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화
밀레나는 와들와들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먼저 시험을 끝낸 동기들이 거병 앞에 도열해 있었다.
“모두 수고 많았습니다. 그리고 무사히 기동 시범을 마친 걸 축하드립니다.”
비일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여력이 남아있으며 호응해 주고 싶었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다른 동기들도 마찬가지인지, 퀭한 얼굴로 비일을 바라볼 뿐이었다.
분명 해 뜰 때 모여서 기동 시범을 시작한 거 같은데, 어느덧 어스름이 깔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축제라고 했던가? 훈련복을 벗어 던지고 아무 생각 없이 축제를 즐기고 싶다는 충동이 몸을 휘감았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데 이렇게 힘들어서야 뭐 되겠어? 그냥 기사 포기할까?”
옆에 선 율이 한마디 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며칠은 밤을 지새운 것처럼 엉망이었다.
“포기할 거면 지금 해. 경쟁자 한 명이라도 줄이게.”
밀레나는 축제 생각을 떨쳐내며 말했다.
“고맙다. 그 말 들으니까 오기가 생기네.”
끙, 앓는 소리를 내며 턱을 드는 율이었다.
“합격자는 대충 정해진 것 같지?”
밀레나는 비일이 든 파일을 보며 말했다. 율이 왼손을 들어 올려 검지를 까닥거렸다.
“일단 난 움직였으니까 합격이겠지. 너도 마찬가지고.”
“합격한 뒤가 더 문제야.”
“그렇긴 해.”
어제 있었던 체임버 탑승은 정말 맛보기에 불과했다. 기동 시범은 입에서 욕이 나올 정도로 힘들었으니까.
훈련용 세팅이 아닌 실전 투입용으로 조정된 거병. 인지통합 초입에서 정신을 잃을 뻔했다.
자만심이 싹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체력이면 체력, 정신력이면 정신력. 감도를 높인 거병은 사람을 쥐어짜는 기계로 바뀌었다.
비일이 파일을 옆구리에 낀 채 걸어왔다. 동기들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당장 쓰러져서 쉬고 싶겠지만, 연례행사가 있으니 잠시 기다려주세요.”
행사? 일정에 그런 건 없었는데. 밀레나는 율을 흘깃 보았다. 들은 게 있냐는 눈빛을 담아.
율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마냥 기다리면 심심할 테니 그전에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결과란 말에 배에 힘이 꽉 들어갔다. 긴장된 눈으로 비일이 들고 있는 파일을 바라봤다.
“우선 기동 시범을 완수하지 못하고 군병원으로 이송된 17명은 당연히 연수자 명단에서 제외됩니다.”
동기 중 절반에 가까운 수가 걸러졌다. 그렇다면 이곳에 남은 생도들은 합격이란 걸까?
“무슨 생각 중인지 알 것 같네요. 저도 여러분과 똑같은 생각을 했었거든요. 하지만 아쉽게도 여기 계신 생도분 전원이 연수를 받을 순 없습니다.”
밀레나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1차 거름망을 통과했지만, 아직 2차가 남았다. 어쩌면 3번째 과정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까다로운 선별 기준을 납득 못 하는 건 아니었다. 거병 기사는 정예 중의 정예. 어수룩한 떡잎은 쳐내는 게 당연했다.
“아마 여러분들은 합격자가 누구인지 알고 계실 겁니다. 합격자들은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줬으니.”
희망이 보였다. 밀레나는 손을 움켜쥐었다. 기동 시범에서 거병의 손가락 두 개를 움직였다.
진땀을 뺀 결과가 겨우 손가락 두 개라니는 게 아쉽긴 하지만, 어쨌든 침묵한 거인을 깨운 것이다.
“연수자 명단을 말씀드리죠. 호명된 사람은 여기에 남고, 다른 분들은 숙소로 돌아가 쉬면 됩니다. 짐 정리는 모레 하면 되니 서두르지 마시고.”
비일이 연한 웃음을 지으며 이름을 불렀다.
“율, 브리테, 미엔, 로운, 이리엘데, 밀레나. 이상이 합격자 명단입니다. 축하드려요. 고생길에 들어서게 된걸.”
