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살루민. 남부 어촌 마을에서 자주 먹는 만두라고 했다. 젓가락으로 만두를 콕 찍어 입으로 가져갈 때였다.
가하란은 문득 든 생각에 칼리고를 바라봤다.
“아저씨.”
“왜?”
질문에 앞서 칼리고 그릇이 눈에 들어왔다. 만두를 잘게 찢어 국수 위에 얹고 있었다.
“그렇게 먹는 거예요?”
“나도 옆 테이블 보고 따라 하는 중이야.”
칼리고가 젓가락을 들어 옆을 가리켰다. 이상하지 않으려나. 의구심이 들었지만 일단 실행했다.
터진 만두소가 국물에 퍼져나갔다. 숟가락으로 맛을 봤는데 기름진 맛이 진해졌다.
“이거 맛있어요.”
“단골들의 독특한 식사법은 따라 해볼 가치가 있지.”
가하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옆에 있는 아주머니랑 아는 사이에요?”
오십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 근데 아는 사이였다면 가게에 들어왔을 때 인사하지 않았을까?
“오늘 처음 보는 사람.”
“근데 단골인 걸 어떻게 아세요?”
“그거야 쉽지. 우선 복장을 봐.”
가하란은 오십 대 여자의 의상을 살폈다. 결이 거친 앞치마, 편해 보이는 슬리퍼, 거뭇한 게 묻은 바지.
“뭐 하시는 분 같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장사하시는 분 같아요.”
“모를 리가 없는데. 낮에 봤잖아. 이 맞은편 노점에서 건어물 파시던 분.”
가하란은 살며시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었다. 축제가 한창이던 낮에 이 앞을 지나갔었지.
“맞아요. 생각났어요.”
“정말 생각나?”
“네. 그때 어떤 할머니한테 말린 생선을 팔고 계셨어요. 3마리.”
“…제대로 기억하고 있네. 근데 어떻게 기억하고 있어? 의미 없는 사건은 금방 잊히기 마련인데.”
“기억력이 나쁘진 않거든요. 그리고 아저씨도 기억하시잖아요. 다른 사람들도 집중해서 생각하면 다 떠올릴걸요?”
“하핫, 그건 아닐걸. 어쨌든 근처에서 장사하는 사람이란 걸 알아냈으니 다음 단계로 가보자. 저 아줌마의 잔을 봐봐.”
매끄러운 도기였다. 형태도 잘 잡혀 있고. 유약도 꼼꼼히 발랐는지 반질반질했다.
가하란은 자신의 컵을 바라봤다. 흙으로 모양을 잡고 구워낸 건 마찬가지지만, 생긴 게 엉성했다.
“단골에게 전용 식기구를 내놓는 건 관습 중 하나야. 고마움의 표시이자 앞으로도 계속 찾아와 달라는 인사지.”
“아하.”
“하지만 이것만으로 단골이라 결정지을 순 없어.”
가하란은 잠시 생각한 후 입술을 뗐다.
“사람이 몰려서 그릇이 모자라면, 단골한테만 주는 그릇을 쓸 수도 있겠네요?”
“혹은 그 단골이 더 이상 가게를 찾지 않아 의미를 잃게 되면 여기저기 막 쓰게 되지.”
설명을 들은 뒤 가게 안을 살폈다. 손님이 꽤 있었지만 빈 테이블도 몇 개 있었다.
“단골손님에게만 주는 그릇을 써야 할 정도로 붐비진 않네요.”
“그렇지. 거기에 마지막으로….”
칼리고가 고갯짓으로 옆 테이블을 가리켰다. 다시금 테이블 위를 살폈다. 그릇 옆에 살포시 쌓아둔 동전이 보였다.
“이런 가게는 보통 선금을 내야 하는데, 저 아줌마는 식탁에 돈을 올려둔 상태지. 동화 3개. 주문한 음식 가격과 일치해.”
칼리고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스론, 오늘도 잘 먹었어.”
“예, 들어가세요.”
여자는 작게 하품하며 가게를 나섰고, 카운터에 있던 가게 주인은 행주를 들고 식탁으로 걸어왔다. 돈을 챙기고 그릇을 치운 다음 힘찬 손길로 테이블을 닦는다.
가하란은 칼리고를 바라보며 물었다.
“언제 알게 된 거예요? 방금 나가신 아주머니가 단골이라는 걸.”
“여기 들어오자마자 알았지. 확신한 건 음식과 함께 이 컵이 나온 후지만.”
칼리고가 찌그러진 잔을 들어 올렸다.
“아저씨는 천재인 거 같아요.”
