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여기예요.”
가하란은 어둑한 처마 밑을 가리키며 말했다. 골목 곳곳에 등이 켜져 있지만, 이 집만큼은 조용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여기구나.”
칼리고가 낮은 담벼락 안쪽으로 들어갔다. 가하란도 뒤따라 움직였다.
“이건….”
칼리고의 시선이 작은 텃밭에 닿아있는 걸 발견했다. 가하란은 옅게 웃으며 말했다.
“할아버지께서 가꾸시던 거예요. 이쪽은 토마토고 저쪽은 토향취예요.”
가하란은 곧게 뻗은 토마토 줄기를 살며시 만졌다.
“좁은 곳에서도 잘 자라는 특별한 토마토라고 했어요. 내버려 두면 금방 메마를 거 같아서 제가 물을 주고 있어요. 가끔 벌레도 쫓고요.”
“그랬구나. 혹시 토향취를 따서 우려먹은 적이 있니?”
“저거 우려먹을 수 있는 거예요? 전 예뻐서 키우는 줄 알았어요.”
“이름대로 흙내가 진한 차가 만들어지는데, 입에 맞으면 이것만 찾아서 먹게 된다더라.”
칼리고가 토향취 잎을 가리키며 물었다.
“잎을 몇 개 따도 괜찮을까?”
“그럼요.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어요. 잘 가꾼 작물은 맛있게 먹어야 한다고.”
칼리고는 토향취의 잎을 따서 손수건으로 감쌌다.
“안에 들어가 봐도 되겠니?”
조심스럽게 말하는 칼리고였다. 당당하고 거침없는 아저씨라 생각했는데. 낯선 모습이었다.
가하란은 문을 살며시 당겼다. 잠금장치는 풀어둔 지 오래였다.
“들어오세요.”
달빛이 스며들어 앞을 분간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흔들의자 옆에 놓아둔 초를 보며 말했다.
“옆집에서 불을 빌려올게요.”
“그럴 필요 없어.”
칼리고가 품에서 쇠막대기를 꺼냈다. 가하란은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라이터. 불을 뿜어내는 신기한 마법공학품.
쇠끝에서 피어난 불이 양초 심지에 닿았다. 가하란은 걸어둔 유등을 내려 불을 옮겼다.
집 안 구석구석으로 주홍빛이 퍼져나간다.
“깨끗하네.”
“자주 청소하거든요.”
“너 혼자 청소하는 거니?”
“아니요. 다른 사람들도 시간 날 때 종종 찾아와서 정리해요. 집을 혼자 내버려 두면 안 된다고, 어른들이 그랬어요.”
“맞는 말이야. 집은 혼자 내버려 두면 안 되지.”
칼리고가 벽장을 손으로 쓸었다.
“이런 곳에 계셨구나.”
읊조리듯 말하는 목소리에서 슬픔이 느껴졌다. 가하란은 칼리고 옆에 서며 물었다.
“할아버지하고 친하셨나요?”
“아니. 아마 그분은 날 기억하지 못할 거야. 먼발치에서 구경한 게 전부니까. 아! 멀리서만 본 건 아니었구나. 딱 한 번 그분께 격려를 받았지.”
목소리에 서렸던 슬픔은 점점 옅어지고 그 자리를 은은한 기쁨이 채워나갔다.
“네가 그랬지? 팬이 있을 정도로 멋진 분이셨다고. 나도 그분의 팬이었어. 아니, 나뿐만이 아니었지. 내 또래 사내놈들은 전부 그분의 팬이었거든.”
칼리고가 흔들의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의자 팔걸이를 잡고 살며시 앞뒤로 움직였다.
“가하란. 랍파가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있니?”
“안내자라고 알고 있어요.”
“가장 단순하면서도 정확한 설명이네. 네 말대로 랍파는 안내자야.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멀리 내다보는 사람들.”
칼리고가 빙긋 웃으며 가하란을 바라봤다.
“네 할아버지께선 그런 랍파들 중에서 으뜸이라 할 수 있었지.”
가하란은 서랍 위 안경을 보았다. 할아버지가 목에 걸고 다니던 돋보기안경.
“사실 전 할아버지에 대해 잘 몰라요. 제가 아는 할아버지는 옆집에 살면서 식물을 가꾸시고, 종종 툴과 놀아주시면서 절 가르쳐주던 분이니까요.”
병실을 찾았던 초록 눈을 가진 여자, 첼, 밀레나, 엔엔, 그리고 칼리고.
모두가 할아버지를 가리켜 ‘위대한 랍파’라고 했다.
거대한 매를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던 할아버지는 말 그대로 위대해 보였다.