고생길이란 말에 일단 헛웃음이 나왔다. 몸에서 긴장감이 빠져나가자 다리 힘도 풀렸다. 앞으로 쏠리는 무게중심을 겨우 다잡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됐다!
겨우 한 걸음이지만, 엄마의 발자취를 따라잡았다.
“축하한다.”
“욕봐라.”
통과하지 못한 동기들이 한마디씩 남기며 떠나갔다. 몇몇은 걸음을 돌리지 못하고 거병을 올려다보며 울음을 삼키기도 했다.
율이 탈락한 동기에게 다가서려 했다. 밀레나는 율의 팔을 붙잡았다.
“알잖아. 지금 위로하면 오히려 욕하는 것보다 더 기분 나쁘다는 걸.”
율이 씁쓸한 미소를 짓는 사이, 눈물을 닦아내던 동기가 몸을 돌렸다.
“여러분의 동기들은 포기할 줄 아는 사람들이네요. 저 때는 시험을 한 번 더 치르게 해달라고 난리도 아니었죠.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매달릴 수밖에 없는 그 심정을 알기에, 뭐라 말도 못 하고.”
비일이 바닥에 앉으라며 손짓했다. 바닥에 엉덩이를 데자마자 한숨부터 나왔다.
“힘들죠?”
“아닙니다!”
너덜너덜한 몸과 달리 대답은 힘차게 나왔다. 몸에 밴 버릇은 이래서 무섭다.
“전 교관이 아니에요. 그러니 힘들게 대답할 필요 없어요.”
비일이 물통을 가져와 한 사람씩 나눠주었다. 마개를 열고 허겁지겁 물을 마셨다.
“바로 쉬게 해드리고 싶지만, 아까 말한 행사가 있어서 여러분을 붙들어둬야 해요.”
“질문이 있습니다.”
미엔이 입을 열었다.
“네, 하세요.”
“사전에 행사가 있다는 말을 못 들었습니다.”
“공식 일정으로 잡힌 건 아니거든요. 축제 일정하고 맞춰야 해서.”
“축제 일정이라 하심은….”
“그건 여러분들의 선배님이 오시면 다 알게 될 겁니다.”
선배님이라.
밀레나는 어제 훈련장에서 본 여자를 떠올렸다. 손목에 시동키를 감고 있었지.
“다른 질문 있나요? 개인적인 질문도 환영합니다. 저도 기다려야 하는 입장이라 심심하거든요.”
“선배님께선 왜 기사가 아닌 써전을 택하신 겁니까?”
질문한 건 브리테였다.
“선배라고 불러주니 고맙네요. 질문을 받았으니 답을 해야겠죠? 기사가 될 자격을 못 갖췄으니 써전이 됐습니다. 아주 간단명료하죠?”
“제가 들은 얘기는 좀 다릅니다.”
“무슨 소문을 들은 거죠?”
“선배님 기수 중에 선배님보다 뛰어난 기량을 발휘한 사람은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비일이 코끝을 매만졌다.
“그런 소문이 돌았나요?”
“대답하기 어려우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뭐, 어려울 것까지는 없죠.”
비일이 거병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전 거병이 좋습니다. 인지통합이 완료된 순간의 그 일치감이 좋아요. 그걸 자주 느끼려면 거병에 자주 올라타야 하죠. 그래서 써전이 됐어요. 실전 투입보다 점검 횟수가 훨씬 많으니까요.”
별난 사람이었다. 부와 명예가 따르는 거병 기사를 포기하고 기사의 심부름꾼이라 취급받는 써전을 택하다니.
“다들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네요. 괜찮아요. 익숙하니까. 뭐가 됐든 자기가 만족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거잖아요? 전 써전이 된 걸 후회하지 않아요. 기사보다 상당히 자유롭고.”
이리엘데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도 선배님께 질문이 있습니다.”
“뭔가요?”
“정말로 실험용 기체 한 기를 박살 내셨나요?”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사실인가 보네요.”
“약간의 과장과 날조가 섞여 있어요.”
“부순 건 사실이죠?”
“집요한 아가씨군요. 예, 한 기 시원하게 해먹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성도와 둔을 오가며 온갖 잡일을 하고 있죠. 여러분은 빚지지 마세요.”
밀레나는 아, 하고 작게 소리 냈다.
