. 하지만 이전처럼 땅을 뚫고 튀어나오지 않았다.

왜 안 되는 거지? 아까는 됐는데?

“그 희미한 근원으로 뭘 해보겠다고.”

사슴이 방향을 돌렸다.

“잡아. 데려다줄 테니까.”

“고맙습니다.”

“고맙긴. 나중에 다 받아낼 거야. 층 너머 현신을 요구해볼까?”

“잘 모르겠지만 뭐든 도와드릴게요.”

땅으로 내려왔다. 가하란은 사슴 등에서 내려 여자애한테 달려갔다.

여자애 팔을 붙잡고 재빨리 잡아당겼다. 거대한 바위가 코앞을 스쳐 지나갔다. 조금만 늦었어도 으스러졌을 것이다.

“괜찮아?”

가쁜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데 말하다 보니 ‘숨이 왜 가쁘지’란 생각이 들었고, 곧바로 호흡이 안정됐다. 정말 이상한 세계였다.

가하란은 여자애를 살펴봤다. 정신을 반쯤 놓은 것 같았다. 나이는 비슷해 보이는데.

“내 말 들려?”

가하란은 여자애의 눈을 직시하며 물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사슴님.”

“제발 그 이름으로 날 부르지 말아 줄래? 내 근원이 손상되는 기분이 들거든.”

“호칭은 나중에 정해요. 그보다 얘를 도와줄 방법이 없나요?”

“넌 돕는 거에서 희열을 느끼냐?”

뚱하게 쳐다보는 사슴이었다. 아무래도 도와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어떻게 오게 된 거야?”

여자애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온기가 전혀 없는 손이었다. 눈밭에 손을 쑤셔 넣고 가만히 있는 기분이었다.

“말을 못 하는 거야? 아니면 기억나는 게 없어?”

몇 번이나 질문을 던질 때였다. 여자애가 아주 느리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샬롯.”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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