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131화 (104/558)

제131화

“수고했어요.”

민 교수가 도낏자루를 쥐며 말했다. 성인 남자 둘이서 버겁게 들고 온 도끼를 가뿐하게 들어 올리더니 바닥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휴리우스.”

민 교수가 휴리우스를 바라보았다. 교관은 묵례를 올리고 비일과 함께 훈련장을 떠났다.

“날씨가 제법 시원해졌어요. 9월 끝자락, 곧 가을이 오겠죠?”

교수가 목을 좌우로 꺾었다. 얼굴에서 피곤함이 엿보였다.

“이런 날은 바람이 잘 드는 곳에서 아무 생각 없이 술을 마셔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안타깝네요.”

목, 그다음은 어깨. 이어서 손목을 빙글빙글 돌리는 민 교수였다.

밀레나도 경직된 어깨를 손으로 주물렀다. 파르르 떨리는 허벅지는 주먹으로 내려쳤다.

다른 동기들도 저마다의 방법으로 몸을 풀었다.

“이번 생도들은 설명이 필요 없어서 좋네요.”

민 교수가 도끼를 들어 올렸다. 날에 묻어 있던 흙먼지가 살포시 떠올라 대기 중으로 흩어졌다.

“내 이름은 휴리우스한테 들었을 테고, 이제 여러분들의 이름을 들어봐야 할 차례인데… 난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인상적인 학생만 기억해요.”

민 교수가 자루를 어깨에 이었다. 날렵해 보이는 체형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육중한 도끼.

불균형은 불안감을 낳아야 하는데, 민 교수는 오래된 거목처럼 안정적이었다.

“누가 먼저 자기소개를 해볼래요?”

밀레나는 율과 시선을 교환했다. 협동전이라면 지겨울 정도로 많이 치렀다.

“혼자 예의 바르게 인사해도 좋고, 여럿이서 과감하게 실행하는 것도 좋아요. 각자의 방식으로 내게 인상을 남겨보세요.”

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신호였다.

밀레나는 우측으로, 율은 좌측으로 뛰어 들어갔다. 율이 선공을 개시하면 밀레나는 후방을 선점해 교수의 다리를 노릴 것이다.

민 교수가 도끼를 놓으며 뒤로 물러섰다. 거리가 벌어졌지만 예상한 범위였다.

율이 한 걸음 더 뻗었다. 교수의 어깨로 손이 나아간다.

밀레나는 작은 신장의 이점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민 교수의 사각으로 들어갔다.

율의 공격이 성공한다면 이어지는 공세로 승리를 확정 지을 것이다. 빗나가면, 반격당하지 않도록 공격의 맥을 끊을 것이고.

시야에 교수의 오른쪽 다리가 들어왔다. 공격에 대비해 무게를 싣고 있었다.

중심축이 되는 발은 지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당연한 이치고, 그렇기에 확실한 목표가 될 수 있다.

“밀레나!”

율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잘못됐다는 뜻이다. 하지만 괜찮았다. 핀포인트로 오른쪽 발목을 잡아챌 수 있으니까.

몸을 더욱 낮추며 단숨에 달려들었다. 기동력을 제압하면 훌륭한 자기소개가….

“좋은 수였어요.”

민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눈앞으로 율이 날아들었다.

퍽!

밀레나는 나아가던 몸에 제동을 걸고 온몸으로 율을 받아냈다.

윽,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율과 한데 엉켜 뒤로 나자빠졌다.

턱이 얼얼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밀레나는 배에 얹혀 있는 율을 내려다봤다. 분명 이상적인 형태로 공격이 진행 중이었다.

상체를 흔들고, 다리를 친다. 수없이 해온 접근전의 기본이었다.

“너 뭐 한 거야?”

밀레나는 멍한 얼굴로 하늘을 보는 율에게 물었다.

“내 팔 붙어 있어?”

“어?”

“내 팔 말이야. 제대로 붙어 있냐고.”

밀레나는 누워 있는 율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있는 힘껏 어깨를 눌렀다.

“아야! 아프잖아.”

“붙어 있는 거 확인했지? 확인했으면 좀 내려와. 무거워.”

“뭘 무겁다고.”

율이 빙그르르 돌아 밀레나의 위에서 내려왔다. 밀레나는 몸에 묻은 먼지를 털고 앞을 보았다.

미엔과 로운이 민 교수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설명해봐. 무슨 짓을 했길래 네가 나한테 날아와.”

밀레나의 물음에 율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말보다 직접 봐봐.”

직접 보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미엔의 몸이 붕 떠올랐다.