하지만 핀들론의 젊은 시절이 어땠는지, 가하란은 전혀 알지 못했다. 선물받은 기록지에 일화가 남아있지만, 그곳에 쓰인 건 할아버지가 직접 쓴 담백한 이야기뿐.
“아저씨.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요? 아니, 어떤 랍파셨나요?”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힐 정도로 대단한 분이셨지. 미개척지라고 들어봤어?”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한 곳. 절대로 가서는 안 되는 곳이라고 들었어요. 근처에만 가도 마수가 나온다고.”
“잘 알고 있네. 정말 위험한 곳이지.”
칼리고가 주방 쪽으로 걸음을 뗐다. 습기를 머금은 나무가 삐걱 소리를 냈다.
“그분께서 한 일을 아주 간략하게 말하면, 다섯 곳이 넘는 미개척지에서 안전루트를 개척해 냈다는 거야.”
“안전루트요?”
“물자가 이동할 수 있는 길. 마수의 출현 빈도가 극히 낮은 안전한 장소. 인간이 오래전에 포기하고 선을 그어놓은 땅으로 들어가, 인간이 다시 발을 디딜 수 있도록 지도를 만드셨지.”
칼리고가 한쪽 눈을 살며시 찌푸렸다. 왼쪽 입꼬리는 위로 올라갔다.
“사실 말로서 풀어낸다는 게 불가능할 정도야. 미개척지의 위험도는 말로서 전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직접 마수와 마주한 사람들만이 정확히 알 수 있어. …그것들이 득실대는 땅으로 들어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칼리고 말대로 얼마나 위험한지 잘 와닿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칼리고가 검지로 턱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굳이 비유해 보자면… 대낮에 칼을 들고 왕성으로 뛰어드는 게 지극히 이성적이고 안전해 보일 정도?”
황제에게 칼 들고 덤벼드는 게 훨씬 안전하다?
“할아버지는 그런 곳을 다섯 번이나 가신 거예요?”
“아니. 안전루트를 확보하려면 적어도 3개월 이상의 검증이 필요해. 그동안 미개척지 안에서 숨어 지내는 게 아니라 수시로 접경지를 오가야 하고. 너희 할아버지께서 몇 번이나 미개척지를 오갔을지, 나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어.”
칼리고는 비스듬히 놓인 접시를 반듯하게 세우며 이어 말했다.
“이룩한 업적도 대단하지만, 인격자로서도 유명하셨지. 이 정갈한 집이 그분의 성격을 대변하는 것 같네.”
한동안 방 안을 살피던 칼리고가 이제 됐다며 밖으로 나왔다. 담벼락 앞에 선 칼리고가 단검으로 땅을 긁어냈다.
작은 구덩이가 생겨났다.
“뭐 하세요?”
“나름의 인사를 드리려고.”
구덩이에 금화를 내려놓은 후 흙으로 덮었다. 손바닥으로 흙을 고르게 펴고 꾹꾹 누르는 모습이 경건하기까지 하다.
“어린 후배가 늦게나마 인사드립니다. 나중에 뵙게 되면 알아봐주세요.”
손을 털어낸 칼리고는 평소의 웃음을 되찾았다.
“옆에 산다고 했으니, 너희 집은 저기겠네?”
“네.”
“잠깐 실례해도 될까? 차도 마실 겸.”
칼리고가 찻잎이 든 손수건을 흔들며 말했다. 가하란은 물론이죠, 라고 대답하며 집으로 걸어갔다.
닫힌 현관문을 열자마자 툴이 튀어나왔다. 커다란 몸을 날리며 덤벼드는데, 몸으로 받아낼 엄두가 안 나서 옆으로 피했다.
헥헥거리며 두리번거리던 툴이 이번엔 칼리고에게 뛰어올랐다.
“야, 넌 뭘 먹고 이렇게 크냐.”
칼리고가 툴의 앞발을 붙든 채 말했다. 가하란은 툴의 꼬리를 보았다. 힘차게 휘젓고 있는 걸 보면 칼리고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아저씨하고 놀고 싶은가 봐요.”
“그래?”
칼리고가 툴을 번쩍 안아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엄청 무거울 텐데, 칼리고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마른 체형과 달리 힘은 센 걸까?
“여기가 올란트의 집이구나. 잘 꾸며 놨네.”
“맞다. 아빠하고도 예전에 만났다고 했죠?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
“자세한 건 네 증조할아버지께서 말해줄 테니… 그냥 가까운 이웃이었다고만 해둘게.”
가하란은 난로 옆 불쏘시개를 들며 물었다.