“내가 좀 똑똑하긴 하지. 근데 천재는 아니야. 이 정도는 누구나 다 할 수 있어. 주변을 유심히 살피고 생각을 조합하는 거지.”
물을 마신 칼리고가 이어서 말했다.
“그보다 나한테 질문할 거 있지 않아?”
“네?”
질문? 멍한 눈으로 칼리고를 바라보다가 아, 하면서 방긋 웃었다. 단골 추리 때문에 잠깐 잊고 있었던 궁금증이 생각났다.
“아까 한 얘기요.”
“무슨 얘기? 단골? 살루민? 아니면 내 멋진 수첩에 관한 거?”
“그거 말고요. 빵집 이야기요. A와 B, 그리고 C.”
계속 얘기해 보라는 듯이 칼리고가 손으로 가하란을 가리켰다.
“지금 와서 생각난 건데, 비유가 조금 이상했어요. 착한 사람 A가 빵을 훔치게 되면 B가 손해 본다고 했는데, 지금 보니까 억지 같아요.”
“억지 맞아.”
쉽게 인정하는 칼리고였다.
“이야기를 단순화하면 허점이 많아지지. 게다가 법이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게 처리되는 것도 아니고. 피해자 보상이 제대로 이뤄진다면 B는 손해를 보지 않게 돼.”
“맞아요. 근데 왜 아까는….”
칼리고가 젓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이미 지나간 얘기야. 과거의 잘못을 지적할 순 없어. 내 비유는 어설프고 오류가 많았지만, 넌 지적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지. 거기서 끝.”
“네? 그런 거 어디 있어요.”
“원래 그런 거야. 억울하면 시간을 되돌려서 과거의 나한테 잘못됐다고 일침을 놓든가. 근데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을 네가 알던가?”
“…아저씨는 쩨쩨해요.”
“아까는 천재라며?”
“취소할래요.”
“말은 취소할 수 있는 게 아닌데.”
가하란을 코를 찡그렸다. 단 한 마디도 안 지는 어른이었다.
“애 놀리는 어른은 철이 덜 든 거래요.”
“어쩐지. 난 영원히 어린애고 싶더라.”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을 알게 된다면 오늘 이 순간으로 돌아올 거예요.”
“나야 좋지. 너랑 또 놀 수 있으니까.”
가하란은 뚱한 얼굴로 칼리고를 바라보다가 이내 소리 죽여 웃었다.
“브라인 님이 왜 아저씨를 싫어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왜? 너도 내가 싫어?”
“아니요. 전 오히려 좋아요.”
숟가락으로 건더기를 떠먹었다. 떠들면서 먹으면 앞으로 두 그릇은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저씨.”
“왜?”
“시간 얘기가 나와서 그러는데, 시간은 왜 앞으로만 가요? 뒤로도 가면 좋을 텐데.”
“그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네.”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걸 대답해주는 할아버지도 이 질문만큼은 웃음으로 넘겼다.
“왜 어려운 질문인지 생각해 봤니?”
다른 주제로 넘어갈 줄 알았는데 의외의 질문이 되돌아왔다. 가하란은 칼리고의 물음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왜 어려운 질문인가.
“잘 모르니까 어려운 거 아니에요?”
“틀린 말은 아니야. 네 말대로 모르니까 어려운 거지. 근데 관점을 바꿔서 생각해 봐야 해.”
“관점이요?”
“말이 조금 어렵나?”
“아니요. 그렇지는 않아요.”
칼리고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좋아. 너는 내게 이렇게 물었지. ‘시간은 왜 앞으로만 가냐고.’ 여기서 내가 ‘그냥’이라고 대답하면 넌 만족할 수 있니?”
가하란은 대차게 고개를 저었다. 모든 물음에 그냥이란 대답은 존재할 수 없었다.
“왜 만족할 수 없어?”
“그건 대답이 아니니까요.”
“대답이 아니다? 그러면 넌 어떤 대답을 원해?”
“그걸 알기 위해서 질문한 건데요?”
“그렇지. 알기 위해서 질문하는 거지. 그렇다면 안다는 건 대체 뭘까?”
질문을 던졌는데 질문으로 돌아왔다. 낯설지만 흥미가 생겼다. 궁리하면서 천천히 대답했다.
“이해한 거요.”
“이해했다는 건?”
“…아는 거요.”
“제자리걸음은 좋지 않아.”
침묵한 채 식탁만 계속 바라보자, 칼리고가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재미있지? 모두가 납득한 단순한 정보조차 정확한 개념으로 설명하려면 복잡해져. 한 가지 더 예를 들어볼까?”