입이 살며시 벌어졌다. 민 교수가 미엔의 오른팔을 붙잡더니, 몽둥이처럼 휘둘러버린 것이다.

“율, 너 몸무게가 몇이었지?”

“58 정도.”

“미엔은?”

“나랑 비슷하거나 조금 더 나가겠지.”

으억, 소리와 함께 미엔이 날아갔다. 물론 로운을 향해서. 한 겹으로 포개진 미엔과 로운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웃음이 나오진 않았다. 나도 똑같았을 테니까. 밀레나는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신체술을 쓴다고 해도 저게 가능한가?”

“저 속도로 달려드는 60kg짜리 물건을 깃털처럼 휘두르는 거? 일단 난 못 해. 설령 한다고 해도 내 인대가 비명을 지를 거야. 신체술이 만능은 아니니까. 그보다 내 팔 진짜 빠진 거 아니야?”

율이 울상을 지으며 오른팔을 만지작거렸다. 하긴, 팔이 뽑혀도 이상하지 않을 그림이다.

다시 일어서서 덤벼들고 싶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미 기동 시범으로 한계에 다다른 몸이었다. 신체술로 몸을 쥐어짠다고 해도 흐느적거리며 움직이게 될 것이다.

“밀레나.”

“왜?”

“나 좀 일으켜줘. 등이 말을 안 들어. 몸을 못 세우겠어.”

슬그머니 미소 짓는 율이었다. 밀레나가 한숨을 내쉬며 율의 등을 밀어줄 때였다.

마지막 주자였던 브리테와 이리엘데가 사이좋게 바닥에 꼬꾸라졌다. 정공법으로 덤벼들었다가 민 교수 손바닥에 치여버렸다.

사두마차와 부딪친 것처럼 볼썽사납게 나자빠진 두 사람에게 민 교수가 걸어갔다.

“젊다는 건 좋네요.”

민 교수가 두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

“나머지 학생들도 내 도움이 필요한가요?”

밀레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일어섰다. 퍼진 모습을 보여줄 순 없었다.

“나, 나 좀.”

율이 처량한 눈으로 바라본다. 밀레나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율에게 손을 내밀었다.

동기들이 일렬로 다시 섰다.

교수가 왼쪽에 선 미엔을 보며 물었다.

“한 사람씩 차례대로 이름을 말해봐요.”

미엔을 시작으로 동기들이 이름을 외쳤다.

“밀레나입니다!”

마지막으로 대답한 건 밀레나였다.

“첫 기동 시범을 치르고 몸을 움직이니까 어때요? 죽을 맛이죠?”

차마 예, 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괴롭히려는 거 아니니까 일단 자리에 앉죠. 아니, 아예 누워요.”

마음 같아서는 대자로 눕고 싶었다. 근데 그래도 되는 건가?

밀레나은 슬쩍 미엔을 바라봤다. 이럴 때 단체의 행동 방향을 결정하는 건 미엔이었으니까.

“이상하네요. 왜 내가 아닌 저 친구의 말을 기다리죠? 미엔이 상관인가요?”

“저, 정말로 누워도 되나요?”

율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 나이를 먹은 나조차 귀가 멀쩡한데, 왜 젊은 친구들이 내 말을 못 알아듣죠?”

이런 말까지 듣고 고민하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밀레나는 곧바로 바닥에 누웠다. 훈련 방식을 정하는 건 민 교수니까.

“여러분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에요.”

민 교수가 걸음을 떼며 말했다.

“누구보다 야성적으로 전투에 임하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예의를 갖추고 규범을 지키길 원하죠. 스콜라 생도가 된다는 건 정말 귀찮은 일이에요.”

민 교수가 머리맡으로 다가왔다. 밀레나는 긴장한 채 교수를 올려다봤다.

“여러분들은 짧으면 반년, 길면 1년이 넘는 시간을 나와 보내게 될 거예요.”

교수가 목 뒤에 손을 넣고 살며시 잡아당겼다. 뻣뻣했던 목에 긴장감이 풀리며 조금 편안해졌다.

민 교수는 율을 비롯한 다른 동기들의 자세를 조금씩 가다듬어 줬다.

“20분. 딱 20분 줄 테니 자고 일어나요. 설마 잠들지 못하는 불성실한 학생이 있는 건 아니겠죠? 여긴 야전도 아니고 평온한 공터예요. 이런 곳에서 잠들지 못한다면 병사로서 가치가 없는 거겠죠.”

말을 듣자마자 밀레나는 눈을 감았다. 수면 역시 훈련의 일종이었다. 쪽잠의 질을 올리는 방법론까지 있을 정도다.