성도 관리국에서 제조된 실험기가 반파된 사건은 꽤 유명한 일화였다.
그 사건의 주인공이 비일이었구나.
동시에 의문이 생겼다. 실험기라고 한들 개인이 감당하지 못할 자본이 들어갔을 것이다.
‘해먹었다’는 발언에 따르면 비일의 실수로 인해 기체가 부서졌다는 건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사고를 일으키고도 어떻게 이곳에 있는 거지?
알페시아 지하 감옥에 끌려가고도 남을 사건인데.
“몇몇 분들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지네요. 어떻게 저 인간의 목이 얌전히 붙어 있을까, 그런 생각 중이시죠?”
뜨끔했다. 밀레나는 시선을 슬그머니 바닥으로 깔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운이 좋았다고 해둘게요. 그러니 여러분들은 사고 치지 마세요. 저처럼 노예처럼 일하게 됩니다.”
자조적인 농담에 살짝 웃음이 나왔다.
“노예는 무슨.”
밀레나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했다. 휴리우스 교관이었다.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감점과 더불어 훈련이 예약된 순간이었다.
피곤으로 찌든 동기들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다들 망했다, 이 생각 중이리라.
“평상시였다면 곧바로 집합이겠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감점도, 훈련도 없다. 그러니 표정 관리해.”
교관의 말에 밀레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너처럼 자유로운 노예가 있다면 나도 그 노예란 걸 해보고 싶네. 잘 들어라. 너희 앞에 있는 저 선배가 거병 하나를 작살내고도 뻔뻔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건, 거병 한 기보다 저놈의 몸값이 높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그런 문제를 일으켰다면, 가문명을 박탈당하고 곧바로 지하실로 끌려갔을 거다.”
“부끄럽게 왜 그러세요.”
비일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다들 기상!”
교관이 외쳤다. 밀레나는 재빠르게 일어나 차렷 자세를 취했다.
“복장을 점검해라.”
훈련복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풀어둔 단추를 잠갔다. 벨트를 당기고 군화의 줄을 다시 묶었다.
“곧 연수 기간 동안 너희를 지도해주실 교수님이 오실 거다. 호칭은 방금 말한 대로 교수님이라 부르면 된다. 앞으로는 나보다 그분과 가까이 지내야 할 거다.”
“예!”
비일이 휴리우스에게 파일을 건네고 뒤로 물렀다.
“교수님의 성함은 ‘민 크알데’. 가문명은 버리셨고, 크알데는 우리가 존경심을 담아 붙인 애칭이다.”
뒤쪽에서 솜털을 쭈뼛 서게 하는 기운이 느껴졌다. 돌아보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들었지만, 턱을 돌리는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다.
교관이 서 있는 앞만 보며 뒤에서 걸어오는 교수의 정체를 상상할 때였다.
“휴리우스. 못 보던 사이에 더 잘생겨졌네.”
“저야 원래 잘생겼죠.”
밀레나는 눈동자만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예상이 맞았다. 어제 본 그 여자였다.
“일단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기동식을 끝내고 약간에 문제가 생겨서 늦어졌네요.”
축제 때 사용된 거병을 이분이 조종한 거구나. 밀레나는 앞에 선 ‘교수’를 바라봤다.
어깨선에 맞춰 자른 갈색 머리카락. 날렵한 눈썹 밑으로 세월이 느껴지는 옅은 눈주름이 보인다.
마흔 초중반? 얼굴만 본다면 학식이 깊은 학자 같은데, 전신을 눈에 담으면 인상이 한순간에 바뀐다.
휴리우스 교관과 비슷한 냄새가 난다. 아니, 그보다 더 위압적이다.
나이로 본다면 전성기가 지난 육체일 텐데, 교수의 몸은 극한으로 단련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련을 한다면 과연 몇 분이나 버틸 수 있을까. 호승심이 잠깐 들었지만, 교수의 목소리가 생각을 잠재웠다.
“아, 저기 오네.”
민 크알데 교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밀레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건장한 남자 둘이 거대한 도끼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일단 대화를 나눠볼까요?”
교수가 말했다.
그 대화라는 게 편안하게 앉아서 하는 대화가 아니라는 걸, 밀레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