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132화 (105/558)

제132화

싸가지.

모멸감보다는 이색적인 호기심을 먼저 느꼈다. 엄마를 지칭하는 수많은 단어 중에 싸가지보다 강렬했던 게 있던가?

민 교수가 팔목을 돌리며 말했다.

“혹시 불쾌한가요? 내가 필렌을 그런 식으로 불러서?”

“아닙니다. 어머니를 그렇게 부를 수 있다는 건 그만큼 가깝다는 증거겠죠. 그리고 어머니의 성격은 말씀하신 대로….”

“싸가지가 없다?”

“좀 독특하시죠.”

밀레나는 힘주어 말했다.

“정말 필렌을 많이 닮았네요. 아, 이거 칭찬이에요. 난 필렌을 좋아하거든요. 싸가지는 없지만.”

민 교수가 환하게 웃었다. 치아마저 단련한 것처럼 반듯하고 가지런했다.

“사적인 질문인데 해도 되나요? 아니, 그냥 할게요. 어차피 대답해야 하는 처지니까. 요즘 필렌은 어떻게 지내요?”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어머니께서 어떻게 지내시는지.”

“하나뿐인 딸애한테도 연락을 안 하고 지낸다라. 세월이 지나도 변하질 않네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이 말을 가슴에 품은 채 살고 있습니다. 제가 모르는 곳에서 재미난 일을 하고 계시겠죠.”

“얌전히 있을 친구가 아니니까요.”

밀레나는 힐긋 훈련장 끝을 바라봤다. 트레일러를 향해 뛰고 있는 동기들이 보였다. 돌아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저도 사적인 질문을 해도 됩니까?”

“그럴 자격이 있나요?”

“…죄송합니다.”

민 교수가 검지를 편 채 손목을 까닥거렸다.

“이런 점은 안 닮았네요. 필렌이라면 바로 덤벼들었을 텐데. 물어볼 게 있으면 물어봐요. 우린 앞으로도 많은 대화를 해야 하니까.”

밀레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어머니와는 어떤 관계이신지….”

“전우이자 앙숙. 내 전 재산을 줘도 아깝지 않을 사람이자, 동전 한 개도 주기 싫은 애. 나보다 어리면서 단 한 번도 언니 취급을 안 해주지만, 그래도 얄밉지 않은 아이.”

말이 필요 없는 사이.

밀레나는 민 교수의 얼굴을 다시금 뜯어봤다. 이 정도로 친분이 두텁다면 본가에도 한 번쯤 찾아왔을 것이다.

“기억하려고 애쓰지 마요. 밀레나 학생을 처음 본 건 옹알이도 못 할 때였으니까.”

역시나.

밀레나는 목덜미를 손등으로 훔쳤다. 줄줄 흐르던 땀이 어느덧 멎었다.

적당히 시원한 밤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갈 때, 민 교수가 말을 꺼냈다. 시선은 동기들을 향해 있었다.

“밀레나 학생.”

“네.”

“이 자리에 모인 여섯 명 중 단 한 명에게 기사의 자격을 내릴 수 있다면, 누구한테 자격을 줄 건가요?”

이게 본론이라는 걸 곧바로 알아챘다.

단 한 명을 뽑는다라. 밀레나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민 교수가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또 한 명을 골라 성도로 돌려보내야 한다면, 누굴 선택할 건가요?”

한 명은 거병 기사, 다른 한 명은 탈락. 아마 다른 동기들도 똑같은 질문을 받았을 것이다.

“이 질문이 앞으로 저희가 받아야 할 연수에 어떤 영향을….”

질문을 끝맺지 못했다. 민 교수가 미소를 지은 채 검지를 살며시 흔들었다.

“난 질문했고 대답을 원해요. 명쾌한 답이 아닌 질문이 되돌아온다면 난 몹시 실망할 거고요. 간결하게, 자기 생각을 담아서 말해요. 내 의도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좋지만 지금 그런 걸 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민 교수의 검지가 동기들을 가리켰다. 반환점을 돌아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저 친구들이 도착하면 답할 기회조차 없을 테니.”

머뭇거릴 때가 아니었다.

밀레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한 명을 택해 거병 기사로 추천한다면 절 택하겠습니다.”

“근거는요? 왜 당신이 선발돼야 하죠?”

밀레나는 동기 쪽을 바라본 다음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제 동기들은 최고입니다. 하지만 전 저 친구들보다 한 수 위입니다. 그러니 한 명을 꼽아야 한다면, 절 추천하겠습니다.”