“요즘 들어 생각하는 건데, 아빠는 비밀이 많은 거 같아요.”
“사람은 누구나 비밀을 갖고 있지.”
“전 별로 없어요.”
“별로 없다는 건 한두 개 정도는 있다는 뜻이겠네?”
“…그렇다고 해둘게요.”
불을 지핀 후 불씨를 화구에 옮겨 담았다. 화구 위에 주전자를 올려두고 잠시 기다렸다.
“아저씨. 핀들론 할아버지 얘기 더 해주면 안 돼요?”
“못 해줄 것도 없지. 하지만 탐사에 관한 자세한 얘기는 나도 잘 몰라. 로안 님께서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 난 철부지 십 대였으니까.”
“그거라면….”
가하란은 방으로 들어가 기록지를 들고나왔다.
“이거 보실래요?”
“이게 뭔데.”
“할아버지께서 남기신 기록지요.”
“로안 님께서?”
두 손으로 기록지를 쥐고 내밀었는데, 칼리고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쳐다볼 뿐이었다.
“안 읽으실 거예요?”
“아니! 이런 귀한 걸 읽지 않고 넘긴다면 평생 후회하겠지.”
“그런데 왜 안 받으세요?”
“이걸 맨손으로 잡아도 되는지, 그걸 고민하는 중이야. 아저씨가 업무를 볼 때만 쓰는 장갑이 있거든? 그걸 가져왔어야 하는데. 이 귀한 것에 때라도 타는 날엔….”
“괜찮아요.”
허공에서 머뭇거리는 손 위에 기록지를 올려두었다. 칼리고는 멍한 눈으로 기록지를 보다가, 이내 기록지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 표정이 꼭 어린애 같았다.
“천천히 읽으셔도 돼요. 아니면 빌려 가셔도 되고요. 아! 다른 분한테도 보여드려야 하니까 너무 오래 빌려 가시면 안 돼요.”
칼리고가 고개를 돌려 가하란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한테도 빌려준다고?”
“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이 기록지에 대해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돼?”
가하란은 손가락을 꼽으며 생각했다. 올란트, 첼, 밀레나, 엔엔.
“4명 정도요.”
“그렇구나. 가하란, 다른 사람 물건에 참견하는 것도 웃기긴 한데… 그래도 앞으로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이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를 지닌 물건이니까.”
칼리고가 기록지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이런 게 존재한다고 알려지면 컬렉터들이 널 찾아오게 될 거야. 일반 시민은 평생 만져보지 못할 돈을 제시하며 이걸 팔라고 하겠지.”
“전 팔지 않을 거예요. 이건 할아버지가 저한테 준 선물이니까요.”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하지만 수집욕에 눈이 돌아간 컬렉터들은 합법적인 방식 외에도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 물건을 가져가.”
“훔친다는 소리예요?”
“훔치기만 한다면 예의 바른 인간이지.”
“…죽이고 빼앗아가는 건가요?”
“그런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져. 그러니 앞으로는 조심해.”
가하란은 눈을 갸름하게 뜨며 칼리고를 보았다.
“아저씨도 조심해야 할까요?”
“그러는 편이 좋지. 나도 욕심이란 게 생길 정도니까.”
칼리고가 기록지를 앞으로 밀었다. 가하란은 씩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에요.”
“알아.”
칼리고가 재빨리 기록을 가져가 조심스럽게 첫 장을 넘겼다.
“근데 괜찮을 거예요. 믿을 수 있는 사람한테만 말했으니까요. 첼 할아버지랑 아빠, 밀레나 누나, 엔엔 님.”
“총집사님과 올란트는 그렇다 치고. 엔엔이라면 설마 연구단지에 계신 그분 말하는 거냐? 칼랑족?”
“네! 아저씨도 아세요?”
“안면 정돈 튼 사이지. 그나저나, 너도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는구나.”
“가만히 있는 건 재미없잖아요.”
“그렇긴 해.”
칼리고가 기록지에서 눈을 뗐다.
“나머지 한 명은 밀레나 엔첸세를 말하는 거겠지?”
“맞아요. 골목 얘들 말고 처음으로 사귄 친구예요.”
“밀레나 양이라면 기록지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금방 파악했겠네.”
맞아요, 라고 가하란은 대답했다. 칼리고 말대로 누나는 기록지를 읽자마자 알아챘다.
“앞으로는 말 안 할게요. 아저씨 말대로 위험한 사람들이 찾아오면 안 되니까.”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말해. 아저씨가 어느 정도는 정리해 줄 수 있으니까. 이런 귀한 걸 보게 됐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지.”
엄지를 세우며 진하게 웃는 칼리고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