칼리고가 숟가락을 내밀었다.
“이건 뭐지?”
“숟가락이요.”
“네 앞에 있는 것도 숟가락이지?”
“네.”
칼리고가 두 개의 숟가락을 나란히 두었다.
“근데 자세히 보면 형태가 조금씩 달라. 얘는 손잡이가 좀 더 짧고, 이쪽은 움푹 파였지. 근데도 똑같은 숟가락이라 할 수 있어?”
“숟가락은 숟가락이니까요.”
“왜?”
“이렇게 생긴 걸 숟가락이라고 부르니까요.”
“끝이 네모나게 깎였다면?”
“그래도 음식을 떠먹을 수 있으니까 숟가락이죠.”
“컵으로도 음식을 떠먹을 수 있는데, 그러면 컵도 숟가락인가?”
“생긴 게 완전히 다르니까 아니죠.”
“다름의 경계를 정확히 구별할 수 있어? 어느 정도 달라야 숟가락이고, 컵이지?”
갑자기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했다.
당연한 거 아닌가? 숟가락과 컵은 다른 건데. 그런데 당연하다는 말로 설명하려고 하니까 목구멍에 과일 씨가 걸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숟가락의 형태가 중요한 걸까, 기능이 중요한 걸까. 무엇을 기준점으로 숟가락과 컵을 구분할 수 있을까. 또 그러한 구분점은 누가 제시한 걸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전쟁이 났다. 단어들이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데,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됐다.
“…모르겠어요.”
머릿속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답은 결국 ‘모른다’였다.
칼리고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분명한 형태가 있는 숟가락조차 본질을 파고들기 시작하면 까다로워져. 하물며 시간은 어떨까?”
“안 보이는 거니까 더 어렵겠네요.”
“그뿐만이 아니야. 나는 네가 시간에 대해, 또 앞이라는 개념에 대해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는지 몰라. 질문자의 수준을 파악할 수 없으니 대답하기도 힘들어.”
“…제가 바보라서 대답하기 어려운 건가요?”
“아니. 우리 둘 다 바보라 대답하기 어렵다는 뜻이야.”
가하란은 아, 하고 작게 감탄했다. 핀들론이 해준 이야기가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왜?”
“할아버지께서 해준 말이 생각났어요.”
“무슨 말?”
“‘네가 세계를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내 대답이 달라진다.’ 이제야 이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한 것 같아요.”
칼리고가 진한 웃음을 그렸다.
“나보다 훨씬 훌륭한 선생님이 이미 계셨네. 저번에 가게에서 말한 그분이시지? 옆집에 살고 계신다던.”
“네. 핀들론 할아버지요.”
“나중에 한번 찾아가 봬야겠네. 시간 되면 나랑 같이 가자. 혼자 가면 수상해 보여.”
가하란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칼리고가 입을 열었다.
“돌아가셨구나.”
“…네.”
“미안하다. 내가 괜한 말을 꺼내서.”
“아니에요. 할아버지가 계셨다면 아저씨 말 듣고 엄청 좋아하셨을 거예요. 다른 사람하고 대화하는 걸 즐기셨거든요.”
“…그래.”
칼리고가 곁으로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하늘에 계신 할아버지께서 널 보며 대견해하실 거다. 가르침을 잊지 않고 이렇게 똑바로 기억하고 있으니까.”
“할아버지가 해준 말은 평생 기억할 거예요. 타챠 아저씨도 그랬어요. 기억하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좋은 말이네. 근데 타챠 아저씨는 누구야?”
“있어요. 이상한 농담 하는 도마뱀 아저씨가.”
가하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근데 할아버지는 하늘이 아니라 저 먼 땅끝에 계실 거예요.”
“땅끝?”
“네! 할아버지는 모험가거든요. 하늘에 얌전히 계실 분이 아니에요. 지금도 엄청 큰 매와 함께 세상 끝을 탐험하고 계세요. 제가 봤거든요.”
“엄청 큰 매와 모험가라. 혹시 할아버지께서….”
가하란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랍파셨어요. 예전에는 로안이라는 이름으로 사셨고요. 팬이 있을 정도로 멋진 분이셨어요.”
항상 웃는 얼굴이던 칼리고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얕은 탄식을 내뱉었다.
한동안 입을 다문 채 창밖을 바라보는 칼리고였다.
“가하란.”
“네.”
“그분이 사셨던 집으로 날 데려다줄 수 있겠니?”
미소를 되찾은 채 입을 연 칼리고였지만, 그 미소는 왠지 쓸쓸해 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