턱을 세우고 당당하게 말했다. 오만하다고 평가당해도 어쩔 수 없었다.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율, 이리엘데, 브리테, 로안, 미엔.

모두 훌륭한 전사들이었다. 하지만 그중 으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주저함이 없이 나라고 대답할 것이다.

“한 명을 택했으니, 다른 한 명을 집으로 돌려보내겠죠? 누굴 탈락시킬 건가요.”

“없습니다.”

“난 한 명을 뽑으라고 했어요. 없다는 건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에요.”

“몇 번을 물으셔도 제 대답은 같습니다. 떨어트려야 할 얼간이는 없습니다.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이상 다들 기사가 될 겁니다.”

“정원이 다섯 명이라 반드시 한 명을 돌려보내야 한다면요?”

“기존의 자리를 빼앗으면 됩니다. 저희 동기들은 능력으로 증명할 겁니다.”

대답을 마침과 동시에 동기들이 도착했다. 얼굴이 창백해진 미엔이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낙오자 없이 끝내고 왔습니다.”

“가볍게 뜀박질했는데 낙오자가 나오면 큰일이죠. 일단 앞으로 와서 앉아요. 물도 마시고.”

동기들이 줄 맞춰 선 다음 제자리에 앉았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다들 이를 악물고 있었다.

“구보 도중 입을 여는 기특한 학생이 나오길 바랐지만, 다들 재미없게도 조용히 뛰기만 하더군요.”

교수가 눈웃음 지었다. 교수의 입이 열릴 때마다 불안감이 커졌다.

다음에 뭘 시킬 건가.

“짐작하고 있겠지만 여러분한테 똑같은 질문을 던졌어요. 한 명을 추천하고, 한 명을 버려라. 정말 재미없게도 여러분은 마치 입을 맞춘 것처럼 똑같은 대답을 내놨어요.”

밀레나는 율을 슬쩍 바라봤다. 율이 ‘너도?’라는 눈짓을 보냈다.

“미엔, 로운, 율, 이리엘데, 브리테, 밀레나. 다들 자신을 추천하고 탈락자는 없다고 말했어요.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기수군요.”

살며시 웃음이 나왔다. 파벌 다툼이다 뭐다, 하루도 쉬지 않고 잡음이 튀어나오지만 서로를 인정하는 마음만큼은 변치 않는 것 같았다.

민 교수도 이런 대답을 원했던 걸까?

어쩌면 좋은 팀워크를 보여줬다면서 이대로 해산을 명령할지도 모른다. 침대에 쓰러져 기절하는 황홀한 상상을 할 때였다.

“이상적인 대답이에요. 하지만 우린 현실에 살고 있죠. 그러니 현실 얘기를 해볼까요?”

동기들 사이에 감돌던 훈훈한 기운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다들 현실이란 단어에 깊게 찔린 표정이었다.

민 교수가 거병을 가리켰다.

외장갑 위로 달빛이 미끄러지고 있었다. 경이롭고 아름다우며 동시에 정복욕을 건드린다.

“거병. 전략병기죠. 저걸 쓰지 않고 전쟁에서 이기는 게 최선의 목표일 정도로 돈을 잡아먹는 괴물이기도 하고요.”

민 교수가 로운을 지목했다.

“거병을 움직이는 데 왜 막대한 비용이 들죠?”

“연료 때문입니다.”

“그래요. 우리가 품고 살며 우리 곁에 널린 이 마나. 이 마나가 거병의 동력원이죠. 근데 알다시피 농도가 낮은 마나로는 거병을 일으킬 수 없어요. 잔뿌리에서 얻어낸 고농도의 마나, 그걸 응축로에서 정제해야 사용할 수 있죠.”

민 교수가 주머니에 손을 꽂고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인간은 말이죠, 이렇게 걷는 데 별다른 비용이 들지 않아요. 정말 효율의 극치죠. 건빵 몇 알과 물이면 종일 걸어 다닐 수도 있어요. 하지만 거병은 그게 안 돼요.”

민 교수가 브리테 등 뒤에서 멈췄다. 두 손으로 브리테의 어깨를 짚으며 물었다.

“브리테 학생. 거병을 다섯 기 이상 투입한 작전이 최근 50년간 몇 번이나 있었죠?”

“14년 전에 한 번 있었습니다.”

“알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연합왕국과 치른 ‘15년 전쟁’에서 딱 한 번 대규모 작전이 실행됐죠.”