밀레나는 어릴 때 뛰어놀던 저택을 떠올렸다. 엄마가 설치해준 그네를 기억해냈다.

그곳에 올라타 햇볕을 쬐는 상상을 했다. 순식간에 잠이 찾아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시야에 잡힌 건, 차를 즐기고 있는 민 교수였다.

“밀레나 학생은 정확하네요.”

비명을 질러대는 근육을 타이르며 상체를 세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동기들도 잠에서 깼다.

“일어났으면 다들 내 앞으로 와요.”

도낏자루에 걸터앉은 민 교수에게 걸어갔다.

“지금 몇 시죠?”

교수의 시선이 밀레나에게 닿았다. 회중시계를 꺼내 곧바로 시간을 확인했다.

“20시 14분입니다.”

“좋아요. 얘기할 시간은 많네요. 우선 질문 하나 하죠. 여러분들은 왜 거병 기사가 되어야 하나요?”

먼저 대답해야 하는 건가. 밀레나가 입을 열기 직전이었다.

민 교수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입이 아닌 오른쪽을 향해서.

“저기, 훈련장 끝에 있는 트레일러 보이나요?”

“예, 보입니다.”

“미엔만 남고 가봐요. 직선으로 가지 말고 내가 세워둔 봉을 끼고 한 바퀴 빙글 돌아서 찍고 와요.”

목울대가 출렁거렸다.

스콜라 교관 중에 악질이라고 소문 난 교관이 몇 명 있었다.

단언하건대, 그 누구를 데려와도 눈앞에 있는 민 교수보다는 다정할 것이다.

“두 번 말할 필요 없겠죠?”

밀레나는 곧바로 몸을 틀었다. 통증이 종아리를 타고 짜르르 퍼져 나갔지만, 멍청하게 서 있을 수는 없었다.

“미엔. 왜 거병 기사가 되어야 하는지 말해봐요.”

민 교수의 목소리를 들으며 저 멀리 있는 트레일러를 향해 뛰어갔다.

“이러려고 쉬게 한 거구나.”

옆으로 다가온 율이 한마디 했다.

“말할 기운도 아껴두는 게 좋을 거야.”

“왜?”

“아까 교수님이 뭐라고 했는지 잊었어?”

밀레나는 어두컴컴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어서 말했다. 민 교수의 어투를 흉내 내면서.

“‘좋아요. 얘기할 시간은 많네요.’”

“…농담하지 마.”

“나한테 그러지 말고 교수님한테 따져.”

“아, 이런, 씨.”

브리테와 이리엘데가 앞질러 뛰어갔다. 밀레나는 뒤를 살짝 돌아봤다. 로운이 헉헉대며 뛰어오고 있었다. 토실토실했던 볼살이 바짝 말라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니리라.

“괜찮아?”

밀레나가 물었다. 로운은 실실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했다. 음, 쟤는 곧 쓰러질지도 몰라.

봉을 끼고 훈련장을 돌아 트레일러를 찍은 다음 다시 민 교수 앞으로 돌아갔다.

평소였다면 호흡 한 톨 흐트러지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로 몸이 망가졌냐면, 땀이 한 방울 흘러나올 정도였다.

“속도는 이 정도면 되겠네요. 대화할 시간은 있어야 하니.”

민 교수가 손가락을 두 번 까닥거렸다. 미엔을 향해서, 그리고 로운을 향해서.

설명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자. 나머지는 즐겁게 뛰고 오고, 로운. 왜 거병 기사가 되어야 하는지 말해봐요.”

* * *

입에서 단내가 난다. 밀레나는 스카프로 목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훈련 축에도 못 낄 뜀박질이, 지금은 그 어떤 훈련보다 고됐다.

“밀레나.”

교수가 손짓했다. 밀레나는 턱을 치켜들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잠깐이나마 쉴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쁘기까지 했다.

“나머지는 왜 그렇게 서 있죠? 내가 쉬라고 했던가요?”

미엔이 로운의 등을 밀며 다시 출발했다. 밀레나는 멀어지는 동기들을 바라보다가 민 교수 앞에 앉았다.

“제가… 제가… 거병 기사가 되려는 이유는….”

헐떡이는 숨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필렌 엔첸세를 따라잡기 위해서입니다.”

“어려운 길이네요. 그렇기에 도전할 가치가 있고요.”

민 교수가 찻잔을 내밀었다.

“눈빛이 필렌을 많이 닮았네요. 아니, 필렌보다는 좀 더 유순해 보여요. 필렌은 싸가지가 없었거든요.”

교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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