민 교수가 자리를 옮겼다. 이번엔 율 등 뒤에 섰다. 율이 긴장하는 게 보인다.

“당시 연합왕국은 길리아 전선을 지키기 위해 거병을 대동했고, 제국은 대응하기 위해 거병을 배치했죠. 장관이었어요.”

민 교수가 율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당시 작전에 투입된 제국의 거병은 총 스물네 기. 그중 몇 개가 무사히 격납고로 돌아왔죠?”

“상하부 모듈이 손상되지 않은 채 귀환한 건 총 네 기라고 알고 있습니다.”

“아쉽네요. 다섯 기였어요.”

“예?”

“거짓말이에요. 네 기 맞아요.”

민 교수가 율의 어깨를 툭툭 쳤다. 율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례없는 피해였어요. 다른 물자야 쥐어 짜내서 보충한다고 해도, 마나응축봉은 그럴 수 없으니까요. 성도가 뒤집혔죠. 거병은 거병으로밖에 대응할 수 없으니까요.”

민 교수가 생도들 앞에 섰다.

“그러나 다행히도 재정이 박살 난 건 제국뿐만이 아니었어요. 연합왕국 역시 비슷한 절차를 밟고 있었다. 그즈음이었어요. 거병이 최전선에서 물러나 격납고 옆에 배치된 건.”

민 교수는 옅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밀레나는 알고 있었다.

거병은 그 후 15년 전쟁이 끝나는 최후의 순간까지, 작전에 투입되지 않았다.

“마치 승리를 기원하는 토템상처럼 우뚝 서 있을 뿐이었죠. 여기까지 들었으면 여러분들이 겪어야 할 현실이 무엇인지, 대강 눈치챘을 테죠.”

민 교수가 팔짱을 꼈다.

“아까 비일이 한 말을 기억하나요? 거병에 올라타는 게 좋아서 써전이 됐다고. 실전 횟수보다 점검 횟수가 많으니 좋다고.”

밀레나는 입술을 꾹 닫았다.

어렴풋하게 알고는 있었다.

변해가는 전쟁 양상, 기체수가 점점 줄어든다는 보고, 그럼에도 꾸준히 나타나는 기사 후보생들.

이건 정말 현실적인 문제였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우리는 과거보다 훨씬 더 효율을 따지게 될 거고, 거병은 그런 관점에서 최악인 물건이죠. 행정처 재정관리자들의 올해 목표가 뭔지 아세요? 바로 거병관리국으로 들어가는 돈을 줄이는 것. 나아가 거병 자체를 없애는 거.”

민 교수가 밀레나 앞에 섰다.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씁쓸함이 느껴진다.

“폐하께선 15년 전쟁으로 많은 걸 얻으셨어요. 그건 연합왕국도 마찬가지죠. 전쟁이란 게 언제 터질지 모르는 것이나, 학자들은 향후 30년은 평화의 시대가 지속될 거라고 예측하고 있어요.”

“평화가 길어진다는 건….”

밀레나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좋은 일이죠. 무척이나 다행인 일이죠.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가족이 사라지는, 그런 끔찍한 시대를 누가 반기겠어요? 하지만 여러분한테는 안타까운 일이기도 해요.”

“연구개발은 언제가 있을 전투에 대비해 끝없이 진행되겠지만… 실제로 거병을 움직이는 일은 거의 없겠네요.”

민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여러분이 당면한 현실의 문제예요. 게다가 나이를 조금 먹었지만, 여전히 현역인 나 같은 기사들이 남아 있죠. 기능점검을 위해 새로운 인력을 길러낼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입 안이 바짝 말랐다.

민 교수는 말하고 있었다.

너희들 중 과연 몇 명이나 기사가 될 수 있을까? 아마 한 명도 없지 않을까, 라고.

“써전의 숫자는 매년 늘어날 겁니다. 반면 기사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을 거고요. 어쩌면 써전과 기사의 경계가 무너질 수도 있어요. 풋내나는 기사보다 노련한 써전이 거병을 훨씬 잘 다루니.”

민 교수가 일어서라는 손짓을 했다.

“자, 쉴 만큼 쉬었으니 다시 뛸 준비를 하죠. 내가 위에서 부탁받은 사안은 딱 하나예요. 길러낼 여력은 없으니 완벽한 걸 하나만 뽑아주세요.”

민 교수의 검지가 저 멀리 있는 트레일러를 가리켰다.

“그러니 기초체력부터 계속 점검해 볼까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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